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는 국무총리와 3명의 장관 후보자를 낙마시켰고, 늘 각종 정치권 이슈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가 입을 열면 정부여당이 부인하고, 그의 입을 비난하는 일이 반복됐다. 게다가 박지원 원내대표는 각종 논란에서 한 번도 지지 않았다.
성역이 없다는 듯 종횡무진하는 그의 행보에, 여당에서는 "대기업에서 1억 원씩 받고 휠체어 타고 다니던 때가 언제인데…"(원희룡 한나라당 사무총장)라는 인신공격성 발언까지 나올 정도였다.
사업가 출신답게 협상에도 달인이었다. 18대 국회 전반기 여야가 정면으로 격돌했던 미디어법 못지 않게 뜨거운 이슈였던 세종시 수정안을 놓고 그는 여당과의 물리적 충돌 대신 표 대결을 선택해 승리의 결과를 이끌어 냈다. 지난 6월말 집회및시위에관한벌률(집시법) 대치 당시 박 원내대표가 김무성 한나라당 원내대표에게 전화 한 통을 해 행안위 대치가 풀린 사례는 유명하다.
그런 그가 최근 삐걱거리고 있다. 중국 시진핑 국가부주석의 "훼방꾼" 발언을 공개했다가 중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이를 부인하는 '수모'를 겪었다. 여당은 물론이고 보수단체들은 "원내대표직을 내놓으라"고 압박했다.
그의 대여(對與) 협상력도 상처가 났다. 기업형슈퍼마켓(SSM) 규제를 위한 두 법률의 분리처리를 여당과 약속했다가, 당 안팎의 반발로 이를 뒤집었다.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은 명분이었을 뿐이다. SSM 관련법의 중요성에 대한 '지략가'의 판단 실수였다.
사업가 출신의 '협상의 달인', "여의도 정치가 복원됐다"는 극찬까지…
▲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가 휘청인다. ⓒ연합뉴스 |
무엇보다 그는 거의 유일하게 여당과의 거래가 가능한 인물이었다.
그의 협상 파트터인 김무성 원내대표와는 아침 저녁으로 전화해도 거릴낄 것 없이 친한 사이로 알려져 있다. 오랫동안 한국 정치를 장악했던 DJ(김대중)와 YS(김영삼), 두 전직 대통령에게 각각 정치를 배운 것도 똑같다.
박 원내대표는 김대중 정부 시절 대통령 비서실장 등을 지내며 국정 경험이 풍부한 정치인이다. 어차피 정치란 '주고 받아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정치인인 것이다. 사업가라는 그의 태생도 다른 정치인보다 거래에 대한 거부감을 적게 가질 수 있는 배경이었다.
때문에 그는 정책적 현안에서는 적당한 타협을 통해 말 그대로 '거래'를 했다. 정부가 원했던 세종시 수정안의 본회의 표결을 받아들여주는 대신, 스폰서 검사 특검법을 얻어냈다. 집시법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6월 말부터 한나라당은 여러 차례 집시법 통과를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박지원 원내대표는 김무성 원내대표와의 '직거래'로 매번 상황을 종료시켰다.
박 원내대표의 이런 활약을 놓고 "여의도에 '정치'가 복원됐다"는 평이 나온 이유였다.
정보력 바탕한 '말의 정치'로 정국 주도권 장악
'말의 정치'로 여당 내부를 교란시키면서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는 데도 그는 탁월했다. 박지원 원내대표가 입을 열면, 정부 여당이 이를 부인하는 정국이 한동안 이어졌다. 이명박 대통령의 계획에 없던 러시아 방문을 놓고 "러시아의 천안함 조사보고서가 우리 정부와 차이가 있다"는 그레그 전 주한 미국대사의 발언을 연결시킨 것도 그랬다.
김태호 국무총리 후보자의 낙마 이후 "정부여당이 도덕성 검증 청문회는 비공개로 하자고 한다"고 공개했던 것도 마찬가지였다. 이 발언 이후 그는 "제1야당 원내대표를 맡고 계시는 분의 거짓말이 지나치다고 생각한다"(김희정 청와대 대변인)는 거친 공격까지 받았다.
