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히로시마 원폭 돔(原爆, Dome)을 찾아 나섰다. 히로시마 JR역 앞에서 지상 전철 6번을 타고 20분 정도 걸려 원폭 돔 정류장에 도착하자 바로 길 건너에 뼈대만 앙상한 채 흉측한 모습을 한 건물이 우뚝 서 있었다. 원폭 돔이었다. 우린 그 앞에 서서 비문을 꼼꼼히 읽었다.
원폭 돔.
소화 20년 8월 6일 역사상 처음 원자 폭탄에 의해 파멸된 구 히로시마현 산업장려관의 잔해입니다. 폭탄은 이 건물의 거의 바로 위, 약 600m 공중에서 폭발된 1개의 폭탄에 의해 2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고, 반경 약 2km의 시가지가 폐허로 변했습니다.
이 비통한 사실을 후세에 전해 인류의 경계를 삼기 위해 국내외 평화를 원하는 다수의 사람들의 기금으로 보강 공사를 해서 이것을 영구히 보존하고 있습니다. 소화 42년 8월 6일 히로시마시.
우리는 준비해 간 현수막을 원폭 돔의 정문에 걸고 한·중·일 국기를 꺼내 들었다. ‘자전거 동북아 대장정, 광복 70주년, 화해와 배려’라고 적힌 현수막을 보고 관광객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이번 대장정의 의미를 소개한 인쇄물과 기념품을 나눠 주고 그들과 함께 기념사진도 찍고 질문에 답변도 했다.
“우리는 한국에서 온 ‘자전거 보헤미안’ 부부입니다. 지난 8월 1일 중국 시안에서 출발했죠. 베이징과 도쿄를 경유해 66일 만에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함께한 외국인들이 인쇄물을 읽고, 간단한 설명을 듣고 나서 관심과 호응을 보여줬다.
이어서 원폭 돔 바로 옆 평화기념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원폭의 어린이 상’ 앞에는 많은 일본 학생들이 단체로 찾아와 묵념을 하고 있었다.
원폭의 어린이 상.
건립자 - 히로시마 평화를 구축하는 아동 학생회.
제작자 - 도쿄 예술대학 교수 기쿠치 가즈오 씨.
이 상은 2살 때에 피폭 당한 사사키 사다코 씨가 10년 후에 백혈병으로 사망한 것을 계기로 동급생들이 ‘원폭으로 사망한 모든 어린이들을 위한 위령비를 만들자’고 호소하여 전국의 3,200여 개 학교와 전 세계 9개국으로부터 기부를 받아 1958년 5월 5일에 완성된 것입니다.
이 상의 높이는 9m였는데, 그 위에는 종이학을 받쳐 든 소녀의 브론즈상이 세워져 있고, 평화로운 미래에 대한 꿈을 기다리고 있다는 해설이 적혀 있었다.
또 바로 아래에 ‘이것은 우리들의 외침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기도입니다. 세계에 평화를 구축하기 위한.’이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었고, 그 내부에 매달린 종에는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유카와 히데키 박사가 쓴 ‘천 마리 학’, ‘땅에 하늘에 평화.’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는 해설도 덧붙여져 있었다.
원폭의 어린이 상에서 불과 100m 떨어진 곳에 1952년 8월 6일 세워졌다는 ‘히로시마 평화도시 기념비’가 있었다. 그 기념비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평안히 잠드십시오. 잘못은 되풀이하지 않겠습니다.’
히로시마 평화도시 기념비에 대한 한국어 해설 책자에 적힌 글은 다음과 같다.
이 기념비는 1945년 8월 6일 세계 최초의 원자 폭탄으로 인하여 괴멸된 히로시마를 평화도시로서 재건할 것을 염원하여 설립된 것입니다.
비문은 모든 사람들이 원폭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며, 전쟁이라는 잘못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는 말입니다.
과거의 슬픔을 참고 견디어 미움을 극복하고, 전 인류의 공존과 번영을 소원하며 진정한 세계 평화의 실현을 기원하는 히로시마의 마음이 여기에 새겨져 있습니다.
중앙 석실에는 원폭 사망자 명단이 봉안되어 있으며, 이 비를 원폭 사망자 위령비라고도 부릅니다.
위령비 지하 1층 자료실에 들어서자 벽면에는 페허가 된 사진과 함께 다음과 같은 설명이 붙어 있었다.
‘원자 폭탄이 투하되었을 때 히로시마에는 35만여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고 추정됩니다. 이 사람들 중에는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인이 많이 있었으며 중국인도 있었는데 특히 반 강제적으로 징용되어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중국 및 동남아시아 출신 등의 유학생과 미군 포로들도 함께 있었습니다.’
우린 원폭 돔과 평화기념공원을 떠나며 마음 한구석에 아린 느낌이 남아 있었다. 그 느낌이 뭘까? 왜 일본은 기념공원을 만들면서 원자 폭탄에 의한 일본인들의 피해와 슬픔만을 설계에 반영해 놓았을까?
공원을 가득 메운 일본 학생들이 이 내용들을 보면서 어떤 느낌을 받고 또 어떤 각오를 할까? 참 안타깝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원폭 돔과 평화기념공원은 다시 설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객관적이어야 공감을 얻는다. 일본인들만 입장하는 공원이 아니지 않는가. 왜 원자 폭탄이 투하됐는지 먼저 그 역사적 원인과 잘못된 국가 정책이 무엇이었는지를 설명해 놓아야 할 것이 아닌가.
오늘 우리는 히로시마에서 원폭 피해자의 슬픔에 애도를 표했다. 그리고 이제부터라도 한·중·일 동북아 삼국이 지난 아픈 역사를 ‘화해’로 풀고, 밝은 미래는 ‘배려’로 열어 나가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화해와 배려’는 자신의 입장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헤아려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침략으로 고통을 준 자의 그 알량한 대가를 기다리지 말고 요구하지도 말자. 그 대신 품격 높은 용서를 베풀자. 그러면 그들은 마음속으로 더욱 뼈아픈 사죄를 할 것이고 우리나라와 피해자들은 명예가 지켜질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명언을 되새기며 아픈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분야에서 우위의 경쟁력을 갖춰야겠다는 마음을 깊이 새기자.
적자생존의 치열한 글로벌 현장에서 비교 우위를 갖지 못하면 총칼보다도 더 가혹한 역사가 다시 찾아올 수도 있다. 그때 가서 과거 침략자들에게 ‘역사를 똑바로 인식하라’고 훈계하는 것은 한갓 한풀이로 여겨질 수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다른 나라에 종속되지 않으려면, 또 문화인으로 존경받으려면 먼저 우리 문화와 전통이 존중받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곰팡이는 햇살과 함께 사라지듯이 우리 사회도 ‘화해와 배려’, ‘감사와 긍정’의 햇살이 더욱 강하게 내리쬐면 좋겠다. 원폭 돔과 평화기념공원을 돌아서는 발걸음이 무겁고 씁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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