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타분한 옛것으로만 알고있던 전통자수가 신세대 젊은 감각의 작가를 만나 세계인의 관심을 한몸에 받는 새로운 예술로 재해석 되고 있다. 전통자수에 신선한 새바람을 불어넣고 있는 운경 이경희 작가(40) 는 고전미술의 디자인을 작품에 접목시켜 '가장 한국적인' 실과 바늘로 세계인이 환호하는 '가장 세계적인' 작품을 만들고 있다.
전공과는 전혀 다른 길, 자수의 매력에 빠져
운경(雲耕) 이경희 작가가 운영하는 공방에 들어서면 벽면 가득 이 작가가 작업한 다양한 전통자수 작품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공방을 한바퀴 돌아 자수작품 감상이 끝날 쯤 벽 한켠에 걸려있는 이 작가의 학위증에 시선이 멈춘다. 대학에서 생명공학을 전공하고 서울대 약학 박사로의 삶을 걸어오던 그녀가 돌연 전통자수에 뛰어들어 제대로 된 맥을 잇겠다고 나선 이유가 궁금했다.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를 풀 곳이 필요 했어요. 그때 만난게 자수예요. 자수 틀 앞에 차분하게 앉아 한땀한땀 수를 놓고, 아름다운 색감의 실로 하나의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거치면 스트레스 해소와 함께 성취감도 느껴졌어요" 이 작가는 자수를 시작하게 된 계기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이 작가의 취미자수가 예술 작품으로 인정받는데 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워낙 손끝이 야무진 탓에 같은 도안으로 수를 놓아도 남들보다 작품 완성도가 월등히 높았다. 취미로 시작한 자수지만 완성된 작품을 공모전에 출품하면 상(賞)이 되어 돌아왔다. 자수 작가로 진로를 결정하면서 제대로 된 전통자수를 배워보고자 숙명여자대학교에 진학해 전통자수과정을 이수했다. 이곳에서 무형문화재 제 80호 자수장의 전수조교였던 스승을 만나 본격적인 자수의 길을 걷게 됐다.
처음 자수를 시작하고 2년만에 8폭짜리 병풍을 완성하면서 주목 받기 시작했다. 실력과 재능, 끈기 3박자가 제대로 갖춰진 이 작가의 솜씨는 전문가들의 눈에 띄기 시작했다. 자수활동 10년만에 다양한 초대전과 전시회의 단독으로 초청받는 작가로 성장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 전통이 담긴 작품 세계서 큰 호응
이 작가는 지난해 청와대 사랑채에서 외국인 대상 자수 강의도 두 차례나 펼쳤다. 또 한불 수교 130주년에 맞춰 지난해 전시한 자수작품은 프랑스 현지의 극찬을 받았다. 작품이 큰 관심을 모으자 프랑스 현지TV 취재진들이 이 작가 공방을 방문했다. 취재진은 며칠간 공방에 머물며 이 작가의 작품 세계를 카메라에 담아 한국의 전통자수를 알리는 다큐멘터리로 제작했다. 내년 1월에는 스웨덴 박물관 초정으로 운경 이경희 전통자수 개인전도 열릴 예정이다. 작가로서의 입지가 넓어지자 이 작가의 작품을 제품화 한 상품들도 세계 곳곳에서 러브콜을 받고 있다. 지난해 충남도와 함께 추진했던 '전통자수를 입힌 융복합 디바이스'는 지난 3월 오사카 기프트쇼에 출전해 일본현지에서 큰 관심을 모았다. 블루투스 스피커에 겉면에 자수를 입혀 윗쪽은 음향기기로 아랫쪽은 와인랙으로 구성 된 작품이다. 이 제품은 이미 오사카 현지 쇼핑몰에도 입점해 있는 상태다. 이밖에도 이 작가의 개인 SNS를 통해 중국, 영국, 미국 등 전세계 다양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도 개인적으로 제품주문을 요청 해 오기도 한다. 다양한 루트를 통해 이 작가의 작품을 접한 국.내외 에술산업 관계자들은 다양한 전시회를 열고 작품 전시를 권하고 있다.
"한국의 미(美) 오방낭, 왜곡되게 받아들여지는 게 맘에 걸려"
이 작가는 전통자수를 아끼는 만큼 전통문화를 제대로 알리는 데에도 관심이 많다. 특히 지난해 국정농단 사건 이후 핫 이슈로 떠오른 '오방낭'에 대한 왜곡 된 시선이 가장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다.
오방낭은 청,황,적,백,흑의 오색의 비단을 사용해 음양오행의 원리에 따라 만든 전통주머니로 각각의 색깔은 동서남북 중앙 다섯개 방위와 나무, 물, 금, 불, 흙 우주만물을 상징한다. 우주와 인간을 이어주는 기운으로 복을 기원하는 의미를 지녔다. 하지만 지난해 국정농단 사건 이후 '우주의 기운'이라는 말이 화제가 되면서 오방낭이 주술적 기운이 있다는 식의 부정적인 시선이 적지 않았다.
이 작가는 전시회나 박람회 등 대중에게 선보이는 행사에는 가급적 오방낭 만들어 선보이고 있다. 오방낭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이유는 전통자수를 선보이는 사람은 '전통을 제대로 알리는 일'에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는 자신만의 철학이 있기 때문이다.
"국정농단 사태가 큰 화제가 되면서 출강이나 수강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오방색, 오방낭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갖고 계신 분들이 많아요. 오방낭이 언론이나 매체를 통해서는 부정적인 뉴스로 많이 나갔으니까요. 하지만 어느곳에서는 잘못 쓰여진 부분이 있다고 해도 오방낭은 한국 고유의 아름다운 색으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우리 전통 예술작품이인 것은 틀림 없잖아요. 잘못 알려진 오해가 사실처럼 받아들여지기 전에 제대로 바로잡아 알리는 것도 전통 예술을 계승해가는 사람들이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같은 이 작가의 노력 탓인지 오방낭은 작가의 작품 중 다기보, 향낭, 복주머니 등과 함께 가장 인기좋은 작품으로 꼽힌다. 이 작가의 오방낭을 통해 제대로 된 한국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왜곡 된 시선을 거두게 되는 것은 물론이다.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전통자수의 보급에 앞장서고 싶어
이 작가는 전시회, 박람회 출강 등 눈코뜰새 없는 일정 속에서도 지난 5월 한국직업능역개발원으로부터 자격증을 발급할 수 있는 민간자격등록을 마쳤다. 자수로 공방을 운영하거나 출강을 원하는 사람 들에게 필요한 자격증이다. 이작가는 아무리 바쁘고 고단해도 전통자수의 꾸준한 맥을 이어가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시간을 얼마든지 쪼개서라도 쓸 수 있다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자격증 과정도 이 같은 이유로 준비해 왔다.
"자수가 꼭 전문가만이 하는 일은 아니예요. 누구나 배워 할 수 있는 분야거든요. 그러기 위해서는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쉬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 작가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을 늘 가슴에 새기며 바쁜 일정 속에서도 작품활동을 위해 하루일과를 마친 새벽에도 어김없이 수틀 앞에 앉는다.
"제품으로 돈을 버는 일도, 제가 만든 작품이 세계 곳곳에 전시 되는 일도 행복한 일이지만 가장 큰 목표는 전통자수의 명맥이 끊기질 않도록 노력하는 것과 그 속에서 제대로 된 한국의 전통을 알리는 일 "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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