화왕산은 창녕의 진산(鎭山)이다. 진산(鎭山)이란 각 고을 소재지 뒤 주로 북쪽에 있는 큰 산을 말하며, 주산(主山)이라고도 하며 풍수지리상의 개념이다.
봄이면 철쭉, 진달래꽃이 만발하고 가을이면 억새꽃이 바람에 물결치니 꽃이 만발하는 화왕산(花旺山)이라 불릴만한데 왜 불이 왕성한 화왕산(火旺山)이라 했을까?
그것은 화산활동이 활발하여 불뫼․큰불뫼 즉 불의 왕이란 뜻의 화왕산(火王山)으로 불렸고 조선 후기에 어느 시점부터 화왕산(火旺山)이 되었다.
화왕산(火旺山)은 우기(雨期)에 황강, 남강이 만나 범람이 잦았던 낙동강 하류의 물 기운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불기운이 왕성해야 한다는 풍수적인 뜻이 남긴 이름으로 추정된다.
화왕산에서 용암이 분출한 때가 중생대(1억4천만~1억2천만 전)이니 인류가 지구상에 탄생하기 전이며, 한반도에 70만전부터 살았으니 화산분출을 알지 못했으니 화왕은 물 기운을 다스리기 위함이리라.
재미있는 것은 인근 현풍 추량화(推良火), 창녕 비화(非火, 比自火), 영산 서화(西火), 밀양 추화(推火)등 옛 지명에 불 ‘火’가 공통으로 보인다.
그리고 창녕 동북쪽 산들 중에 성산면의 비슬산(琵瑟山)은 부처님께 음악을 공양하고, 창녕읍
의 화왕산(火旺山)은 향(香), 영산의 함박산(含璞山=芍藥(작약))은 꽃을 공양한다는 의미로 불교적 지명이라는 말이 전해 내려온다.
화왕산은 일본학자 고토분지로의 <조선산악론>의 의하면 태백산맥에 속하는 변방이지만, 조선 영조 때 여암 신경준의 <산경표>에 따르면 낙동강의 동쪽을 달리는 낙동정맥의 한줄기 비슬지맥으로 이어지고 다시 열왕지맥과 화왕지맥으로 갈라진다.
지질학적 관점에서 보면 3000m높이의 산이 공룡이 번성하던 중생대(1억4천만년~1억 2천만년) 화산분출로 2000미터가 날아가거나 함몰(陷沒)되고 오랜 풍화와 침식을 통해 오늘날의 화왕산(757m)이 만들어 졌다.
화산분출 후 정상부가 붕괴되어 함몰된 구덩이를 ‘칼데라(caldera)’라 하고, 그곳에 물이 고이면 칼데라 호(湖)라 부른다. 백두산 천지와 한라산 백록담이 칼데라 호수다.
화왕산 정상의 칼데라는 화왕산성 남문(南門)쪽이 무너져 삼지구천(三池九泉)에서 솟아난 물이 그대로 산성(山城)골로 흘러내려 칼데라 호수(湖水)가 만들어 지지 않았다. 아마 초기에 칼데라 호수로 있다가 어느 시점에 남쪽사면이 무너지면서 오늘날에 이르렀을 것으로 짐작해 본다.
뾰족한 다른 산과는 달리 정상부가 편편한 'V'자형 고위평탄면을 이루고 있다.
휴화산(休火山)으로 따뜻한 불기운이 있고, 삼지구천으로 물이 풍부했으니 고대부터 사람들이 살았을 가능성이 많다.
당나라 문인 유우석(劉禹錫)(772-842)의 누실명(陋室銘)에
山不在高 有仙則名(산불재고 유선즉명)
水不在深 有龍則靈(수불재심 유용즉령)
산은 높이에 달린 것이 아니고 신선이 살아야 이름이 나며,
물은 깊이에 달린 것이 아니고 용이 살아야 영험한 것이라네.
화왕산은 그리 높지는 않으나 정상부의 3개의 연못 근처의 용지동천(龍池洞川), 잣골의 자하동천(紫霞洞天)으로 이미 신선이 산다고 하였으니 명산(名山) 중의 명산임에 틀림없다.
