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47강은 2017년 9월 24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정시에 출발합니다.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47강 여는 모임)
이날 답사코스는 서울-충목단-이항복묘-화산서원-전계대원군묘-포천향교-반월성-채산사-청성사-점심식사 겸 뒤풀이-용연서원-영평관아터(영평초등학교)-안동김씨고택터-금수정-창옥병(암각글씨)-옥병서원-서울의 순입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47강 답사지인 <포천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포천(抱川)’이란 이름의 유래
포천(抱川)은 동북쪽으로는 현등산(懸燈山), 강씨봉(姜氏峰), 백운산(白雲山)이 경기도 가평군(加平郡), 강원도 화천군(華川郡)과 경계를 이루고, 서남쪽으로는 천보산(天寶山)과 축석령(祝石嶺)을 경계로 경기도 양주시, 의정부시와 접하고 있으며, 서북쪽으로는 지장봉(地藏峰)과 명성산을 경계로 경기도 연천군, 강원도 철원군에 접하고 있습니다.
이곳 포천천의 옛 이름은 한천(漢川)이며 축석령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 영평천에 합류하고, 다시 한탄강과 임진강을 거쳐 한강으로 흘러드는 하천인데, 고모천, 금현천, 우금천, 좌의천, 구읍천, 명덕천, 운악천, 길명천, 수일천 등의 지류 하천이 합류하며 총길이는 29㎞입니다.
영평천(永平川)은 광덕산(廣德山)의 서쪽 자등현(自等峴)과 광덕현에서 발원하여 한탄강(漢灘江)으로 흘러드는 하천으로, 길이는 40㎞이며 광덕현에서 흘러나온 물이 동쪽의 백운산 물을 합쳐 이른바 산수가 수려한 백운동계곡을 이룹니다.
포천이라는 명칭은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물이 없고 외부로 흘러나가기만 한다고 하여 안을 포(抱), 내천(川)으로 이름 지었다고 하는데, 산줄기의 흐름을 보아도 광덕산, 백운산, 국망봉으로 이어지는 한북정맥의 서쪽에 위치하여 모든 물줄기들이 동쪽인 한북정맥에서 발원하여 영평천에 모여 다시 한탄강과 임진강을 거쳐 서해로 흘러듭니다.
포천은 “본디 고구려의 마홀(馬忽)인데 일명 명지(命旨)라고도 한다. 신라 때 견성군(堅城郡)이라 고쳤으며 고려 초기에 포주(抱州)라 하였고, 그후 포천이라 개칭하여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목종(穆宗) 8년에 이를 파하였다. 현종(顯宗) 9년에 양주에 예속시켰고, 명종(明宗)이 양주를 분리하여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本朝) 태종(太宗) 13년에 현감으로 고쳐 만들었다. 관원(官員)은 현감, 훈도(訓導) 각 한 사람씩 두었다”고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기술하고 있습니다.
궁예 세력권...그의 패전 아쉬워하는 기록들
4세기 후반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즉위하면서 고구려와 백제의 항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는데 고구려는 백제로부터 임진강과 한강 유역의 58개 성(城)과 700개 촌(村)을 빼앗았고, 이들 가운데 미사성은 포천 관내에 있었던 대전리산성의 백제 때 명칭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고모루성(古牟婁城)은 고모리산성에 비정되기도 합니다.
6세기 초반 안원왕(安原王)이 즉위하면서 고구려는 극심한 정쟁에 휩싸이게 되었고, 국가 체제를 정비한 백제 성왕과 신라 진흥왕의 동맹군에 의해 한강 하류 유역을 빼앗겼으며 이때 마홀군은 신라의 신주의 관할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신라는 매소성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나당전쟁을 종식하고 불완전하나 삼국통일을 이루었기 때문에 삼국통일 과정에서 매소성이 주목을 받았습니다.
757년(경덕왕 16) 한산주 마홀군에서 한주(漢州) 견성군(堅城郡)으로 바뀌고, 내을매현과 양골현 또한 사천현(沙川縣)과 동음현(洞陰縣)으로 각각 개칭되었으며, 이후 예성강 이북 북방 경영이 진행되면서 한주의 북쪽 끝인 철원과 함께 발해에 대한 전진기지의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신라 하대에 들어 왕실 내의 빈번한 왕위 쟁탈전과 자연재해로 정치체제가 와해되고 농촌 사회의 해체가 가속화되면서 농민 봉기와 함께 지방에 호족이 등장하였는데, 이때 견성군은 궁예(弓裔)의 세력권이었습니다. 양길(梁吉)의 부하이던 궁예는 그를 몰아내고 901년 왕위에 올라 송악에 후고구려를 세웠고 905년 다시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911년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고쳤습니다.
