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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박종필 감독을 잃어버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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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우리는 왜 박종필 감독을 잃어버렸나?

[ACT!] 특별기획 '박종필을 기억하며'

박종필 감독은 장애인과 홈리스 인권을 위해 싸워온 활동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20년 간 독립 다큐멘터리 제작과 미디어운동을 함께 한 친구이자, 선배이자, 후배였습니다. 갑작스러운 부고 소식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먹먹하게 만들었으며, 함께 한 시간의 무게만큼이나 박종필 감독의 빈 자리는 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현장을 기록하고 공유하는 많은 제작자와 미디어 활동가들의 이야기는 잘 드러나기 어려우며, 다른 한편으로는 무거운 마음 때문에 쉽게 말하기 어렵기도 합니다.

ACT!는 박종필 감독을 “종필아, 종필이형, 종필 선배” 혹은 그냥 “박종필”로 불렀던 미디어 활동가들의 이야기를 담고자 했습니다. 소소한 고집들, 카메라와 같은 장비에 대한 애정, 밥숟가락을 뜨면서 나눈 시시한 이야기라도 형식에 관계없이 자유롭게 풀어냈습니다. 가 보다 편하게 함께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나누는 매개가 될 수 있길 바랍니다.

또한 박종필 감독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현재 느끼고 있는 문제의식이나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활동, 바뀌어야 할 지점들을 모았습니다. 과거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다음’을 위해 지금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아주 사소하더라도 남겨두기로 했습니다.

박종필 감독의 삶의 조각을 맞추는 과정을 통해 미디어운동 진영의 현재를 짚어보고 앞으로 필요한 일들에 대해 고민하는 출발선이 되길 기대합니다. 그리고 그 고민들을 풀어가며, 박종필을 기억하며, 언제나 함께 걸을 수 있길 기대합니다. ACT! 편집위원회.

살다보니 많은 동지를 떠나보냈다. 공장의 기계 앞에서, 병원비 때문에 치료를 미뤄서, 활동보조인이 없어서, 삶의 무게에 짓눌려서 그리고 또 어떤 이유들로 그들은 부서져갔다. 그때마다 나는 묻고 물었다. 우리가 만들자던 세상은 저 만큼 있는데, 왜 그렇게 떠나야 했는지. 이 사회 최소한의 안전망을 비난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더 많은 시간 나를 미워해야 했다.

구분되지 않는 몸과 카메라

박종필 감독은 사상적으로 선배가 별로 없다고 말하곤 했다.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게 영상을 하면서였기 때문이라고 했고, 그래서 자신은 부족하고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달뜬 표정으로 장애가 있거나 홈리스인 동료 활동가들의 삶이 자신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말하거나, 그 삶을 카메라로 함께 살게 되면서 얼마나 많은 과거를 반성하게 됐는지 고백하기도 했다.

그러니 박종필 감독의 카메라와 인물 사이에 거리가 없는 건 노력의 산물이 아니다. 그는 카메라를 들고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간 게 아니라, 그들을 자신 삶 속으로 들여왔기 때문이다. 그들을 통한 삶의 변화가 카메라와 인물 사이의 거리를 자신도 모르게 지워버렸을 것이다. 장애가 있거나 홈리스인 동료들이 그의 카메라를 박종필처럼 여겼던 건 행복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통증과 질병을 겪는 몸을 기계인 카메라와 구분하지 않았던 건 비극이었다.

여러 활동가들이 그렇듯 그 또한 당위와 책임이 중요했으니, 너무 피곤해서 곧 죽을 것 같아도 필요한 현장이 있으면 그곳의 카메라가 되었다. 몸에서 휴식이 필요하다고 잠을 쏟아냈지만, 담배로 잠을 밀어내며 겨우 편집을 마치고 영상이 필요하다는 '광장'으로 기어이 편집본을 보냈다. 그리고 이제 정말 쉬어야 하는 순간에, 이런 저런 단체에서 도움을 청하는 연락이 오면 다시 그곳으로 달려갔다. 우리는 그렇게 사는 삶이 카메라의 책무, 변화에 대한 열정, 운동에 대한 헌신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알려졌다시피 그는 몇 년 전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다. 정기검진을 해야 했고, 피곤하지 않게 몸을 돌봐야했다. 그러나 현장을 향한 전력투구 앞에서 건강은 자주 뒷전으로 밀렸다. 그는 이십 년 가까이 최선을 다해 훌륭한 영상 활동가로 살았다. 그리고 겨우 마흔아홉 살에 삶이 끊어졌다.

