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이경은 국제인권법 전문가, 제인 정 트렌카 진실과 화해를 위한 해외 입양인 모임 대표의 도움으로 취재, 작성되었습니다.
"나는 한국의 고아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 한국은 가난하다며 돈을 받고 나를 스웨덴에 팔았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경제사정이 좋아진 지금도 여전히 아이들을 해외에 팔고 있습니다. 한국의 정치지도자로서 이런 해외입양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1989년 야당 총재로 스웨덴을 방문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국계 입양인 레나 김 씨로부터 이런 질문을 들었다. 이 질문에 김 전 대통령은 "죄송합니다. 부끄럽습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라고 고개를 숙였다. 이날 간담회 자리는 울음바다가 됐다고 한다.
이 사건은 정치인 김대중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김 전 대통령은 임기 첫해인 1998년 10월 23일 청와대로 8개국에서 온 29명의 해외입양인들을 특별 초청했다. 이 자리에서 김 전 대통령은 "우리가 정말 잘못을 저질렀다. 과거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기도 했고 한국의 불행한 관습 때문이기도 했다"고 입양인들에게 사과했다.
김대중 정부는 1999년 친가족을 찾기 위해 모국을 방문하는 해외입양인들을 위한 지원 사업을 시작했고, 준정부적 성격의 글로벌 입양 정보 사후서비스 센터를 설립했다. 그 후 입양정보센터, 중앙입양정보원(2009년 7월)을 거쳐, 현재 보건복지부 산하의 중앙입양원(2012년 8월)으로 자리 잡았다. 김대중 정부는 또 1999년 입양인들에게 해외동포라는 법적 지위를 부여했다. 그 결과 이들은 2년까지 한국에 체류할 수 있는 비자가 허용되고, 취업, 투자, 부동산 취득, 의료보험 취득, 연금 취득이 가능하게 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난 2009년 8월 서거했을 때 입양인들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추도사(바로 보기)를 따로 내기도 했다.
이처럼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계 해외입양인들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국가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사과했던 김대중 정부도 입양정책에 있어 근본적인 변화를 만들지 못했다. 1997년 IMF 경제위기로 해외입양에 대한 규제를 풀어 해외입양 아동 숫자는 오히려 증가했다. 또 김대중 정부는 매년 국가예산을 들여 입양인 초청행사를 가졌는데, 애초 의도와 달리 '성공한 입양인'의 존재만 부각시키는 문제를 낳았다. 한국의 허술한 입양 관련 법과 제도 때문에 양부모의 나라로 보내져서 입양이 되지 못해 국적을 취득하지 못하거나, 학대, 방임, 극단적인 경우 살해까지 당하는 어려움에 처한 입양인들의 문제는 오히려 정책 시야에서 벗어나게 만들었다.
2기 민주정부인 노무현 정부에서도 입양정책에 큰 변화가 없었다. 노무현 정부 들어 2004년 국내입양 가정에 양육수당(당시 월 10만 원, 현재 월 15만 원)을 보조하는 정책이 도입됐다. 또 2005년 '입양의 날(5월 11일)'이 제정되고, 국내입양 가정에 입양수수료(당시 200만 원, 현재 270만 원)를 보조해주는 정책도 도입됐다. 김근태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은 2004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한인입양인대회'에 참석해 "여러분을 사랑한다.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겪어야만했을 아픔과 고통, 상처를 알고 있기에 그냥 사랑한다고 말 못하지만 그래도 사랑한다고 말해야만 하겠다"고 말하며, 다시 한번 정부 차원에서 입양인들에게 사과했다. 김근태 장관은 이어 2005년 국정감사에서 "향후 4-5년 내에 해외입양이 완전히 중단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앞서 박정희 정권, 노태우 정권에서 '해외입양 중단 계획'을 밝혔던 것과 마찬가지로 '선언'에 그치고 말았다.
노무현 정부가 다시 끄집어낸 '쿼터제'
1990년부터 노무현 정부 중반기인 2005년까지 16년간 해외입양 아동 숫자는 2000명 선에서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러자 노무현 정부에서는 해외입양을 줄인다며 과거 권위주의 정부에서 시행한 정책을 다시 꺼내들었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 시절인 2007년 국내입양 우선제(5개월 동안 국내입양을 우선적으로 추진한 뒤 이에 실패할 경우 해외입양을 추진하도록 함)와 쿼터제(해외입양 아동 숫자를 줄이기 위해 입양기관들에 국내입양 추진 실적에 따라 해외입양 아동 숫자를 배분함)를 도입했다.