포천 지역에는 당시 궁예가 왕건의 군대와 접전을 벌였으며 전승의 기록이 많이 전하고 있는데, 궁예의 패전과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내용이 대부분으로, 이러한 전승 내용으로 볼 때 견성군은 친(親)궁예적인 지역이었음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918년 고려가 건국되고, 923년(태조 6) 명지성(命旨城) 장군 성달(城達)이 아우 이달(伊達), 단림(端林) 등과 함께 고려에 귀부하였는데 견성군이란 지명 대신에 명지성을 칭한 것을 보면, 성달은 반(反)신라적이며 친(親)궁예적인 호족으로 추정됩니다.
포천 지역은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포주와 동음현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940년(태조 23)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후 견성군을 포주(抱州)로 고쳤고 성종 초 전국을 5도 양계와 경기로 나눌 때, 포주는 북계에 속해 있었고, 1018년(현종 9) 전국을 5도와 양계로 나눌 때 양광도(楊廣道) 양주군(楊州郡)에 속하였고, 1069년(문종 23) 경기를 종전의 13개 군현에서 50여 군현으로 확장할 때 양광도에서 경기로 편입되었습니다.
공양왕 때 포주는 경기좌도에 속하여 과전법(科田法) 시행의 대상이 되었고 고려 말 이색(李穡)이 세속을 떠나 왕방산(王方山)에 들어와 삼신암이란 암자를 짓고 은신한 이야기가 전하며, 실제 성여완(成汝完)은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왕방산 아래 계류촌에 은거하면서 스스로 왕방거사(王方居士)라 하였다고 합니다.
한편 동음현(영평)은 1018년 동주(東州, 철원)의 속현이 되었고, 1106년(예종 1) 처음으로 지방관인 감무를 두었으며 1269년(원종 10) 위사공신(衛社功臣) 강윤소(康允紹) 장군의 고향이므로 동음현감을 영흥현령(永興縣令)으로 고쳤습니다.
조선 태조 때 ‘포천’ 이름 처음 나와
1393년(태조 2) 영흥현이 영평현으로 개칭되었고 1413년(태종 13) 포주가 포천현으로 개칭되면서 이때 포천의 이름이 처음으로 사용되었으며, 광해군 때 포천현과 영평현이 합쳐져 영흥도호부로 승격되었고 경기감영을 설치하기도 하였으나 1623년 다시 포천현과 영평현으로 분리되었습니다.
조선 초 포천현은 왕실과 밀착된 지역으로 태조, 태종, 세종 등 왕실의 사냥터와 군사훈련장이었으며, 포천현 재벽동(滓甓洞)에는 신의왕후(조선 태조의 비)의 농장, 철현(鐵峴)에는 신덕왕후(조선 태조의 제2비)의 농장이 있었습니다.
한편 영평현에도 개국공신인 여진인(女眞人) 청해이씨(靑海李氏) 시조 이지란(李之蘭)]을 모신 청해사(淸海祠)가 있음을 볼 때, 고려시대의 포주, 동음현보다 왕실의 관심을 많이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으로 호국과 충절의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양치(楊治)는 세종 조에 김종서(金宗瑞) 등과 함께 북방 개척에 무용을 떨쳐 함길도 절도사를 지냈고, 김종서가 세상을 뜨자 포천의 천주산(天柱山) 아래, 지금의 포천시 신북면 기지리에 은거하여 두문불출하였으며, 사육신의 한 사람인 유응부(兪應孚)는 포천의 소흘산(所屹山)에 거주하였고 1455년(세조 1) 성삼문, 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잡혀 죽었습니다.
조선후기 포천 지역에서 주목되는 사건 중에 노비와 일반 백성이 관련된 현종강상사건과 여환의 혁명모의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
1674년(현종 15) 포천 지역에 살던 노비 전석(全石)이 상전을 살해하려고 한 사건에 연루되어 포천고을이 일시적으로 혁파되었고, 당시 현감이 파직되기도 하였습니다.
1688년(숙종 14) 승려 여환(呂還)이 양주, 영평 사람 11명과 함께 미륵신앙을 믿고 세상을 개혁하려고 혁명을 꾀하다 처형되었는데 이때 영평 사람으로는 지사(地師) 황회(黃繪)와 상한(常漢) 정원태(鄭元泰), 정호명(鄭好明), 이말립(李末立), 정만일(鄭萬一) 등이 참여하였습니다.
가담자를 잡아들이는 과정에서 양주와 영평 사람들이 괴로움을 피해 농사를 폐하고 도망을 가자 숙종이 특별히 경기도 감사에게 유지를 내려 민심을 위로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도록 회유하게 하였습니다.
조선 후기에 포천 지역은 금강산을 지나 함경도와 북방으로 가는 경흥대로 상에 있어 물산의 유통이 빈번하여 상업이 발달하였기에 근기(近畿) 지역을 대표하는 상업도시로 명성을 얻었으며, 특히 포천시 소흘읍 송우리에 있는 송우점과 송우장은 조선후기 경기북부의 대표적인 점포상점(店鋪商店)으로 동북 방면과 도성을 연결해 주는 상업 요충지였습니다.
