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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둥펀둥 노는' 부랑인? 그 오래된 부끄러운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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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둥펀둥 노는' 부랑인? 그 오래된 부끄러운 역사

[의제27 '시선'] '홈리스지원법'을 제정하라!

부랑인(浮浪人). 국어사전에 따르면 "일정하게 사는 곳과 하는 일이 없이 펀둥펀둥 놀면서 떠돌아다니며 난봉 짓이나 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다. 노숙인이라는 단어가 널리 쓰이기 전에는 거리에서 자거나 구걸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이 단어를 알고 있는 중장년 세대들에게 당연히 나쁜 어감을 줄 것이다.

그런데 이 단어는 지금도 우리나라 법령에 버젓이 자리 잡고 있다. 보건복지부령 중에 '부랑인 및 노숙인 보호시설 설치·운영규칙'이 있고, 거기서 부랑인이란 "일정한 주거와 생업수단 없이 상당한 기간 거리에서 배회 또는 생활하거나 그에 따라 부랑인복지시설에 입소한"(제2조1항)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다. 더구나 부랑인복지시설이 전국적으로 37군데 있으며, 그곳에는 약 7400명이 생활하고 있다. 시설당 200명이라는 얘기다. 도대체 아직도 부랑인이라는 이름이 법령에 존재할 뿐 아니라, 같은 이름의 보호시설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생활하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세계에서 유일한, 또 가장 큰 시설

복지시설은 크게 이용시설과 생활시설로 나뉜다. 지역사회복지관처럼 필요할 때마다 들러 서비스를 받는 곳을 이용시설이라 하고, 자신이나 가족의 힘으로는 생활자체가 곤란해서 아예 시설에 입소해 살아가는 곳을 생활시설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장애인시설, 노인시설, 아동시설 등이 있고 치료목적이기는 하지만 정신질환이 있는 경우는 정신요양시설이 있다. 결국 무의탁 상태의 장애인이나 노인, 아동 등은 각각의 전문시설에서 생활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매우 이상한 시설이 한 가지 더 있는데 바로 부랑인복지시설이다. 연령(노인, 아동)이나 특성(장애, 정신질환)이 아니라 부랑생활이라는 '행태'에 따른 분류다. 내가 아는 한 적어도 현대 사회복지 교과서에는 존재하지 않는 분류다. 또한 이른바 선진국에서 지금까지 이런 종류의 시설이 남아 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물론 300여 년 전 영국에서 길거리 걸인들을 수용해서 일 시키던 시절, 즉 구빈법 시대에는 이런 식의 '보호'가 당연시되기는 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오면 걸인이 되지 않도록 예방하는 데 중점을 두고, 설령 거리로 나올 처지가 되더라도 이를 각 전문분야에 맞게 보호하는 것이 규범으로 정착된다. 이에 따라 수용소식의 부랑인 보호도 그 역사를 마치게 된다. 우리나라에 부랑인이라는 이름을 전해준 일본도 2차 대전 후부터는 더 이상 부랑인 수용방식의 빈민구제 사업은 않게 된다. 단기적으로 보호가 필요할 경우, 선진국에서는 진작부터 홈리스 보호 차원으로 정책을 전환한 것이다.

그러나 소득 2만 달러 시대를 넘나드는 한국에는 부랑인이란 단어가 법령에 있는 것 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더구나 서울의 부랑인 보호시설인 <은평의 마을>은 정원이 1300명이 넘는다. 단일 복지시설로는 세계 최대 규모다. 그 외에도 수도권의 여성 부랑인복지시설인 <영보자애원>은 550명, 대구의 <희망원>은 900명 정도가 생활하고 있다.

게다가 부랑인복지시설에서 생활하는 분들 중에는 장애를 가진 경우가 62%, 65세 이상은 17%, 정신질환이 있는 경우는 18%에 달한다. 말하자면 노인, 장애, 정신요양과 같은 다른 전문시설에서 생활해야 될 분들의 상당수가 부랑인복지시설에서 계시다는 뜻이다. 도대체 왜 이렇게 뒤죽박죽되었을까?

일시보호가 아니라 수용이었던 역사

▲ 성탄절 전날 한 행사에서 나눠준 도시락을 차가운 계단에 앉아 먹고 있는 서울역 인근 노숙인들. ⓒ연합
부랑인복지시설은 법령에 따르면 일시보호시설이다. 즉, 불가피하게 단기간 스스로 생활하기 곤란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시설이라는 뜻이다. 때문에 장애, 노인, 정신질환이 있더라도 얼마간 보호한다는 취지여서 허용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부랑인복지시설에 계신 분들 중 10년 이상 생활한 경우가 42%에 달한다. 20년 이상도 13%이다. 말하자면 평생 생활하는 분들인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왜 이렇게 시설의 취지와 현실이 다른 것일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랑인복지시설의 역사를 알 필요가 있다.

