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현장을 기록하고 공유하는 많은 제작자와 미디어 활동가들의 이야기는 잘 드러나기 어려우며, 다른 한편으로는 무거운 마음 때문에 쉽게 말하기 어렵기도 합니다.
또한 박종필 감독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현재 느끼고 있는 문제의식이나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활동, 바뀌어야 할 지점들을 모았습니다. 과거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다음’을 위해 지금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아주 사소하더라도 남겨두기로 했습니다.
박종필 감독의 삶의 조각을 맞추는 과정을 통해 미디어운동 진영의 현재를 짚어보고 앞으로 필요한 일들에 대해 고민하는 출발선이 되길 기대합니다. 그리고 그 고민들을 풀어가며, 박종필을 기억하며, 언제나 함께 걸을 수 있길 기대합니다. ACT!
박종필 감독의 갑작스러운 투병 소식을 접하자마자 가까운 지인에게 연락이 왔다. 너무 억울하고 속상하다고, 그동안 고인이 너무나 고된 현장에서 굵고 힘든 작업을 해왔다며, 개인을 너무 돌보지 못했기 때문이라 했다. 울먹이며 나에게 스트레스 받지 말고, 몸 돌보며 적당히 일하라고 당부했다. 마음의 빚을 진 며칠이 경황 없이 지나고, 장례식장에서 일손을 겨우 거들며 박종필 감독을 떠나보냈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였던가 되짚어 본다. 지난 해 영화제가 한창 준비 중인 가운데 독립영화 시국선언 피켓을 만든다고 한 무리의 활동가들과 사무실을 찾았다. 야근 중에 회의실을 들락거리며 행사가 종료된 영화제 포스터를 콜라주하는 그에게 시답잖은 농담과 타박을 건넸다. 피켓을 참으로 정성껏 천천히 만들더라. 촛불집회가 절정이던 올해 초, 광화문 광장에서 카메라를 든 그를 우연히 만났다. 얼굴이 좋지 않아 보여, 건강 챙기라는 형식적인 안부를 남겼다. 영화를 통해 거의 20년의 세월을 지내왔건만, 정작 개인적 친분은 깊지 않다. 떠나보내고 나니, 그와 더 가깝게 지내지 못했던 것이 애석하다.
1990년대 후반 모두 젊고 열성적이었다. 한국영화의 지형도가 새롭게 재편되며, 다양한 문화적 열망이 분출되었다. 독립영화의 제작이 늘어났고, 여러 영화제가 생겨났다. 영화의 축제인 영화제에서 다큐멘터리는 독립영화의 시대정신을 대표했다. 바로 지금 우리가 껴안고 있는 모순이 현장을 누비는 활동가들의 카메라에 실려 왔다. 영화들이 세상에 나아가 울림을 만들었고 관객의 삶의 좌표가 되었다. 박종필의 카메라는 가장 소외받고 가난한 이들을 향했다. 작품이 영화제를 통해 상영되고 수상하며 감독의 인지도와 더불어, 카메라가 머물렀던 현장의 실상 또한 뜨겁게 되살아났다.
1998년
1999년 <끝없는 싸움 - 에바다>는 1996년부터 시작된 에바다복지회 장애인시설 비리 문제를 집요하게 기록하였다. 어린 농아원의 학생들이 시작한 싸움은 뿌리 깊게 내려앉은 인권유린의 현장을 고발하였다. 이 작품은 외롭고 소외된 싸움에 연대의 힘을 불어 넣었다. 싸움의 주체였던 청각장애인들의 보금자리 '해아래집'은 2000년 한국독립단편영화제(현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집행위원회 특별상(연대와 인권상)을 수상한다.
2002년 <장애인 이동권 투쟁 보고서 - 버스를 타자!>와 2004년 <노들바람>은 2001년 오이도역 장애인 추락 참사를 계기로 본격화 된 이동권 투쟁의 기록이며, 투쟁을 이끌었던 '노들야학' 학생과 교사들의 치열한 일상을 가감 없이 담고 있는 작품이다. 지하철 선로에서 눕고, 목에 쇠사슬을 매고, 농성현장에서 경찰에 매 맞는 중증장애인들 곁에서 박종필의 카메라는 놀랍도록 우직했다. 분노를 억누르는 것은 또 하나의 작가적 고민이었을 것이다. 카메라를 든 자의 본분을 잃지 않았던 그로 의해, 장애인들의 역사적 투쟁은 영원히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영화는 험한 세상에 흩어지지 않는 말이 되어 곳곳으로 전달되었다. 이 작품 이후에도 박종필은 할 수 있는 한 장애인 관련 작품은 계속 이어나간다. 빈곤과 장애는 그의 삶의 영원한 화두였다. 홈리스 배움터 교사로, 장애인인권영화제로 집행위원으로 더 일상적으로 혹은 더 영화적으로 그가 할 수 있는 것들을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이들에게 내어 주려 했다.
그의 마지막 불꽃은 촛불과 세월호와 함께 했다. 2015년부터 4·16연대 미디어위원회와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 미디어팀에서 활동하며, 수많은 영상으로 시민을 만났다. 더불어 <4·16 프로젝트 망각과 기억> 중 <인양>과 <잠수사>를 연출하였다. 동거차도에 머물며 세월호를 기다리는 유가족의 활동을 담은 <인양>, 희생자를 수습했던 고 김관홍 잠수사는 앞선 작품에서도 등장한다. 세월호 현장에서 의인이었지만, 그로 인해 몸과 마음이 황폐해졌고 개인의 삶 또한 무너졌다. 고인과 가까웠던 박종필은 김관홍씨의 죽음 이후 특별히 괴로워했다고 한다. 김관홍 잠수사에 대한 각계의 기억과 더불어, 반복되는 피해와 희생 앞에 무능한 국가권력을 폭로하는 <잠수사>는 그의 유작이 되었다. 목포 신항의 세월호 선체작업 기록이 그의 마지막 현장이자, 영상활동가로서의 작업이 되었다. 죽음의 기운을 실은, 숱한 원통을 지켜봐야 했던 거대한 배의 기록을 사명으로 안고, 아픈 몸을 잊은 채 카메라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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