포천에서 의병 투쟁 크게 일어난 이유
개항기에는 이곳 출신인 김평묵(金平默)과 최익현(崔益鉉)의 위정척사 사상이 널리 퍼져 포천 지역에서 의병투쟁이 적극적으로 일어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고, 이은찬(李殷瓚), 연기우(延基羽), 강기동(姜基東), 윤인순(尹仁淳) 등 의병부대의 항쟁지로서 많은 사람들이 의병에 가담하였습니다.
포천 지역의 산성은 대체로 해발 300m 이하의 구릉성 산지이고 산성이 있는 곳은 주변 산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낮지만 평야 지역이 가장 잘 조망되는 곳에 있고 또한 산성 주변에 강이나 하천을 끼고 있어 이를 자연 해자(垓字)로 이용하여 축조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지형 조건으로 볼 때 포천 지역의 산성은 두 가지 형태로 분류할 수 있는데, 하나는 평지에 솟아 있는 구릉(丘陵)에 축조된 반월산성, 고모리산성, 냉정리산성 등이고, 다른 하나는 산줄기가 하천에 의하여 침식된 지역에 축조된 고소산성, 성동리산성, 보가산성, 주원리산성 등입니다.
이 지역 일대의 가장 큰 성, 반월성
반월성(半月城)은 청성산(靑城山 284.5m)에 축조된 테뫼식 산성으로, 둘레는 1,080m, 전체적인 형상이 반달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어서 반월산성이라고 불리는데, 포천 지역은 물론 인근 지역에 있는 산성 가운데 가장 큰 규모입니다.
반월성은 후삼국 시대 태봉(泰封)의 궁예(弓裔)가 쌓은 성이라고 전해져 왔으나 1994년 지표 조사와 1995년 이후부터 이루어진 여러 차례의 발굴조사 결과 삼국시대에 백제가 처음 쌓은 성이라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습니다.
반월성은 북고남저, 서고동저의 지세(地勢)이며 북벽의 길이는 약 400m로, 체성(體城)에는 북문지 및 장대지가 조성되어 있고 내·외벽이 성내에서 가장 양호한 상태로 남아있으며 서벽의 길이는 약 70m로 남서, 북서의 세 방향으로 완만한 경사를 유지하며 내려가는 해발 255m 능선 상단부에 조성되어 있고 중간 지점에 서치성(西雉城) 1개소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남벽은 삼국시대에 축조된 남문지 1개소, 치성 2개소가 남아있고 성벽은 시대를 달리하면서 세 차례에 걸쳐 조성되었음이 확인되었으며 동벽은 북벽에서 애기당지가 위치한 봉우리에서 완만하게 남쪽으로 회절하여 동치성(東雉城)까지 이어지는데 전체 길이는 약 150m입니다.
고모리산성(古毛里山城)은 고모산(古毛山 386m) 정상부를 에워싼 두 개의 계곡을 끼고 있는 포곡식 산성으로 현재는 대부분 붕괴되어 성벽의 정확한 형태를 확인하기 어려우나 대체로 둘레는 약 822m이고, 석축의 흔적이 일부 남아있지만 대부분이 토성(土城)으로 남벽과 서벽은 산의 정상부를 따라 축조되었고 북벽은 북쪽의 산허리를 깎아 축조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동벽은 거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곳은 예로부터 서울에서 관북지방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로서, 즉 의정부에서 축석령(祝石嶺)을 넘으면 동쪽과 서쪽으로 산맥이 연결되어 있고 그 가운데 남북으로 길게 포천평야가 자리잡고 있는데 노고산은 남쪽에서 포천평야로 들어가는 입구 길목에 놓여 있습니다.
산성이 언제 축조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현재까지의 견해는 대체적으로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이곳에서 출토된 토기를 바탕으로 백제가 북방의 고구려나 말갈을 방어하기 위하여 쌓았다고 보기도 하고, 또는 고구려가 남진하면서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기 전 전초기지로 축조하였을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냉정리산성(冷井里山城)은 할미산(205m)에 축조된 산성으로, 능선을 깎아낸 후 자연석을 가공하여 한 쪽 면만을 축조한 편축법(片築法)으로, 이러한 축조법은 삼국시대에 보편적으로 사용하였는데, 성의 주위는 250m로 추정되며 동서로 긴 타원형으로 북쪽과 서쪽은 험하고 남쪽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대교천, 그 앞쪽에는 한탄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성 안에는 4개의 건물터가 확인되었으며 주변에서 고배편(高杯片)과 인화문토기편(印花紋土器片), 파상문토기호편(波狀紋土器壺片) 등이 수습되었는데 발굴 유물을 통해 볼 때 냉정리산성의 축조시기가 최소 통일신라 시기로 볼 수 있습니다.