▲ 다큐인 사무실의 박종필 감독 책상. 그를 기억하게 해주는 물건들

최선에 갇힌 삶

박종필 감독이 떠난 뒤, 슬픔을 가누기 힘들었을 다큐인 동료 송윤혁 감독. 하지만 그는 슬퍼할 시간조차 여의치 않았다. 박종필 감독의 운명 직후, 윤혁은 간병하느라 야윈 몸으로 사시나무처럼 떨면서 오열했다. 나는 윤혁이 쓰러지지 않게 단단히 어깨를 잡아 주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리고 10여 분도 채 되지 않아 간호사는 수시(收屍)를 위해 윤혁을 불렀고, 그는 울음을 잘라내고 급히 알콜솜을 손에 쥐었다. 복도엔 그가 놓고 간 휴대폰이 있었고, 그 삼십여 분간 휴대폰은 쉼 없이 울려댔다. 장례 준비를 위한 실무부터 부고 공지를 위해 빈소와 발인을 묻는 일까지, 모두 반드시 필요한 연락들이었다.

장례식장에서도 고인이 가장 원했을 방식으로 열심히 추모하기 위해 좀 더 많은 소통과 결정을 해야 했고, 많은 곳에 윤혁이 필요했다. 물론 장례식 이후에도 여전히 남은 사안을 위해 장례위 회의가 필요했고, 49재에 맞춘 추모영화제 회의, 미디어활동가 건강권회의 그 외에도 그의 죽음 이후 정리해야 하는 실무적인 것과 그의 정신을 잘 기리기 위한 무엇이 빼곡히 기다리고 있었다. 윤혁은 무엇하나 최선을 다하지 못할까봐 조바심을 냈다.

박종필 감독의 투병기간 동안 옆을 지켰던 윤혁은 그 한 달여 사이 체중이 7킬로가 빠졌다. 나는 장례식 이후 일주일에 한 번씩, 그의 몸무게가 얼마나 늘었는지 확인했다. 한 달이 지난 지금 1킬로가 늘었다. 그는 최선을 다해 일상을 살고 있지만, 임신 중인 아내를 위해 사소한 것을 챙겨줄 시간도 여의치 않다. 그리고 박종필 감독이 너무나 공을 들였던, 그리고 그의 투병 기간 동안 중단됐던 용산 홈리스 텐트촌 촬영 작업도 며칠 전 다시 시작 했다. 홈리스 '형들'과 텐트에서 먹고 자는 일상을 살다보면, 윤혁의 건강은 지금보다 더 나빠질 것이다.

물론 윤혁 뿐 아니다. 박종필 감독과 목포신항에서 세월호 선체기록을 함께 했던 부성필 감독. 그는 목포에서 한 달만에 5일의 휴가를 받아 서울로 올라오던 중에야 투병 소식을 들었다. 박종필 감독은 촬영에 방해가 된다고 성필에게 알리지 못하게 했고, 운명하기 몇 분 전 마지막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성필은 장례식 4박5일 동안 빈소 앞에서 헌화를 돕는 역할 등을 했고, 밤에도 쪽잠을 자며 빈소를 지켰다. 그리고 마석 모란공원에 그를 묻고 와서 상복 등의 정리를 마친 저녁, 충혈된 눈으로 다음날 목포에 다시 내려간다고 했다.

성필은 정기 휴가 5일 내내, 거의 잠을 못자고 장례를 치렀는데, 곧바로 내려가서 다시 촬영을 해야 했다. 나는 며칠 잠이라도 푹 자고 내려가라고 했지만, 그는 촬영할 사람이 없다며 그나마 많은 분들의 배려로 다음날 내려갈 수 있는 거라고 했다. 성필이 고혈압이 있다고 들은 터라, 병원에도 가고 좀 쉬는 게 좋지 않겠냐고 거듭 말했지만, 그는 병원 갈 시간이 없을 것 같다고 답했다.

절박하게 내가 미웠다

다들 최선을 다하고 싶고, 책임을 다하고 싶은 것뿐이다. 그게 열정이고 헌신이며 정의로운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선, 책임, 헌신, 정의 안에서 박종필 감독은 부서져갔다. 그를 떠나보낸 지 한 달, 절실하게 물었다. 우리는 왜 박종필 감독을 잃어야 했나? 이토록 노력해야 아주 조금 변화하는 야만적 사회에 분노해 보고, 운동사회 문화를 비판해 보고, 병원을 잘 가지 않던 그의 태도를 원망해 봤다. 하지만 나는 박종필 감독의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확인해야 했다.

