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미국 자유무역협정(한미 FTA)은 과연 폐기될까. 안개에 싸인 질문이다. 이와 동시에, 한미 FTA 폐기 여부보다 더 본질적인 논의가 필요하다는 말도 나온다. 지난 11년 동안, 한국의 FTA 정책은 제대로 된 성찰을 거치지 않았다. 이번 기회에 한국의 FTA 정책 자체를 돌아보고, 현 정부의 경제철학에 부합하는 FTA 모델을 만들자는 게다.
미국 정부, 5일 한미 FTA 폐기 검토 회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미 FTA 폐기를 언급한 건 지난 2일(현지 시각)이다. 일부 미국 언론은 하루 전인 지난 1일 한국과 미국 대통령의 통화에서도 이 문제가 거론됐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청와대는 사실과 다른 보도라고 설명했다. 청와대는 "(지난 1일 한미 양국 대통령의 통화에서) FTA의 F도 안 나왔다"고 밝혔다.
또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 3일(현지시간) "트럼프 정부가 오는 5일 한미 FTA 폐기를 검토하기 위한 회의를 열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한국 측 의지와 관계없이, 미국 정부는 일단 한미 FTA 폐기를 검토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미국 정부 주요 각료들은 한미 FTA 폐기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라고 알려져 있다. 폐기 쪽으로 의견이 모아질 가능성은 낮다는 설명이다. 청와대 역시 이렇게 본다.
산업부 장관 "한미 FTA 폐기 가능성도 검토"
그러나 한국 정부가 한미 FTA 폐기 가능성을 아예 부정하는 건 아니다.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4일 서울 한국자동차산업협동조합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한미 FTA 폐기에 따른 문제점들도 가능성 중 하나에 포함해서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백 장관은 "폐기는 아직 결정된 사안이 아니기 때문에 정부에서 예단해서 이야기하면 더 많은 분쟁의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단정적인 언급은 피한 셈이다.
이 같은 차분한 대응은, 한미 FTA가 한쪽의 선언만으로 곧장 폐기되는 건 아니라는 점 때문으로 보인다. 한쪽이 폐기를 밀어붙여도 6개월 유예 기간이 있으므로,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는 것.
미국 언론, 한미 FTA 폐기에 부정적 논조
또 트럼프 대통령의 한미 FTA 폐기 발언 뒤인 지난 3일, 북한이 6차 핵실험을 했다는 점도 변수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한미 FTA 폐기 주장은 북한 핵에 대한 한국과 미국의 공조에 불안정을 불러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이 신문은 존 울프스탈 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군축·핵비확산 담당 국장의 발언을 소개했다. "북한은 미국과 남한 사이를 틀어지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한미 FTA를 폐기하면 북한의 목표가 더 쉽게 이뤄질 것"이라는 내용이다.
다른 미국 언론 역시 한미 FTA 폐기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도한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CNN은 한미 FTA 폐기에 대해 "어떤 상황에서도 좋지 않다"는 제프 플레이트 상원의원(공화당)의 발언을 소개했다.
"한미 FTA 폐기 여부보다 중요한 건, 경제 민주화와 임금주도성장을 뒷받침할 FTA 모델 만들기"
한편 민변 국제통상위원장인 송기호 변호사는 "한미 FTA 개정 협의를 진행하는 상황에서 미국 측이 FTA 폐기를 통지하면 향후 6개월 기간 동안 사실상 '재협상'이 진행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의지는 '현재의 한미 FTA의 틀에 갇히지 않겠다'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미국은 현재 캐나다, 멕시코 등과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재협상을 진행 중이다. 여기에 적용된 모델로 기존 한미 FTA를 대체하려는 게 트럼프 대통령의 의도라는 것.
한국이 이처럼 끌려다니게 된 이유에 대해 송 변호사는 "우리의 통상 모델을 정립하지 못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지난 2006년 이후 FTA는 마냥 좋은 것이라고 포장하던 탓에, 한미 FTA 폐기 주장에 대해 능동적으로 대응하기가 어려워졌다는 이야기다.
송 변호사는 "한미 FTA가 폐기되느냐, 되지 않느냐보다 더 중요한 게 경제 민주화와 임금주도성장을 뒷받침할 FTA 모델을 어떻게 만드느냐는 것"이라고 밝혔다. 요컨대 중요한 건 한미 FTA 그 자체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촛불 시민의 염원 속에서 탄생한 현 정부의 경제 철학에 부합하는 FTA 모델을 만드는 게 우선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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