고소산성(姑蘇山城)은 130m 고지에 둘레 444m로 축성한 테뫼식 산성으로 서고동저형(西高東低形)이면서 남북으로 긴데, 축성 연대를 밝히기는 쉽지 않으나 돌 모양이나 붕괴된 모습으로 보아 삼국 초기에 쌓았던 것으로 보이며, 개수한 흔적도 없고 문헌에서도 일찍이 폐성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구전(口傳)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부녀자들이 쌓은 민보성(民堡城)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성동리산성(城洞里山城)은 해발 180m의 잔구성(殘丘性) 산지인 잣골마을 일대에 축조된 석축 산성으로, 기록은 일체 남아있지 않으나 궁예(弓裔)가 축성하였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918년 왕건(王建)의 군대에 쫓기던 궁예가 한때 이곳에 머물렀고, 백성과 군사를 동원하여 한탄강에서 돌을 날라다 성을 급조하였으며 이러한 전설이 와전되어 ‘태봉성(泰封城)’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산성 안에 ‘태봉산성(胎封山城)’이라 표기한 문화재 안내판을 세워놓은 까닭은 이곳에 조선 순조의 세자 익종의 태(胎)를 안치하여 그리하였다고 합니다.
산성의 서쪽으로는 보장산과 종자산이, 동쪽과 남쪽으로는 자연 해자의 기능을 하는 영평천이 동에서 서로 흐르며, 포천천과 만나 한탄강과 임진강에 합류하는데 포천~철원 방면의 남북 교통로와 전곡~이동 방면의 동서 교통로가 교차하는 지점을 방어하기에 가장 효과적인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보가산성지(保架山城址)는 일명 보개산성(寶蓋山城)이라고도 하는데, 서쪽에는 지장봉(地藏峰), 화인봉(花人峰), 북대(北臺) 등 높은 산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그 사이에는 계곡이 남북 방향으로 길게 형성되어 있으며, 동쪽에는 고남산(古南山 644m), 북쪽에는 금학산(金鶴山 947m), 남쪽에는 서쪽 계곡을 흐르는 개울물을 막은 중리저수지가 있고, 저수지 건너편에는 종자산(種子山 642m)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보가산성지는 둘레 약 4.2㎞이고, 형태는 남북이 동서보다 두 배 이상 긴 변형된 사변형 모양으로, 산성의 대부분은 파괴되었고 현재는 서벽과 북벽의 여러 곳에 성벽이 불연속적으로 남아있는데, 산성의 동쪽과 남쪽은 절벽으로 이루어져 성벽을 축조할 필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성 안에는 문터[門址] 1개소, 우물 1개소, 추정 건물터 2개소 등이 확인되었습니다.
또한 보가산성지는 태봉(泰封)의 궁예(弓裔)가 축조하였다고 하여 ‘궁예성지(弓裔城址)’라고도 하며 특히 일제강점기에 간행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는 이 산성을 ‘궁예대왕각대성지(弓裔大王閣岱城址)’라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포천 지역에 전하는 전설에도 태봉국왕 궁예가 부하 장군 왕건(王建)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쫓길 때 왕건 군과 싸운 성터로 설명하고 있으며 또 성안에는 ‘궁예왕 대궐터’나 ‘궁예왕 우물터’ 등의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 오고 있습니다.
읍치구역은 포천, 영평
포천 지역에는 포천과 영평에 읍치구역이 있었습니다.
포천현 관아(官衙)터는 반월산성 남쪽의 포천 들판이 조망되는 지형으로, 조선후기까지 유지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현재는 경작지로 활용되고 있으며 면사무소가 인근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포천향교(抱川鄕校)는 고려시대인 1173년(명종 3)에 세워졌다고 전해지며,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1594년(선조 27)에 중건하였고,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것을 포천 유림(儒林)들이 뜻을 모아 다시 중건하였습니다.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로 명륜당(明倫堂)과 동재, 서재가 있으며 대성전(大成殿)에는 공자(孔子)를 비롯한 5성(聖)과 송조(宋朝)4현(賢), 동국(東國)18현(賢)의 위패를 모시고 있습니다.
영평현 관아(官衙)는 일제강점기에 주재소로 사용되다가 한국전쟁 때 건물이 파괴되었으며 그 터는 영평초등학교 자리에 있고 정문 앞에는 선정비 3기와 초등학교 안에는 미륵불과 귀부가 있으며, 운동장에는 건물 초석으로 쓰인 석재 3기와 장대석이 놓여 있습니다.
영평향교(永平鄕校)는 1173년(명종 3) 창건하여,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으나 1594년(선조 27) 중건했고 1938년 철폐되어 제향만 모셔 왔으나 이후 관리가 허술해 주춧돌과 계단석 등만 남아있는데, 2011년 영평초등학교 정문에 ‘영평향교유허비’를 세웠습니다.
왕족과 사대부, 은인자적(隱人自適) 노닐다
포천은 지리적으로 한양(漢陽)과 가까워 왕손과 대신들의 사패지(賜牌地)가 많아 그 후손이 세거하면서 유교문화를 주도한 지역입니다. 사족 중심의 향촌사회 지배구조가 형성되었고 지역유림의 교육기관인 서원이 설립되어 유교사회의 기초가 저변까지 확대되어 갔습니다.
