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식한 자가 용감하다고 했던가! 지나고 보니 한 여름밤 한바탕 꿈을 꾼 듯하다. 왜 이렇게 힘든 여행을 시도했는지 잘 모르겠다. 어떤 절박감이 우리를 이토록 불확실하고 험난한 길 위에 서게 한 걸까. 여행이라는 게 어려움을 극복하는 즐거움도 있다지만 이처럼 높은 파고가 시시각각 밀려오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돌아와 보니 지난 석 달이 3년은 넘은 것 같이 느껴졌다. 시작은 그저 호기심 부푼 청춘이었으리라.
여행은 떠나기 전에 계획을 세울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했던가. 여행 내내 자전거가 고장을 일으켰고, 심한 몸살로 도중에 포기할 뻔도 했다. 소진되어 가는 체력은 중국인들의 따뜻한 인정으로 충전되었고, 어쭙잖은 중국어 능력은 손짓 발짓과 눈치로 얼버무렸다.
시안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너무 더운데다가 상가 확성기 소리에, 차량 경적 소리에, 이상한 향기에, 역주행 차량에 놀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중국 우이현 공안국에서 외국인은 투숙할 수 없다며 한밤중에 다른 도시로 추방 명령이 내려졌던 그날 이후부터는 매일 저녁이면 전전긍긍했다. 며칠을 달려도 끝이 안 보이는 황하 유역을 달리며 대형 트럭에서 휘날리는 석탄가루로 하루 종일 눈이 따갑기도 했었다.
만나는 중국인들의 몰골은 가난과 고생으로 찌든 모습이 역력해 보였지만, 눈빛은 반짝였고 발걸음은 바빴다. 들르는 도시마다 사방으로 뻥뻥 뚫린 대로는 비행기가 뜨고 내려도 충분할 정도였다. 곳곳에 아파트가 치솟고, 꼬리를 무는 대형 화물 차량들은 경제 발전의 물결을 가늠할 수 있게 했다.
일본에서의 첫 만남, 이케다 상의 깜짝 대접도 잊을 수가 없다. 하필 태풍 부는 날 하코네산을 넘느라 죽을 고생을 했었다. 어딜 가나 청결한 위생 관리, 잘 정리된 생활 주변과 교통질서가 돋보였지만, 오카야마로 가는 길에 있었던 뺑소니 사고는 아직도 의문스럽다. 왜 우리를 해코지하려 했는지, 넘어져 낭떠러지에 매달린 우리를 왜 내버려 두고 도주했는지 알고 싶어 경찰에 신고했는데 끝내 연락이 없어 서운했다.
그러나 빈틈없는 매뉴얼과 규정, 기본에 충실한 습관, 사소한 일에도 목숨 걸고 최선을 다하는 자세, 그리고 전통을 중시하는 사회 풍토는 일본의 선진 모습이리라.
흔히 일본인들을 ‘겉과 속이 다르다’고 한다. 누구나 처음 대할 땐 아주 상냥하고 공손하게 대하는데 이것이 겉이라면 겉이다. 이건 사회 풍토와 교육의 모습이라고 볼 수도 있어 굳이 나쁘다고 평가할 건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본질에 들어가서는 안면 바꿔 승부를 거는 모습을 보면서 ‘흥과 정’으로 가득 찬 우리네 정서에 상처를 입히기 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처음엔 다 될 것 같이 얘기해 놓고 이제 와서 뭐 하자는 거야.’
그래서 일본인들과의 협상은 분명한 논리와 객관적인 자료로서 진행되어야 한다. 자전거를 신칸센 기차에 실을 수 있느냐 없느냐를 놓고 역무원들과 며칠간 실랑이를 벌이며 느낀 점이다.
‘동방 비단길을 열자’며 올해 광복 70주년을 맞이해 한·중·일 동북아 횡단 루트를 선택했다. 기원전 한무제 때 장건이 말을 타고 서역 개척을 떠났던 시발점인 시안에서 우린 자전거를 타고 동쪽으로 페달을 밟았다. 신의주 철교를 건너 임진각을 경유해 국도 1호선을 따라 목포까지 달리지 못한 한이 남는다.
우연일까, 우리가 달리는 그날 거기에, 9월 1일 베이징에서는 전승절과 박 대통령의 열병식 준비가 한창이었고, 10월 13일 일본 도쿄에 도착했을 때 한일정상회담 소식을 TV에서 접했다. 그리고 10월 20일 강원도 고성에 도착하는 날 남북 이산가족을 실은 버스가 통일전망대를 통과했다.
예로부터 한·중·일 동북아 3국은 벼농사를 짓고, 한자를 사용하며, 젓가락으로 음식을 먹는 같은 문화권 종족들이다. 이제 지난 아픈 역사는 ‘화해’로 풀고, 밝은 미래는 ‘배려’로 열어 나가자. 힘 센 가해자가 도도할 때 아픈 자가 먼저 두 손 벌려 화해를 외치자. 그 알량한 베풂을 얻어 마음마저 상하지 말고 먼저 배려의 문을 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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