해방과 6.25를 거치면서 우리는 수많은 고아, 걸인들을 경험했다. 이들을 제대로 보호할 시설과 시스템을 갖추는 건 불가능했고, 우선 '먹이고, 재우는' 수준에서라도 보호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부랑인복지시설들이 출현하는 계기였다. 그 뒤 산업근대화 과정에서 탈락된 가족해체 빈곤층들도 결국 부랑인복지시설의 신세를 지지 않을 수 없었다. 거리의 규율과 기강을 강조하던 군사정권 시절, 부랑인복지시설은 보호 겸 수용시설이었다. 심지어 88올림픽을 앞두고는 대규모 부랑인시설을 수도권에 추가로 짓기도 했다. 그것도 완전히 감옥구조로 지었다. 작은 창의 외벽이 둘러쳐지고, 방사형으로 모든 방을 볼 수 있는 그런 구조 말이다. 그러다 보니 이른바 인권침해 사례가 다반사였다. 1987년의 형제복지원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후 부랑인복지시설은 그야말로 '복지'를 중심에 놓는 어려운 길을 걷게 된다. 강제입소 방식이 없어진 것은 물론이고 대문은 언제나 열어두게 해 두었다. 재활프로그램이나 사회복귀 프로그램이 본격 시행된 것도 이 무렵부터다. 더구나 1998년 노숙인들이 거리로 몰려나오면서, 부랑인복지시설도 새롭게 조명을 받는다. 노숙인과 부랑인이 모두 취약한 사회안전망 속에서 오랜 빈곤과 가족해체를 겪으면서 형성되었다는 점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노숙인 문제는 비교적 드러내 놓고 걱정하고 대안을 고민하게 된 반면, 부랑인복지시설은 여전히 뒷켠으로 밀려나 있다. 사회복지 생활시설 중에는 가장 낮은 비용으로 많은 인원을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참여정부는 이런 문제를 인정하고 부랑인복지시설을 각각의 특성에 맞는 소규모 전문시설로 전환시키고자 했지만 고작 3개 시설을 바꾸고는 더 이상 나가지 못했다. 돈도 돈이지만, 이미 부랑인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는 시설을 보다 전문적이고 지역사회에 개방적인 시설로 바꾸는 게 정치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이다. 현 정부는 아예 그럴 계획조차 없다.

홈리스지원법 제정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지식인들도, 심지어 사회정책을 좀 안다는 사람들도 부랑인복지시설이라는 곳이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더구나 세계 최대의 시설에, 한 방에 서른 명이 넘는 사람들이 생활하고 있다는 것도 모른다. 사회복지 종사자들의 처우는 각종 시설 중에서 가장 낮으며, 3교대는커녕 2교대도 못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부랑인 복지라지만 그분들을 돌보는 사회복지사들은 수용소 같은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가장 많은 보호대상자를, 그것도 소문나지 않게 감춰두는 일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부랑인복지시설을 제자리로 돌려야 한다. 별도의 전문시설로 전환하고 더 나아가 지역사회와 함께 재활·자활시키는 것이 목표지만, 그 전에라도 부랑인이라는 이름으로 감춰두는 이 오랜 관행을 그쳐야 한다. 그것은 인권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자존심 문제이다. 광범위하게 누적된 단신 빈곤층 문제의 연장선상에서 이 문제를 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 문제를 드러내 놓고 이야기해야 한다. 그래야 비용 현실화도 가능하다. 또 10년 정도 기간 내에 부랑인복지시설을 중소규모 전문시설로 전환하는 목표를 세울 수 있다.

이를 위한 논의가 일어나고 있다. 가칭 홈리스지원법 제정 운동이 그것이다. 노숙인, 부랑인을 구별하는 현재의 사회적 차별을 넘어서서, 넓은 의미의 노숙인 발생을 예방하고 사회복귀가 가능하도록 지원하는 방법을 찾자는 것이다. 일본도 2002년 홈리스지원법을 제정한 이후 홈리스 보호수준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영국, 미국 모두 법적 근거를 가지고 홈리스의 보호와 자활을 지원하고 있다. 1만 명이 넘게 생활하는 부랑인복지시설, 노숙인 쉼터들을 그저 일시보호라는 명목으로 감춰둘 수는 없는 것이다. 응급보호, 일시보호, 장기보호, 주거제공, 취업지원 등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일련의 과정으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법적 근거를 가진 체계적 지원이 필요하다. 더구나 부랑인, 노숙인을 지방정부가 기피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전국적인 기준과 규범이 있어야 한다.

부랑인복지시설은 우리나라 사회복지 수준의 상징이다. 전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구빈법 시대의 수용소를 아직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수치이다. 당장 없앨 수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 존재를 공론화해야 한다. 용어야 어떻든 홈리스지원법을 통해 그 장래를 새롭게 설계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문제를 회피해서는 복지국가도 불가능하다. 보편적 복지도 중요하지만 수용소 복지체제를 감춰두면서는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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