조선 개국과 더불어 유교가 불교를 배척하고 사회 개혁의 실천적 경향을 띠면서 정착되어 갈 때 포천에 정착한 저명한 유학자로 성여완(成汝完)과 성석린(成石璘) 부자를 들 수 있습니다.
성여완은 고려가 멸망한 후 포천군 신북면 왕방산 아래에 은거하면서 절개를 지킨 충신이고 그의 아들 성석린은 조선 건국에 참여하여 유교의 이념과 문화를 사회에 확산시키고 국가 제도를 정비하고 성리학을 학문적으로 체계화하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조선 초기의 충신 유응부(兪應孚)는 대표적인 유학자로, 포천시 소흘읍 무봉리에서 출생하여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하고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참혹한 죽임을 당한 사육신의 한 사람입니다.
조선 후기 노론의 영수이자 대표적 성리학자인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 형제도 포천에 살았는데 이들은 성리학 학설에 이(理)와 기(氣)의 작용을 모두 인정하는 절충적인 입장을 취하여 주리, 주기 양파의 성리학설을 조화시키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이항로(李恒老)를 중심으로 한 화서학파(華西學派)는 중화와 오랑캐를 구분하는 화이론(華夷論)의 의리정신에 입각하여 서양세력을 오랑캐로 규정하고 강상(綱常)의 윤리를 밝혀 서양의 침략에 맞서서 외세의 압력에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고, 특히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여 도학의 의리정신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였습니다.
이항로의 수제자였던 김평묵(金平默),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의병을 일으켰던 최익현(崔益鉉) 등이 포천 출신 화서학파 인물들입니다.
그리고 포천 지역에는 이항복, 이덕형, 그리고 박순을 배향하는 서원이 남아 있습니다.
화산서원(花山書院)은 이곳 출신 이항복(李恒福)을 기리기 위해 1635년(인조 13)에 건립되었으며 1730년(숙종 46)에 화산(花山)으로 사액되었고,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위패는 매안(埋安)하였다가 1971년에 지방 유림들의 공의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경내에는 이항복의 위패가 봉안된 인덕각(仁德閣)과 내신문(內神門), 동서협문(東西夾門), 필운재(弼雲齋)와 동강재(東岡齋) 등 강당을 겸한 재실이 남아 있습니다.
이항복(李恒福)은 본관이 경주(慶州)이고 자는 자상(子常)이며 호는 필운(弼雲), 백사(白沙), 동강(東岡)으로, 1580년(선조 13)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1589년 예조정랑으로 정여립(鄭汝立) 모반을 처리하였고, 임진왜란 때는 병조를 맡았으며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가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해졌습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포천의 화산서원과 북청의 노덕서원에 배향되었으며 배위는 정경부인 안동권씨(安東權氏)로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의 딸입니다.
평생 청렴한 관리로 당파에 휩쓸리지 않았고 문장 또한 뛰어났는데, 신흠(申欽)은 이항복 신도비명에 “조정에 당파 싸움으로 서로를 겨눈 지 40년이 넘어 현인이나 불초를 막론하고 어느 쪽을 표방하지 않은 자 없었다. 그러나 공만은 홀로 중립을 취하여 기울어지 않음이 태산의 높은 봉우리와 같이 높으니 감히 어느 누구도 헐뜯지 못하였다(朝廷黨此相傾四十年餘 賢不肖莫不標榜而 公獨中立不倚 屹乎如泰山喬嶽 人不敢訾而)”라고 썼습니다.
용연서원(龍淵書院)은 포천에 은거하며 만년을 보낸 이덕형(李德馨)과 조경(趙絅)을 기리기 위해 1691년(숙종 17)에 이사상(李師相) 등의 남인계 유생들이 창건한 조선후기 서원으로 남인 집권기인 1692년에 ‘용연(龍淵)’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경기도 내 남인세력의 유력한 근거지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이덕형이 세운 공로가 인정되어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았으며 창건 당시 사우(祠宇), 강당, 동재(東齋), 서재(西齋) 등이 있었으나 한국전쟁 등으로 소실되어 현재는 사우만 남아 있습니다.
이덕형(李德馨)은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 쌍송(雙松), 포옹산인(抱雍散人), 시호는 문익(文翼)으로 당시 대사간이자 동인에 속한 이산해(李山海)의 딸과 혼인하여 그의 사위가 되었으며, 이때 <토정비결>로 유명한 이지함(이산해의 작은아버지)이 이덕형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사윗감으로 추천하였다고 전해지며, 이덕형의 부인 한산이씨는 임진왜란 때 왜적을 피해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결하였습니다.
1580년(선조 13)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보직되고 대제학 이이(李珥)에게 발탁되어 정자(正字)를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이듬해 박사(博士)가 되고 수찬, 교리 등을 거쳐 예조참판에 올랐으며 겨우 31세에 대제학을 겸임하였고 우의정에 이어 좌의정에 올랐습니다. 1601년 경상, 전라, 충청, 강원도의 4도 도체찰사가 되어 전쟁 후의 민심 수습과 군대 정비에 노력하고 이듬해 영의정에 올랐습니다.