우리는 활동가로서 운동에 대한 많은 걸 공유하고 토론했다. 이를테면, 몇 해 전 EBS국제다큐영화제(EIDF) 보이콧 운동(*2014년 EBS국제다큐영화제(EIDF)는 이스라엘 대사관 후원으로 이스라엘 다큐멘터리 컬렉션을 기획한바 있다. 당시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침공한 지 한 달 만에, 2000여 명이 살해되고 1만여 명의 부상자가 생긴 직후였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점령한 뒤 국제적으로 각종 문화·학술 행사를 유치하고 참여하며, 체계적으로 국가 브랜드를 세탁해왔다. 이에 팔레스타인평화연대는 이스라엘대사관 후원과 이스라엘 다큐멘터리 컬렉션 철회를 요구하며 보이콧을 진행했고, 수많은 영화인들이 공동성명으로 연대했다.)이 있었는데, 나는 팔레스타인 관련 활동가이기도 해서, 그 보이콧 운동을 책임지고 조직했었다. 10일 남짓한 긴박한 일정 속에서 영상 활동가나 감독들에게 전화를 하고, 성명서를 쓰고, 전략 회의를 정신없이 해야 했다. 그러고 나니, 10일 남짓 기간 동안 4킬로그램의 살이 빠져나갔고 링거를 맞아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 투쟁을 승리한 것에 안도감을 느꼈고, 팔레스타인에 대한 부채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을 것 같아서 위안을 얻었다. 그리고 박종필 감독에게 그 일련의 과정을 설명하며, 이번 투쟁 결과가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에서 얼마나 중요한지에 이야기했다.

그러나 박종필 감독은 건강이 좋지 않은 내가 무리 한 것을 안타까워하며, 크게 핀잔을 줬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박종필 감독은 속으로 다짐했을 것이다. 자신은 더 열심히 열정적으로 활동해야 한다고. 우리는 그런 식이었다. 오랫동안 전근대적인 활동가 상을 버리지 못한 체, 훌륭한 활동가의 치열한 삶에 대해 서로에게 말하곤 했다. 지난 한 달, 그 모든 내가 미웠다. 절박하게 미웠다.

▲ 그는 이십년 가까이 최선을 다해 훌륭한 영상 활동가로 살았다

우리는 우리뿐이다

이런 표현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도 있겠지만, '자신 몸은 혁명의 도구, 건강관리는 활동가의 우선 덕목' 이라는 조직 강령이 흔하던 옛 시절이 있었다. 나는 긴 세월 만에 그 말을 다시 떠올렸다. 사실 건강은 경제적 시간적 빈곤과 일치하므로, 활동가들은 건강하기 어려운 구조에 놓여 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점에서 건강을 지켜내는 게, 활동가에게 중요한 덕목 일 수밖에 없기도 하다.

하지만 많은 활동가들은 잘 때 안자고, 먹을 때 안 먹고 몸이 부서져라 일하는 것에 대해 헌신적이라는 칭찬을 한다. 아니 심지어 당연시 할 때도 있다. 혹은 그 모든 것 이전에 스스로 그렇게 해야 최선을 다했다는 만족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 정말, 그만둬야 한다! 그 문화를 끝내지 않으면, 더 많은 활동가들의 생이 일찍 끝나게 된다. 그 문화가 지속되면 생이 일찍 끝나버린 동료 활동가에 대한 미안함을 안고, 우린 다시 '죽도록' 일할 것이다. 훌륭한 활동가의 상은 변화해야 한다. 자기돌봄을 잘 하는 활동가가 훌륭한 것이고, 그런 활동가가 우리 모두의 '건강과 안전'을 지켜내는 소중한 활동가다.

자신을 돌보지 않고 일에만 집중하는 활동가에게, 우리 활동의 속도와 태도를 광폭하게 만들고 있다고 따뜻하게 비판해 보면 안 될까? 헌신을 당연시 하는 이들에게, 우리의 '열정'을 '독'으로 만들지 말고, 변화를 일궈내 보자고 단호하게 말해 볼 수 없을까? 우리는 돈도 명예도 아무것도 없고, 우리가 있을 뿐이다. 빠르게 나빠지는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활동가들은 더 빠르게 많은 일을 요구 받지만, 그럴수록 우리가 서로의 브레이크가 되어야 한다. 삶에서 굴러 떨어지지 않도록 서로의 안전망이 되어야 한다.

나는 '다큐인'에서만 김주영에 이어 박종필까지 두 명의 동지를 떠나보냈다. 무슨 이유로든 단 한 명도 더 떠나보낼 수 없다. 제발,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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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액트는 시민들의 후원과 참여로 운영되는, 국내 최초로 설립된 공공 영상미디어센터입니다. <프레시안>에 미디어운동 연구 저널 ACT!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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