화왕산성
화왕산성은 석축성으로 둘레 2.6km, 성안의 면적은 5만6천여 평이다.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 기록에 세종대왕 때에는 군창(軍倉)이 있었고, 성종때에 폐성이 되었다. 선조 29년(1596년) 임진왜란 때 창녕 의병장 성천희(成川禧)의 장계로 수축하여 정유재란에 곽재우장군과 창녕, 영산, 현풍, 밀양 4개 고을 군사와 백성들이 함께 뭉쳐 왜적을 물리쳤던 천혜의 요새였다.
화왕산은 풍수로 행주형(行舟形)으로 배가 가는 형국인데, 배가 상징하는 것은 재물, 인물을 의미한다.
재물과 인재가 떠내려가는 모양새로 이는 좋은 형국이 아니므로 배를 묶어두는 비보(裨補) 장치가 필요하다. 그 비보적 장치가 배를 묶어두는 배바위다.
배바위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내려 오는데 갈라진 바위틈으로 들어가면 일정한 넓이의 공간이 나오는데 좁다고 생각하면 좁아지고, 넓다고 생각하면 넓어지는 신비로운 곳이다.
그곳에서 세바퀴 돌고 두 손을 모아 기도하면 한 가지 소원은 꼭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 바위틈에서 나오면 몇 미터 떨어진 서쪽바위에 1950년대 영국국적의 화물기가 추락하여 승무원 전원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사고 수습 후 읍내 주민들이 비행기를 처음 보는지라 신기해서 잔해를 주워 집에 가져가 보관하기도 했다.
행주형 형국의 또 다른 배는 술정리 진양하씨고가 뒤 당산(堂山)인데, 술정리 옛 지명이 배를 매어두는 마을이라 하여 계주말(繫舟洞)했는데 이는 배가 떠내려가지 못하도록 한 지명비보(地名裨補)이다.
창녕 조씨가 성을 얻었다는 용지(龍池)에서 현존 최고 기우제 부적 목간(木簡)이 2002~2005년
발굴조사 때 출토되었다. 목간이란 글을 적은 나무 조각을 뜻하는데 9세기 통일신라시대 말기의 목간(木簡) 3점 기능은 도교에서 주문을 외울 때 사용하는 부적이라는 주장이 관심을 끌고 있다.
김재홍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의 '창녕 화왕산성 저수지 출토 목간과 기우제' 논문에 따르면, 화왕산성 못에서 나온 목간에 쓰인 '묵서(墨書)'는 요즘의 부적에 해당하는 것이다.
목간 1면의 '시(尸)'자 밑에 '구(口)'가 4개 있는 부분에 주목하고 있다. "이러한 형태는 현재의 부적과도 유사하며, 尸는 도교의 삼시(三尸)를 의미하고 口는 해나 별자리를 뜻하는 것'으로 추정했다.
근처에 용바위에서 기우제를 지냈다는 이야기를 뒷받침해주는 유물이 출토된 샘이다.
화왕산 창녕조씨득성설화는 1760년대에 만들어진 '여지도설' 창녕조와 1832년에 작성된 '경상도 읍지' 창녕조, 1895년에 작성된 '영남읍지' 창녕조 등에 기록되어 있다.
정상 3곳 용지는 득성설화를 간직한 곳이다.
득성비는 성(性)을 얻은 곳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1897년 당시 경상도 관찰사 조시영이 세웠다. 비는 자연석에 '창녕 조씨 득성지지'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신라 26대 진평왕(재위 579-631) 때 창녕 화왕산 정상의 연못에서 신라 한림학사 이광옥의 딸 예향이 피부병을 얻어 그 치유를 위해 목욕을 하다, 용의 아들과 사귀게 됐다. 그 사이에 아들을 얻게 되었는데 겨드랑이 밑에 '조(曺)'자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이에 성을 그대로 따르고 이름을 '계룡(繼龍)'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창녕 조 씨의 시조가 된 인물이다.
창녕조씨 시조 태사공(太師公) 조계룡(曺繼龍)의 묘는 경주시 안강읍 노당리에 있다. 시조 설화에 동해 용신의 아들 옥결이 시조 탄생과 연결된 특이한 예로 가야 왕손으로 창녕지역 강력한 토착세력을 진평왕이 공주와 정략결혼으로 지지를 확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후에 조계룡은 신라 진평왕의 부마(駙馬, 임금의 사위)로 삼국통일을 이룩한 김춘추와 김유신의 강력한 후원자로 알려져 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