1613년(광해군 5)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과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북인(대북파)와 대립하였고 결국 모든 관직이 삭직되고 낙향하여 경기도 양근(楊根)으로 물러났다가 경기도 광주 사저에 머물다 병을 얻어 1613년 사망하였습니다.
절친한 사이로 잘 알려진 이항복(李恒福)과는 기발한 장난과 우정이 얽힌 많은 일화를 남겼고 1613년 사망했을 때 이항복이 가장 슬퍼하며 이덕형을 직접 염했다고 전해지는데, 인조 때 복관되고 포천의 용연서원(龍淵書院)과 상주의 근암서원(近巖書院)에 배향되었습니다.
옥병서원(玉屛書院)은 1658년(효종 9) 박순(朴淳)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였고 1698년(숙종 24) 이의건(李義健)과 김수항(金壽恒)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1713년에 ‘옥병(玉屛)’이라고 사액되었으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위패는 서원터에 매안(埋安)하고 단을 설치하여 향사를 지내오다가 1926년에 김성대(金聲大), 이화보(李和甫), 윤봉양(尹鳳陽)을 추가로 배향하였습니다.
경내에는 사우(祠宇)인 숭현각(崇賢閣), 신문(神門), 동서 협문(夾門), 박순 묘 및 신도비 등이 남아 있습니다.
박순(朴淳)의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菴),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충주(忠州)이고 1553년(명종 8)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대사헌, 대사간,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에 올랐으며, 선조가 ‘송균절조수월정신(松筠節操水月精神)’이라고 극찬할 정도로 청렴하고도 강직하였는데 나주의 월정서원, 광주의 월봉서원에도 배향되었으며 저서로 <사암집(思菴集)>이 있습니다.
창옥병(蒼玉屛)은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이 사암(思菴) 박순(朴淳)의 은거지에 찾아와서 그를 추억하며 아름다운 한탄강의 풍경을 읊은 칠언율시(七言律詩) 2수로 <농암집(農巖集)> 제6권에 실려있는데 박순의 위패를 모신 옥병서원(玉屛書院)이 가까이에 있습니다.
김창협은 자(字)가 중화(仲和)이고, 호(號)는 동음거사(洞陰居士), 한벽주인(寒碧主人), 삼주(三洲), 농암(農巖) 등을 사용하였고 본관은 안동이고, 시호(諡號)는 문간(文簡)이며 노론낙론(老論洛論)의 종장으로 일컬어집니다.
1669년(현종 10) 5월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2년(숙종 8) 11월에 증광별시 문과에 장원하여 성균관 전적이 되었고 이후 1687년(숙종 13) 대사간, 대사성이 되고, 1706년(숙종 32) 대사헌, 대제학에 올랐으며 부친인 김수항(金壽恒)이 포천시 일동면에 자리한 인연으로 이러한 작품이 지어졌습니다.
창옥병은 영평팔경의 하나로, 아래로 흐르는 영평천의 병풍 같은 바위에 무려 11점의 암각문(巖刻文)이 한 곳에 집중되어 새겨져 있는데 관련된 사실이 문헌 자료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어 구전에 근거하거나 단순히 경승지를 유람하다 즉흥적으로 각자한 자료와 구별되는, 우리나라 서예사(書藝史)에 매우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병풍바위에는 석봉(石峯) 한호(韓濩)가 쓰고 신이(辛夷)가 새긴 글, 선조가 8자로 써서 하교한 글, 박순 선생의 <제이양정벽(題二養亭壁)>이라는 시를 김수증이 1700년경에 써서 암각(巖刻)한 글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포천 지역은 한양과 가깝고 수려한 경관을 지니고 있어 왕족과 사족(士族)들의 무덤이 많은데 태종의 외손인 이즙(李楫), 선조의 12남인 인흥군(仁興君), 인조의 3남이자 효종의 동생인 인평대군(麟坪大君), 철종의 아버지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등의 왕족의 무덤과 박순, 이항복, 김창흡, 김흥근, 양사언 등 사족의 무덤이 남아 있습니다.
전계대원군묘(全溪大院君墓)는 왕방산 기슭에 있는데 1841년 이광이 57세로 세상을 뜨자 경기도 양주 신혈면 진관(현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외동)의 은언군묘 옆에 안장하였다가 1856년 포천의 현 위치로 이장하면서 완안 부대부인과 합장하였으며 용성 부대부인 염씨 묘는 이광 무덤의 동쪽 옆에 단독으로 조성하였습니다.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이광(李㼅)은 조선 후기 왕족으로 그의 가계는 영조(英祖 증조할아버지)→사도세자(思悼世子 할아버지)→은언군(恩彦君 아버지)→전계대원군→철종(哲宗 아들)으로 이어집니다. 이광은 부모와 형 상계군(常溪君) 부부의 죄에 연좌되어 강화도 교동으로 쫓겨나 빈농으로 살았으며 사후에 이광의 셋째 아들 이원범(李元範)이 1849년 철종으로 등극하자 전계대원군으로 추봉되었습니다.
