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을 앞두고 있던 4년 전 여름, 유학생활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배낭을 멨다. 그리고 무더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서 중국 전국 여행에 나섰다. 돌이켜 보면 긴 유학생활 전체보다 그 짧았던 배낭여행 기간 동안에 더 많은 추억이 남아있는 것 같다. 어쨌든 배낭여행 동안 중국의 많은 곳을 돌아다녔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많은 것을 먹었으며, 그 속에서 많은 중국을 만날 수 있었다.
기회가 되면 꼭 다시 가보고 싶은 곳들이 몇 군데 있는데, 주자이거우(九寨溝, 구채구)도 그 중 한 곳이다. 중국 대륙의 한 가운데에 위치한 주자이거우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아름다운 자연을 간직한 곳이다. 1982년에 중국의 국가급 명승지로 비준됐고, 1992년에는 유네스코의 세계자연유산에도 등록됐다.
주자이거우는 부근에 장족(藏族)이 거주하는 9개의 촌락이 있어 붙여진 이름인데, 청두(成都)에서 버스로 약 10시간 정도 걸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구불구불하고 좁은 산악도로를 장기간 타고 가야 하는 인내가 필요했지만, 그 곳은 충분히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 곳이었다. 그런 만큼 필자뿐만이 아니라 많은 한국인과 세계 각국의 여행객들이 그 곳을 찾았다.
주자이거우를 걱정하는 사람들
그런 주자이거우에 지난 8일 저녁 진도 7.0의 강진이 발생했다. 필자는 그때 해외 출장을 마치고 중국(홍콩)을 경유해서 늦은 밤 귀가하는 길이었다. 지진 소식을 듣는 순간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에 잠겼다. 일본에서 지진 체험을 통해 진도 7.0이 어느 정도 심각한 정도인지 경험한 적이 있기에 무엇보다 피해가 걱정됐다. 현지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텐데 인명피해는 없을까? 4년 전 친절하게 나를 숙소까지 안내해 준 장족 아가씨는 괜찮을까? 천혜의 비경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는 건 아닐까? 등등.
다음 날, 지진 피해 현황이 언론을 통해 조금씩 전해지기 시작했다. 부상을 당해 실려 가는 사람들, 흙탕물로 변해버린 우화하이(五花海)의 사진을 보니 가슴이 너무 아팠다. 특히 중국의 TV 뉴스 화면에 비춰진 무너진 호텔이 필자가 4년 전에 거쳐 간 곳임을 눈치 챘을 때에는 나의 일부분이 무너져 내린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그런데 이런 걱정과 슬픔은 비단 필자만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주위에서 지진 피해에 대해 진심으로 걱정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대부분 주자이거우에 갔다 온 적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유명 관광지이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다녀갔고, 자신의 추억이 남아 있던 곳의 피해를 남의 일로 여기지 않는 것 같았다.
지난해 일본 구마모토(熊本)현에서도 큰 지진이 발생하여 많은 인명, 재산 피해가 발생했었다. 그 피해 규모가 2011년 대지진에 따른 후쿠시마(福島) 원전사고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필자에게 구마모토 피해는 후쿠시마 못지않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왜냐하면 규슈에는 적지 않은 지인들이 살고 있고, 특히 구마모토는 아소산(阿蘇山)을 비롯하여 필자의 추억이 많이 남아있는 소중한 곳이기 때문이다.
한반도 전쟁을 쉽게 입에 올리는 사람들
요즘 들어, 부쩍 한반도 위기설이 자주 들려오고 있다. 물론 과거에도 한반도 위기설이 종종 제기되어 왔지만, 미국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 위기설이 '설(說)'에 그치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가 더욱 커지고 있는 것 같다. 걱정스러운 점은 북핵 문제의 핵심 당사자이면서 세계 최강의 군사대국인 미국의 대통령 입에서 전쟁을 연상시키는 발언들이 거침없이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9일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은 더 이상 미국을 위협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그들은 세계가 본 적 없는 화염과 분노(fire and fury)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며 "화염과 분노,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세계가 본 적 없는 힘(power)을 마주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발언은 즉각 전 세계로 전해졌고, 한반도는 물론이고 전 세계가 그의 발언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트럼프의 발언 이후, 미국 내에서는 북한에 대한 예방전쟁(preventive war)이 공공연하게 오르내리고 있고, 일본에서도 한반도 전쟁발발 시에 자위대가 미군을 돕는 것이 현행 헌법에 부합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 국내에서도 전문가들이 언론과 각종 회의 등을 통해 북한과의 전쟁을 공공연하게 언급하고 있다.
저들은 어떤 심리로 저렇게 쉽게 전쟁을 이야기하는 걸까? 어려운 학술적, 군사전략적 차원의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고, 주자이거우를 통해 한반도의 위기 상황을 생각해 본다.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쉽게 입에 담는 사람들은 아마도 한반도에서의 참화를 남의 일 쯤으로 여기는 사람들이지 않을까? 자신과 상관이 없으니 그 고통을 상상하고 싶지도 않고, 공감할 수도 없을 것이다.
"전쟁을 하더라도 저쪽(한반도)에서 하고, 수천 명이 죽더라도 저쪽에서 죽지 이쪽(미 본토)에서 죽지 않는다"고 말한 트럼프의 발언은 이러한 인식을 대변해 줄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한반도의 참화를 자신의 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특히 북쪽에서의 참화를 남의 일로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야 조금이라도 전쟁의 가능성이 줄어들 것 같다.
북미 속도 조절? 교류 재개로 이어져야
하지만 현실을 생각하면 막막하다. 2008년 금강산에서 남쪽 관광객 사망 사건이 발생한 이후, 수학여행으로, 가족여행으로, 또는 동네 계모임 여행으로 금강산, 개성을 가던 광경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됐다. 벌써 10년이 다 되어간다. 자연히 북쪽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에 감탄해 본 사람들, 북쪽의 '안내원 동무'와 인간적인 교감을 나눠 본 사람들, 개성공단에서 만들어진 옷을 입어 본 사람들도 점차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북쪽에서의 참화도 남의 일로 여기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지 않을까? 트럼프 행정부가 이번 달부터 모든 미국인의 북한 여행을 전면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이로 인해 북쪽과 인연을 맺어 본 미국인들이 점점 더 줄어들까봐 이 또한 걱정이다.
다행히 치킨 게임을 하던 북미가 속도를 늦추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이러한 움직임이 금강산·개성 관광과 개성공단 재개, 남북이산 가족 상봉 등으로 이어질 수 있길 간절히 바란다. 그게 전쟁 방지이자 평화와 통일로 가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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