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뇌물, 횡령, 재산 해외 도피, 범죄수익 은닉, 위증 등 혐의가 모두 유죄로 인정됐다. 25일 1심 법원 판결 내용이다. 충격을 받은 이 부회장은 즉각 항소했다.
국내 여론은 ‘삼성 총수 비리 처벌’이 지닌 상징성에 주목하는 분위기다. 반면 <파이낸셜 타임스> 등 해외 언론은 관심사가 조금 다르다. "'범죄자' 이재용이 과연 삼성 회장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 묻고 있다. 글로벌 기업 삼성의 향후 지배구조를 궁금해 한다. 경영권 승계 작업의 전망과 맞물린 질문이다.
이건희 회장 쓰러지면서 경영권 승계 작업 '급류'
실제로 문제가 복잡해졌다. 지난 2014년 5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갑작스레 쓰러졌다. 이와 함께, 삼성 경영권 승계 작업이 급류를 탔다. 말 그대로, '급류'였다. 까닭이 있다. 통념과 달리, 이 회장은 쓰러지기 전 한참 동안 경영권 승계 작업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삼성 경영권 승계 작업은, 이 회장이 1995년 이 부회장에게 61억 원을 증여하면서 시작됐다. 이듬해인 1996년, 삼성 에버랜드 전환사채(CB) 헐값 발행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2000년대 초반, 'e삼성'을 통한 지분 강화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격렬한 법적 논란을 낳았다. 2007년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을 통해 불법성이 드러났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이 회장은 경영권 승계 작업에서 손을 놓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겉으로 드러난 논란 외에 복잡한 내부 사정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봉건적인 재벌 문화에선 회장이 직접 독려하지 않는 한, 전문경영인이 승계 문제를 입에 올리기란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 회장의 와병으로, 경영권 승계 작업을 더 미룰 수 없게 됐다. 최지성 전 삼성 미래전략실장(부회장)이 법정에서 증언했듯,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줄을 대려 했던 한 이유이기도 하다. 한참동안 정체돼 있던 경영권 승계 작업을 빨리 진행하려면, 권력의 뒷배가 필요하다고 봤던 게다. 결국 온갖 무리수가 동원됐고, 이는 이 부회장을 기소하는 근거가 됐다.
"'기승전결' 가운데 '승'"까지 왔는데, 투옥
그래서 삼성 경영권 승계 작업은 어디까지 진행됐나. 재벌 지배구조 전문가인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기승전결' 가운데 '승' 정도까지 왔다"고 평가했었다.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게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멈추게 됐다. 이 부회장이 죄를 다 씻고 나야, 다음 진도를 나갈 수 있다.
이 부회장은 올해 나이가 만 49세다. 만약 5년 징역을 다 살고 나온다면, 만 54세가 된다. 이건희 회장이 경영권 승계 작업을 시작했던 1995년 당시, 이 회장의 나이가 54세였다. 실제로 이 부회장의 자녀들이 그때는 대학생이 된다. 재벌가의 관행대로라면, 경영권 승계를 준비할 나이다.
요컨대 이 부회장으로의 경영권 승계가 "'기승전결' 가운데 '승'까지" 온 상태에서, 이 부회장은 자기 자식에게 경영권을 넘길 준비도 해야 한다. 현재 투병 중인 이 회장의 건강 상태까지 고려하면, 문제는 대단히 복잡해진다.
이병철, 이건희 같은 총수는 불가능
외국 언론 입장에선 "이재용 부회장이 과연 삼성 회장이 될 수 있겠느냐"라는 질문이 어색하지 않다. 다만 우리에게 낯선 질문일 따름이다. 삼성 경영권 승계 작업이 시작된 1995년 이래, 삼성의 3세 총수는 이병철, 이건희를 잇는 제왕적 존재여야 한다는 통념이 있었다.
이런 통념에 어울리는 삼성 총수는 불가능하다. 그게 현실이다. 이 부회장은 회장이 되기 전에 범죄자가 됐다. 법 위에 군림했던 이병철, 이건희 회장의 카리스마는 포기해야 한다. 게다가 이 부회장은 만 49세가 되도록 남다른 리더십이나 성과를 보인 적도 없다. 2000년대 초반 'e삼성' 사업에 실패했다는 낙인만 선명할 뿐이다.
"삼성, '총수'의 복귀 전제하지 말고 지배구조 정립해야"
경제개혁연대가 25일 선고 직후 내놓은 논평은 그래서 주목할 만 하다. 경제개혁연대는 "이재용은 삼성그룹에 대한 경영권과 소유권에 대해 과도한 욕심을 버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횡령 배임 등으로 회사에 유무형의 손실을 초래한 당사자 이재용이 단지 이건희 회장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훗날 삼성전자 또는 삼성그룹 경영진으로 다시 복귀하는 것 또한 우리 사회가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한발 더 나아가, 경제개혁연대는 "삼성전자 및 삼성그룹의 전문경영진들은 이재용이라는 소위 '총수'의 복귀를 전제하지 말고, 총수 없는 회사 또는 그룹으로서 새로운 지배구조를 정립해 나가야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요컨대 '총수 없는 회사 또는 그룹'이 구호가 아닌 현실이 될 수 있다. 이는 삼성 지배구조를 둘러싼 논의가 완전히 새로운 바탕 위에서 진행돼야 한다는 뜻이다.
이재용 '옥중 경영', '환관 정치' 낳는다
물론, 주식시장 등에서 나도는 소문은 전혀 다른 방향이다. '총수 없는 회사 또는 그룹'을 아예 상상하지 못하는 탓이다. 일각에선 이재용 부회장이 아닌, 다른 총수가 들어서는 시나리오를 이야기한다. 이 부회장의 동생 혹은 외가가 총수 노릇을 한다는 내용인데, 전문가들은 실현 가능성을 일축한다.
또 이재용 부회장이 '옥중 경영'을 하리라는 예상도 나온다. 이는 가능성이 꽤 있다. 하지만 바람직하지 않은 방식이다. 감옥 안에 있는 이 부회장과 회사를 잇는 심부름꾼이 농간을 부릴 가능성이 높다. 총수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핑계로, 일종의 '환관 정치'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경우, 이 부회장 처벌을 낳았던 삼성의 문제가 더 심화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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