영평군묘(永平君 墓)는 영평군 이경응(李景應)과 정경부인 청도김씨(淸道金氏)를 합장한 단분(單墳)으로, 19세기 중반에 조성된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경릉(景陵)의 묘제 양식을 이은 것으로 평가되는 20세기 상류층 무덤의 으뜸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영평군(永平君) 이경응(李景應)은 고종 연간의 문신으로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의 둘째 아들이자 철종(哲宗)의 형으로 1882년 판돈령부사를 역임하였고, 1895년 영돈령원사(領敦寧院事)를 지냈으며 시호는 효정(孝貞)입니다.
여성군 묘역(礪城君 墓域)에는 봉분 앞에 혼유석, 상석, 향로석, 장명등이 있고 좌우에는 망주석과 문인석의 석물이 갖추어져 있으며 입구에는 1732년(영조 8)에 건립된 신도비가 서 있는데, 비문은 좌의정 조문명(趙文命)이 짓고 전액은 서평군(西平君) 이요(李橈)가 지었으며 정언 임집(任潗)이 비문을 썼습니다.
여성군(礪城君) 이즙(李楫)은 인조(仁祖)의 고손(高孫)으로, 생부는 영창군(瀛昌君) 이심(李沈)이고 화천군(花川君) 이비(李淝)에게 입양되었는데, 왕희지(王羲之)와 왕헌지(王獻之)의 필법을 터득하여 서예에 뛰어나고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영조 대에는 청에 주청사(奏請使)로 가서 왕세자의 책봉을 받아오기도 하였습니다.
김창흡묘(金昌翕墓)는 부인 경주이씨(慶州李氏)와 단분(單墳) 합장묘로 묘역은 2단으로 나뉘어 위쪽에는 봉분, 묘비, 새로운 비가 있으며, 아래쪽에는 상석, 향로석, 망주석 2기를 갖추고 있습니다.
김창흡(金昌翕)의 자는 자익(子益)이고, 호는 삼연(三淵)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좌의정 김상헌(金尙憲)의 증손이고,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셋째 아들로 형은 영의정을 지낸 김창집(金昌集)과 예조판서 등을 지낸 김창협(金昌協)입니다.
김창흡은 조선중기의 유학자로 중형인 김창협과 함께 성리학과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특히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주리설(主理說)과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주기설(主氣說)을 절충한 경향을 취했습니다.
김창흡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포천의 유림들은 헌종 때 요산영당을 세웠고 1850년(철종 1)에 사액(賜額)되었는데, 요산영당은 일설에는 ‘요산사(堯山祠)’였다고 하는데 1868년(고종 5)에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훼철되었으나 포천의 유림들은 영당이 있던 자리에 단(壇)을 만들어 ‘요산단(堯山壇)’이라 하고 제사를 지내오고 있습니다.
김흥근묘(金興根墓)는 봉분 주위에 호석을 둘렀고 봉분 앞에는 묘비, 혼유석, 상석, 향로석, 제주석(祭酒石), 망주석 등의 석물이 놓여있으며, 비문은 영의정 이경재(李景在)가 짓고 글씨는 좌의정 송근수(宋近洙)가 썼으며 판서 이시민(李時敏)이 전(篆)을 썼는데, 묘소는 처음에 시흥군 상북면에 있었으나 1880년(고종 17)에 지금의 위치로 이장하였습니다.
김흥근(金興根)의 자는 기경(起卿), 호는 유관(遊觀), 시호는 충문(忠文),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이조참판 김명순(金明淳)의 아들로 형은 좌의정 김홍근(金弘根)이며 조선후기 세도정치(世道政治)의 대표적인 세력인 안동김씨의 인물 중 한 사람으로 영의정을 역임하였고 노년에 포천시 일동군 수입리에서 살았습니다.
양사언묘(楊士彦墓)는 봉분 주변에 3단으로 호석을 두르고 봉분 앞에는 묘표, 상석, 향로석, 동자석인, 망주석 등의 석물이 조성되어 있으며, 묘 바로 아래쪽에는 부인인 음성박씨(陰城朴氏)와 간성이씨(杆城李氏)의 합장묘를 따로 조성해 놓았으며 양사언(楊士彦)을 기리는 사당인 길명사(吉明祠)가 있습니다.
양사언(楊士彦)은 조선 중기 문인이며 서예가로 본관은 청주(淸州), 호는 봉래(蓬萊)로 시와 글씨에 모두 능하였고, 특히 초서와 큰 글씨에 뛰어나서 조선 전기의 4대 서예가의 하나였습니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양사언이 세상을 떠날 때 ‘飛(비)’ 자 한 자를 크게 써 놓고 우화등선하였고 지금의 묘소는 양사언의 시신이 아니라 유품만을 묻은 것이라고도 합니다.