또 그는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불법 사찰 의혹에 대해서도 광범위한 정보력을 바탕으로 연일 새로운 주장을 내놓았다. "여권 내에서도 사찰 관련 제보가 이어지고 있다"는 말로 민간인 사찰에 대한 여권의 대오을 무너뜨리기도 했다.
협상을 할 때는 철저하게 '주고 받는' 방식으로 임하고, 대정부 공세는 물론이고 때로 여당 내부까지 교란시키는 그의 활약으로 여당 내에선 "너무 박지원에게 끌려 다닌다"는 지적까지 나왔다.
이전과는 달랐던 '시진핑의 훼방꾼' 논란
그러나 그의 좋게 말하면 전략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정략적인 '투 트랙' 전술이 이번에는 통하지 않았다.
먼저 지난 19일 시진핑 국가부주석의 "이명박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의 훼방꾼" 발언을 공개한 것은 21일 중국 정부가 예상치 못하게 빠르게 '부인'하고 나서면서 박 원내대표의 '넉 다운'으로 끝났다.
그동안 나왔던 '비공개 청문회', '사찰 관련 여권 내부의 제보' 등의 발언은 청와대와 여당이 부인하더라도 계속되는 논란 속에 '그들'의 상처가 더 컸다. 박 원내대표는 시진핑 국가부주석의 발언 역시 이같은 양상으로 전개되리라 예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번에는 중국 정부가 태클을 걸었다. 비록 문제의 발언이 나온 자리에 배석하고 있었던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평양에서 우리 말을 배운 중국인 통역의 문제로 보인다"고 박 원내대표를 거들었지만, 이미 치명적인 상처가 난 뒤였다.
SSM법 여야 합의 먼저 깬 민주당, 김종훈은 명분이었을 뿐이다
대·중소기업 상생협력촉진법(상생법)과 유통산업발전법(유통법)의 처리 방식에 대한 여야 합의도 마찬가지였다. 동시처리가 당론이었던 민주당이 한나라당과 '분리처리'를 합의한 것은 민주당의 말대로 "현실적인 선택을 위한 차선"이었다. 최선은 아니지만 "한 달에 50~70개의 SSM이 새로 생겨 골목 상권을 위협하고 있는 상황에서 동시처리만 고집하는 것이 오히려 무책임하다"는 판단이었던 셈이다.
민주당은 합의 나흘 만인 25일 이 약속을 파기했다. 상생법 통과에 부정적인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의 발언이 표면적 핑계였다. 유통법만 통과시키고 상생법은 통과가 무산될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됐다는 것이다. 민주당은 "상생법 처리에 대한 정부 여당의 확실한 약속의 의지가 있어야 한다"고 버티고 있다.
김종훈 본부장이 최소한의 명분을 줬지만, 합의를 스스로 파기한 박 원내대표의 협상력과 신뢰도는 추락했다. 특히 이번 약속 파기의 이면에는 당 안팎의 비판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 그렇다. 당장 정동영 최고위원은 "두 법의 동시처리가 민주당의 정체성"이라는 말로 분리처리를 선택한 박 원내대표를 정면 공격했다. 민주노동당을 비롯해 외부 단체들이 "역시 민주당은 못 믿겠다"며 들고 일어난 것도 박 원내대표에게는 회복기가 오래 걸리는 상처다.
박지원 원내대표는 26일 원내대책회의에서 "SSM법, 사랑을 따르자니 스승이 울고, 스승을 따르자니 사랑이 운다"는 말로 최근의 곤란한 상황을 토로했다.
그의 이런 시련은 우연이라기에는 절묘하게도 민주당 새 지도부가 들어선 뒤 계속되고 있다. 정세균 체제와 손학규 체제의 과도기에 최고 권력을 누리면서 '다음 대선에서의 킹 메이커가 되려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들었던 박지원 원내대표의 가을이, 때 이르게 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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