'쿼터제'는 박정희 정권 이후 정부가 해외입양을 근절하겠다고 발표할 때마다 등장하는 정책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1976년 북한이 '남한은 고아를 수출한다'는 비난하자 '요보호 아동에 대한 입양 및 가정위탁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쿼터제'를 도입했다. 1975년 당시 5000여 명이던 해외입양 아동 숫자를 국내입양 500명, 가정위탁 500명씩 증가시켜, 매년 1000명씩 줄이겠다는 '단순무식'한 계획이었다. 당연히 실패할 수밖에 없는 정책이었다.
쿼터제는 노태우 정부, 김영삼 정부 때도 반복된 정책이다. 입양은 아동이 출생 가정에서 분리돼 다른 가정으로 이동하는 과정이다. 마치 상품이 왔다 갔다 하는 일처럼 '숫자'로만 접근하는 정책은 그 자체로 반인권적인 발상이며, 성공하기도 어렵다. 안타깝게 노무현 정부도 입양이 발생하는 사회적 조건이나 배경에 대해 고려하지 않고, 국내입양을 늘려 국제입양을 줄이겠다는 안이한 접근을 했던 셈이다.
이경은 박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입양인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지난 세월 정부가 사적인 입양기관에 취약한 미혼모들과 그 자녀들을 내맡겨온 정책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선한 의도와 달리 한국 해외입양 정책은 오히려 더 왜곡되고 말았다"고 지적했다.
이 박사는 "쿼터제는 보건복지부의 국외입양 아동 수 규제 정책의 골간을 이루는 정책 수단이었다"며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쿼터제는 관료집단에 의해 정권의 의지로 받아들여졌고 더 굳건해졌다"고 비판했다.
이 박사는 "국외입양 문제는 보건복지부라는 한 부처를 넘어 민법과 아동보호체계 전반을 변혁해야 하는 과제"라며 "가정과 국가의 양육 지원, 부적절한 친권에 대한 국가의 개입, 아동보호체계의 정비와 같이 오랫동안 미뤄왔던 법제 정비를 해야 비로소 해결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냉온탕' 오간 국내입양 촉진 정책...아동 노동 착취 부작용도
박정희 정부 이후 해외입양 정책은 '냉온탕'을 왔다갔다 했다. 아동보호 비용을 아끼기 위해 해외입양을 보내는 것이 기본 정책 방향이었다가, 북한이나 서구에서 '고아 수출'이란 정치적 비난이 쏟아지면 쿼터제 등을 동원해 일시적으로 입양 아동 숫자를 줄이는 방식이 되풀이 됐다. 어느 정부도 입양이 왜 일어나는지, 입양이 친생부모와 그 아동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일인지 질문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국내입양을 늘리겠다며 도입한 정책에서 아동 인권에 대한 배려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박정희 정부 때 1962년 국내입양을 늘리겠다며 '고아 한 사람씩 맡아 기르기 운동'을 벌였던 일이 대표적인 사례다.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 입양이나 위탁을 보냈는데, 이런 '강제 결연'은 입양된 어린이의 일부가 다시 시설에 수용되거나 버려져서 부랑아가 되는 일로 귀결됐다. 또 맡겨진 아동이 가사노동자나 단순 노동자로 노동착취를 당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우리나라 입양제도 개선에 관한 연구>, 한국보건사회연구원, 1999 참고)
또 쿼터제나 직접적인 양육비 지원 이외의 국내입양 활성화 정책은 입양기관들이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정부가 입양아동의 '이주허가서'를 발급하는 것 이외 모든 입양과정을 입양기관들에게 맡겨놓은 상태에서 관련 정책을 강제할 행정적 수단이 없었고, 무엇보다 의지도 없었다. 2008년 복지부의 입양기관들에 대한 감사 결과를 보면, "홀트아동복지회는 입양대상 아동에 대해 국내입양 우선추진 기간 중 국내입양은 시도하지도 않고 국외입양을 추진하고, 국외에 입양된 아동의 국내입양 추진 기록을 유지 하지 않고 있다"며 "홀트아동복지회의 경우, 2007년 12월 및 2008년 4월부터 6월까지의 기간 중에 국외에 입양된 153명 중 139명(90.8%)은 국내입양 우선추진기간 중에 국내입양 추진기록도 유지하지 아니하고 국외입양을 위한 성.본 창설을 신청했다"고 위반 사실을 지적했다.
이같은 행태는 2013년 있었던 홀트아동복지회에 대한 특별감사에서도 지적됐다. 홀트는 당시 입양특례법 개정안이 실시된 2012년 8월 5일 이후 출생한 아동 115명 가운데 17명(14.8%)에 대해 국내 양부모를 찾아보지도 않고 해외입양을 추진한 것이 감사 결과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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