금수정(金水亭)은 양사언의 소유였던 정자로 원래 이름은 우두정(牛頭亭)인데 이는 정자가 위치한 곳의 형상이 소 머리를 닮았기 때문이라고 하며, 기록에 따르면 건립자는 김명리(金明理)이며 소유자는 양사언(楊士彦)으로, 금수정(錦水亭) 혹은 금수정(金水亭)으로 개칭되었고 후에 안동김씨 일가에게 소유권이 돌아갔습니다.
이항복묘(李恒福墓)는 쌍분(雙墳)으로 부인 안동권씨와 함께 조성되어 있는데, 묘역의 상단에는 봉분과 묘비 및 혼유석이 자리하고 아랫단에는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망주석 1쌍 양관조복(梁冠朝服)의 문인석 1쌍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특이한 것은 문인석 앞쪽에 차양끈을 매는 연봉형(蓮峰形)의 차양석(遮陽石) 4개를 박아 놓았습니다.
묘역에서 우측으로 10여m 떨어진 곳에 둘째 부인 금성오씨(錦城吳氏) 무덤을 따로 조성하였고 묘소 아래에 영정을 모신 사당이 있으며, 사당 오른쪽에는 1652년(효종 3) 세운 신도비(神道碑)가 있습니다.
그리고 포천에는 성현들을 기리는 사당(祠堂)과 단(壇)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고운영당(孤雲影堂)은 최치원(崔致遠)을 봉사하는 사우로 1935년 경 청성사(淸城祠)로 개칭되었고, 채산사(茝山祠)는 최익현을 봉사하는 사우로 중앙에 최익현 위패와 좌측에는 최익현의 아들이자 독립운동가인 최면식(崔勉植)의 위패가 함께 봉안되어 있습니다.
운담영당(雲潭影堂)에는 김평묵, 송시열(宋時烈), 이항로, 안향(安珦), 주자(朱子) 등 5명을 배향하고 있으며 한국전쟁으로 전부 소실된 것을 1993년 8월부터 복원을 추진하여 1999년 10월 완공하였습니다.
청해사(靑海祠)는 조선의 개국공신이며 청해이씨(靑海李氏)의 시조인 이지란(李之蘭)과 이지란의 8세손 이중로(李重老)를 모시는 사당으로 1970년 포천문화원과 포천 유림이 중심이 되어 건립되었습니다.
충목단(忠穆壇)은 유응부(兪應孚)의 유허비(遺墟碑)를 비롯한 각종 기념물을 보관한 곳입니다. 비각 1동과 신위(神位)를 모신 비단(碑壇)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746년(영조 22) 단(壇)을 세우고 유허비를 세웠는데, 서원철폐령 때 훼손되었다가 1890년에 훼철된 터에 충목공의 단비를 세우고 그 옆에 이어(李淤)와 양치(楊治)의 단비를 함께 세우고 향사하였습니다.
포천 출신인 유응부는 조선시대 무인으로 평안도 절제사(節制使)를 거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정2품에 올랐으나 단종복위 사건으로 참화를 당했고 양치와 이어는 단종복위사건에 가담하였으나 화를 면한 뒤에 낙향하여 살았다고 합니다.
동음사(洞陰祠)는 김성대(金聲大), 김성발(金聲發), 김성옥(金聲玉), 김평묵 등을 배향하는 사당으로, 1831년 영평 유생의 발의로 연곡사를 창건했으나 1907년 일제가 일부를 불태웠고 다시 한국전쟁으로 모두 소실되었다가 1961년 포천 유림과 안산김씨 문중이 중심이 되어 사당을 중건하였습니다.
산앙단(山仰壇)은 김권(金權)을 기리고자 1893년 최익현, 유기일(柳基一) 등 포천의 유림이 성금을 모아 설치한 단으로, 1898년 포천 유림의 합의로 김평묵을 배향했고 1995년 유기일을 추가로 배향하였으며, 처음에는 주벽인 김권의 호를 따서 졸탄단(拙灘壇)이라고 했는데 이후 산앙단으로 개칭되었습니다.
포천 지역 불교는 고찰이 거의 없는 것이 특징인데 시기적으로 고려시대에 창건된 사찰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마저도 조선시대와 한국전쟁으로 거의 폐사되었고 현재 90여 개의 사찰이 남아있으며, 이중에 백운산 흥룡사, 왕방산 왕산사, 원통산 원통사가 전통사찰이며 그 나머지는 거의 최근에 지어진 사찰이거나 사설암자입니다.
또한 포천 지역은 역사적으로 궁예의 세력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미륵신앙(彌勒信仰)이 깊이 자리잡을 수 있었으며 삶의 애환을 새 세상에 대한 희망으로 바꾸려 했던 1688년(숙종 14) 승려 여환(呂還)의 미륵혁명운동에 영평 출신이 다수 참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포천의 민중 속에 미륵신앙이 깊이 투입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풀숲에선 필히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식수, 윈드재킷, 우비,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참가신청 안내>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랍니다(기사에 전화번호, 웹주소,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고을학교'를 찾으시면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에는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이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 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