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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로 쏟아져 나온 갈매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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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로 쏟아져 나온 갈매기들"

김민웅의 세상읽기 〈165〉

안톤 체홉의 〈갈매기〉 첫 대사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마샤, 그 옷을 좀 벗을 수 없어? 왜 늘 그런 검은 옷을 입고 다니지?" 마샤를 사랑하는 시골 학교의 교사 메드베젠꼬의 물음에 마샤는 잠시 침묵했다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내 인생에 대한 상복이에요. 내 인생은 죽어 있거든요."

〈갈매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한결 같이 고독해 하며 서로 엇갈린 사랑에 괴로워 합니다. 겉으로 화려한 인물이나 그렇지 않은 인물이나 할 것 없이 자신의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는 사랑을 얻기 위해 애를 태웁니다. 또는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다고 여기고 환상으로 채워진 사랑과 명성을 쫓아 길을 떠나기도 합니다.

같은 작가 안톤 체홉의 〈세 자매〉에서도 유사하게 흐르는 무언가 우울하고 어두운 분위기는 제정 러시아 시대의 현실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를 돌파하고 싶어 하지만 정작 그걸 이뤄내는 이는 드물고, 그것은 모두에게 인생에 대한 자신감을 박탈하거나 그저 쓸쓸한 표정으로 서로 어울리는 것으로 만족하게 합니다.

꼬스찬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청년 뜨레쁠레프는 유명한 작가의 꿈을 꾸고 시골 처녀 니나를 사랑합니다. 니나는 그러나 무대 위에서 자신의 재능을 펼칠 유명배우가 되고자 합니다. 그런 니나는 꼬스찬의 엄마와 연인 사이인 명성있는 작가 뜨리고린과 사랑에 빠져 도피행각을 하지만 불행한 결말에 처합니다.

꼬스찬은 이 상처를 딛고 작가가 됩니다. 니나는 버림받고 3류 배우로 지방을 전전하다가 결국 어느 날 꼬스찬에게 돌아오지만 모든 것은 이미 너무나 늦었습니다. 오래 전, 꼬스찬이 갈매기를 쏘아 죽인 적이 있었는데, 니나는 바로 그 갈매기가 자신인 듯 하다는 독백 속에서 사라집니다.

그 갈매기는 말하자면 꿈을 갖고 비상했지만 운명의 총격으로 지상에 떨어지고만 존재의 슬픔을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안톤 체홉의 〈갈매기〉는 그로써 순결한 꿈과 끝까지 간직한 사랑의 좌절과 비극을 가져오는 현실에 대한 아픔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비상의 의지가 무너진 인생들에 대한 체홉의 연민이 여기에 스며 있습니다.

꼬스찬이 결국 자살로 자신의 생애를 마감하는 장면은, 사실 내심으로는 꼬스찬을 사랑했던 마샤의 첫 대사, 상복에 대한 대답, 자신의 인생은 이미 죽어 있는 것이라는 대답과 겹치면서 작품 〈갈매기〉는 죽은 시대에 대한 작별을 고합니다. 이와 함께 현실에서는 어느새 박제가 되어버린 갈매기가 그렇게 된 사연을 누구 하나 기억하지 못하는 고독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리차드 바크의 작품 〈갈매기의 꿈〉, 그 갈매기의 이름은 조나단 리빙스턴이었지요. 보다 높은 곳으로의 비상을 갈망했던 조나단은 안톤 체홉의 "갈매기"가 도달하지 못했던 시대의 희망을 상징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 시대는 제정 러시아와는 이미 100년의 시간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갈매기를 죽이거나 박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연들은 잊혀지고 있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이 박제를 만들겠다는 위협 앞에서 외톨이가 되어가는 갈매기들은 서로 모여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사실 그들은 너무 높이 날겠다는 야망보다는 그저 평범한 갈매기로 하늘을 날고 싶어 할 따름인데도 말입니다. 갈매기의 머리 위로 무언가가 난무하듯 내리쳐지고 있습니다.

운명의 총격인가요? 절규하는 갈매기의 날개는 꺽이고, 북악산과 여의도는 더 이상 새들이 날아올 수 없는 "철조망이 처진 황무지"가 되어가고 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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