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8일 일요일 오전 4시. 무거운 엔진 소리와 함께 일렁이는 2층 침대 아래 칸 커튼을 살짝 여니 추니는 자고 있다. 객실 밖 지평선 저 멀리 오징어 배 불덩어리가 세 개는 불쑥 올라와 있고, 네댓 개는 식어 간다.
새벽 거친 파고를 넘는 DBS크루즈 페리 난간에 서니 지난 석 달 동안의 여정이 차갑게 떠오른다. 79일 전 초반의 기억이 마치 몇 년 전 남의 얘기 같다.
진한 회색 지평선이 점차 엷은 분홍색을 띄는 걸 보니 이제 동이 트나 보다. 해안선이 희미하게라도 보일까 싶어 연신 난간에 들락거리지만 이렇게도 시간이 느린 건 처음이다.
9시 반. 동해항에 마중 나온 어머니와 가족들을 대합실에서 만났다. 작년의 유럽 석 달 여행 때와 달리 이번 동북아 여행은 이런저런 생각에 괜히 목이 메었다. 추니도 돌아서서 눈물을 훔쳤다.
잠시 가족을 만나 한을 식히고는 곧바로 접경 지역 평화누리길 횡단에 들어갔다. 동해항을 빠져 나와 강릉으로 올라오는 동해안 자전거 길은 몇 년 전에 와 본 적이 있는데 왠지 새삼스럽다. 소나무도, 이정표도, 철조망도….
안인마을 감이 붉다.
가지가 휘어져 찢어질 것만 같다.
헤진 밤송이가 여기저기 알밤이 튀어나와 갈잎 위에 얹혔다. 추니는 알밤 줍느라 해가 저문다. 하지만 빈껍데기뿐.
하기야 추석 지난 지 스무날인데.
과자 전병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들린다. 추니는 방파제에 올라 자기 세상이다. 어떤 물고기가 잡혔을까? 낚시꾼 부력망을 슬쩍 물 밖으로 들어 올린다. 파도에 밀려 온 다시마를 줍고, 바위에 붙은 굴을 뜯고.
샤르르 츠츳,
모래 속 스며드는 파도소리는 갈매기 자장가였나 보다.
바닷물이 유난히도 새파랗다.
계속해서 밀려오는 파도는 모두 우리 쪽으로 향한다.
‘우리나라 좋다.’
만나는 사람마다 우리말을 쓴다. 다가가 마구 말을 걸었다.
우리 동네 사람들이다.
10월 19일 월요일. 집 나온 지 팔십일 째. 동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향했다. 몇십 년 만에 고국에 돌아온 기분이다. 낮선 땅에서 길 잃어 헤매고, 한밤중 추방 명령으로 짐을 싸 다른 도시로 이동하고, 추돌 사고로 길가에 처박힌 우리를 놔두고 도주하는 차량을 붙잡지 못한 서운한 감정들이 이내 고국에 돌아오니 더욱 진하게 느껴지나 보다.
동해안 자전거 길, 일명 ‘낭만가도’를 신나게 달린다. 그야말로 낭만이 이런 건가 보다. 이제는 눈 감고 어디라도 달릴 수 있다. 오른편 어깨 높이의 끝없는 지평선, 왼쪽 하늘엔 백두대간이 닿았다.
동해안 자전거 길은 국제 관광 상품으로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유럽 최고의 관광 코스라고 하는 로만틱 가도, 도나우 강변, 샴페인 루트보다도 더 낫다. 아직 스토리텔링이나 운영 면에서 조금 부족하지만 충분한 경쟁력이 있다.
10월 20일. 국도 7호선을 따라 양양에서 고성으로 향한다. 오늘은 파도가 잔잔해서 갈매기들이 모두 일터에 나갔는지 한 마리도 보이질 않는다.
현기증 나는 속초항 철교에서 내려와 ‘아바이 마을’에 들러 오징어순대 한 접시를 주문했다. 시래기 넣은 수제 순대를 기대했는데 이젠 그 맛이 아니었다. 집집마다 <1박 2일>이 방영된 곳이란다. 초심이 사라진 듯했다.
고성 문암리 어항. 콧구멍만 한 항구가 어찌도 이렇게 아름다울까? 어선이라곤 고작 스무 척, 오목하게 들어간 항구는 한 바퀴 걸어서 5분이나 걸릴까.
소나무 뒷동산이 포근하게 에워싼 부두에 앉아 한참 동안 바닷속을 속절없이 들여다봤다. 건너편 낚시꾼이 이제나저제나 물고기 한 마리를 낚을까 기다리다가 그만 훌쩍 지난 시간을 보고 화들짝 놀라 안장에 올랐다.
해수욕 시즌이 지난 송지호 해변은 어구와 좌판들로 널려 있다. 이따금 보이는 횟집 앞을 그냥 지나치기 민망했다. 고성 반암항 어촌 ‘마실 황토민박’에 여장을 풀었다. 뜨끈뜨끈한 온돌방에 진흙과 송진 냄새가 물씬 풍기는 흙토방집 주인아주머니가 오늘 처음 딴 거라며 단감을 두 개 가져오셨다.
10월 21일. 고성 해변은 스산한 바람이 불어 방풍 재킷을 꺼내 입었다. 춘천 사는 친구가 진부령을 같이 넘겠다며 새벽에 자전거를 시외버스에 싣고 두 시간을 넘게 달려와 이곳 고성 통일전망대 삼거리에 와 기다리고 있단다.
이번 여정 내내 SNS에 댓글 달며 응원해 주더니 급기야 동반 고통을 자처했다. 친구가 보온병에 담아 온 커피 맛이 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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