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7일 아침 8시. 여느 때 같으면 떠날 채비를 하느라 분주할 시간인데 커튼이 내려진 채 한밤중이다. 추니의 눈두덩이 퉁퉁 부었다. 어제 너무 지치기도 했고, 이제 끝났다고 생각하니 몸이 축 처지나 보다.
고양이 세수를 하고 호텔에서 9시 전까지로 정해진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방에 들어와 다시 드러누웠다.
오후 3시. 호텔 프런트에 내려가 자전거를 기차에 싣고 이동하는 방법에 대해 알아봤다.
우리나라 동해항으로 건너가려면 이곳 히로시마에서 기차를 타고 혼슈 고원지대를 넘어 돗토리시로 가서 다시 자전거를 타고 해안선을 따라 사카이미나토항으로 이동해 크루즈를 타야 하기 때문이다.
호텔 프런트에서 알려 준 가까운 우체국을 찾아갔더니, 자전거는 취급하지 않는다며 화물운송회사 전화번호를 알려줬는데 알아보니 비용이 삼십만 원이 넘었다.
자전거를 기차에 직접 싣고 가는 방법을 찾으려고 관광안내센터에 갔더니, 기차 화물 운송 규정을 펴고 우리에게 설명을 하고 나서 자세한 것은 JR역 사무소에 가서 물어 보라고 한다. 에구, 복잡하다.
“실례합니다. 말씀 좀 여쭐게요.”
“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개찰구 안쪽에 서 있던 역무원이 다가왔다.
“저희는 한국에서 온 자전거 여행객인데요. 자전거 두 대를 기차에 싣고 가려고 합니다.”
“네, 분해해서 자전거 전용 가방에 넣으면 됩니다.”
“전용 가방이 없는데 네모진 박스에 넣으면 안 되나요?”
“그건 안 됩니다.”
“왜요?”
“규정상 안 됩니다.”
“그러면 자전거 전용 가방은 어디서 구입할 수 있나요?”
위치를 알려 주는데 정확히는 알아듣지 못했다. 그리고 팔만 원 씩 두 개면 십 육만 원정도 소요된다고 일러줬다. 가격도 비싼 편이지만 앞으로 사용할 기회가 별로 없을 것 같았다.
‘규격에 다소 맞지 않지만, 공장 출고 때 자전거를 담았던 박스에 넣어 올 테니 좀 봐주세요.’라고 튀어 나오는 말을 겨우 참았다.
‘이거 참 어쩌지?’
다음 날 아침. 자전거를 화물로 운송을 하든지, JR기차로 운송을 하든지 간에 박스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구하러 나섰다.
“실례합니다. 저희 히로시마에서 가장 큰 자전거 판매점을 찾고 있습니다.”
기차역 앞 파출소에 들어가서 물었다.
“네, 잠깐만요. 여기 한번 보시겠어요?”
벽에 붙은 지도를 가리키며 위치를 설명해줬다. 우린 그 자리에서 구글 지도에 자전거 가게의 위치를 입력했다.
“운전기사님, 이곳으로요.”
택시 기사님께 목적지를 확대한 지도를 보여줬다. 요금 팔천 백 원. 그리 멀지 않은 곳인데 엄청 비싸다.
“안녕하세요, 실례합니다만…….”
가게에 들어서자 박스 한 개가 눈에 번쩍 띄었다. 공장에서 막 가져와 아직 뜯지 않은 새 박스였다.
“저희는 한국에서 자전거 여행을 하러 이곳에 왔어요. 이제 여행을 마치고 기차에 자전거를 싣고 돌아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빈 박스 두 개를 얻으려고요.”
자전거 수리를 하고 있던 주인에게 정황을 설명했다.
“어서 오세요. 빈 박스 두 개가….”
주인 양반의 표정을 보니 그리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아참, 잠깐만요.”
주인이 무슨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갑자기 뒷문을 열고 나갔다. 우리도 주인을 뒤따랐다. 마침 환경미화원이 버리려고 내 놓은 빈 박스 한 개를 청소 차량에 싣고 있었다.
“엇! 그거 필요한데”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저런 거 필요하단 말씀이시죠?”
“네, 맞아요.”
주인은 환경미화원의 양해를 얻어 싣고 있던 박스를 다시 차에서 내렸다.
“두 개가 필요하시다고요?”
가게 안으로 다시 들어온 주인은 새 자전거를 박스를 비웠다.
“고맙습니다. 얼마입니까?”
“아뇨. 어차피 버리려고 했던 건데요, 뭐.”
박스 두 개를 각각 반으로 접어 택시를 탔다. 박스가 너무 커서 택시 앞좌석과 뒷좌석 사이를 가로지르자 운전기사가 쓴웃음을 짓는다.
곧바로 히로시마 JR기차역 역무원을 찾아갔다.
“실례합니다. 이 박스에 자전거를 넣어 돗토리시로 가려고 하는데요.”
반으로 접었던 박스를 본래의 네모난 크기로 편 채 역무원에게 보여줬다.
“안 됩니다.”
“왜요?”
“자전거 전용 가방이라야 합니다.”
어제 하던 얘기 또 반복이었다.
“이것도 자전거 전용 박스입니다. 여기 보세요. 박스에 자전거 표시가 돼 있잖아요.”
“천으로 된 동그란 자전거 전용 박스에 넣어야 합니다.”
“동그란 박스만 된다는 규정이 어디 있습니까?”
“잠깐만요.”
역무원은 두툼한 자전거 운송 규정집을 들고 나와 훑어보고 있었다. 가만히 보니 어제 관광안내센터에서 보았던 그 규정이었다.
“여기요. 이 박스 규격이 가로, 세로, 높이 모두 합해서 248cm입니다. 운송 제한 규격인 250cm미만인데 왜 안 된다는 겁니까? 동그란 박스만 된다면 이 규정은 어디에 적용되는 겁니까?” 다그치듯 따졌다.
“잠깐만 기다려 보십시오.”
고개를 갸우뚱하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간 역무원은 상사로 보이는 분과 함께 줄자를 들고 나와 박스의 가로, 세로, 높이를 측정했다. 그리고는 다시 들어가 뭔가를 협의하는 것 같았다.
한참 후, 상사로 보이는 분이 나오면서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이며 “오케이.”라며 빙그레 웃었다. 휴우.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런데 신칸센을 타려면 대합실 이층으로 올라가 건너편으로 조금 이동해야 탈 수 있는데 무거워서 어쩌죠?”
“별 걱정을 다 하시네. 그건 나중 문제고요.” 입 밖으로 튀어 나오는 말을 억지로 참았다.
‘그나저나 우리가 내일 짐 싸가지고 이곳을 통과할 때 또 엉뚱한 소리 하면 안 돼요! 지금이 10월 8일 11시 01분이에요.’ 우리는 인증 사진을 남겼다.
자전거 운송 문제가 해결되자마자 곧바로 기차 도착지인 돗토리시의 호텔 예약과 기차표 예매를 끝냈다.
그리고는 호텔에 들어와 자전거를 분해해서 박스에 넣었다. 자전거 박스 규격에 대해서 앞으로 더 이상 딴소리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은근히 걱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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