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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장아장' 타고 장에 가던 날, 팥죽으로 배부르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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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장아장' 타고 장에 가던 날, 팥죽으로 배부르던 날

[섬진강변 두계마을 이야기] 장 나들이

어쩌다 달력을 보니 오늘이 장날이다. 아직 농사꾼이 못되어서 일에 매이지 않으니 장에나 가볼까. 아침에 콩밭 한 고랑 풀을 맸으니 오늘 일은 한 셈이다. 딱히 살 것은 없지만 날도 비가 보슬 꾸물, 기분도 꾸물해서 장 바람이나 쐬어보려는 요량이다.


장에 가는데 뭘 타고 간다? 읍내까지 십 킬로. 나의 '아장아장'(다마스)이 있긴 있다. 하지만 우르르 혼자 몰고 가기에는 아깝다. 군내버스도 다니긴 한다. 다마스를 몰고 가나, 버스를 타고 가나 드는 돈은 똑같다. 그래도 심심풀이 나들이 하면서 차를 모는 것이 마음에 안 든다.


버스를 탈까. 버스 타려면 20분 정도 걸어 나가야 한다. 동네를 지나고 개울 따라 논 따라 내려가다가 섬진강을 건너서 언덕 위 버스정류장까지 걷는 것인데 나는 이 그림 같은 길을 걸어가는 것이 좋으니 문제없다. 다만 찻길 옆 정류장에서 버스가 올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이 일이라면 일이다.


'에라 누구 장에 갈 사람이 있으면 다마스를 몰고 가고 아무도 없으면 버스 타고 가야지.'


작정을 하고 마을회관으로 가본다. 마침 탑골댁 할머니가 혼자 앉아있다.


"장에 안 가실라요?"
"나 빗지락 살 것 있어도 통 못 샀는디, 가볼까."
"또 누가 안 가실랑가요."
"통 사람이 없어. 다 일하러 나가 불고. 그럼 좀 지다려."


할머니는 옷 갈아입고 온다고 총총 집으로 향하신다. 지팡이 짚고 꼬부랑 걸음으로.

탑골댁 할머니를 태우고 동네를 나서는데 누군가의 머리 위에 얹힌 큼직한 키가 걸어온다.

"장에 갔다 오셔요?"
"잉."


키 밑에서 몸이 반이나 꼬부라진 채 대답하는 이는 전 이장댁 옆에 사는 그의 작은어머니다. 에구 아깝다. 미리 알았으면 장에 같이 갈 것을.


"얼마 줬소?"


탑골댁 할머니가 물어본다.

"육만 원. 작은 놈은 삼만 원인디 힘이 없드만. 이 놈이 짱짱해."
"그라면 육만 원은 줘야해."


어렸을 때 보고는 그동안 쓴 일도, 본 일도 없어서 이제는 유물이 된 줄 알았는데 아직도 장에 가서 새 키를 사서 머리에 이고 오는 것이 신기하다. 하기야 도시에서는 쓸 일도 볼 일도 없는 낫을 나도 여기에 와서 세 개나 샀다. 촌에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물건이다.


"여가 장이 있었을 때는 좋았는디."

읍내로 들어서는 커브를 돌자 할머니가 옛날 장터를 가리킨다.


"새로 생긴 데는 넘의 장 같어."


몇 년 전만해도 옛 장터에 장이 선 것을 봤는데 그 사이 곡성장을 옮겼다. 큰 길 건너 넓은 장소로 옮겨 주차장도 만들고 '섬진강문'이라는 현판이 붙은 근사한 문도 만들고 그 안에는 넓은 판을 벌려놓았다.

▲ ⓒ김영희

그런데 어쩐지 짜임새가 없어 좀 어수선하고 횡한 느낌이 없지 않기는 하다. 이왕 돈을 들여 새 장터를 만들려면 갓 쪽으로 빙 둘러 가게들이 들어서고 가운데 공지가 일종의 작은 광장이 되는 그런 형태, 광장에는 나무도 있고 화초도 있고 쉴 곳도 있고 간이 먹거리를 파는 곳이 있고 때로는 품바같은 작은 공연도 할 수 있는 곳이 있어 흥청대는 분위기도 나는, 그런 형태의 장을 만들 수는 없을까. 공간 크기를 보면 충분히 그렇게 할 수도 있는데... 돈 들인 것으로 보아도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는데.... 아쉽다. 그래도 이나마도 전통장이라고 관광객들이 오고 도시냄새 풍기는 차림들이 제법 눈에 띈다.


▲ ⓒ김영희

탑골할머니의 빗지락을 먼저 사고 나자, 장터 가운데 팥죽집에서 팥죽 한 그릇 먹었으면 딱 좋겠다.

"할머니, 팥죽 한 그릇씩 먹읍시다. 제가 사드릴께요."
"집이 먹어. 나는 점심 금방 먹어서 배불러. 타올이나 사야 쓰겄다."
"그럼 이리로 오셔요 잉."


▲ ⓒ김영희

나는 과일 몇 가지 사고 나서 팥죽집 의자에 앉아 팥칼국수 한 그릇을 시킨다. 사실 나도 배가 고픈 것은 아니다. 반 그릇을 덜어놓고 먹고 있자 할머니가 오더니 검정비닐 속을 보여준다. 이태리타올 세 개. 삶은 옥수수 세 개가 든 봉지 하나.

"밭에 옥수수 없어요? "
"아직 안 익었어. 나 하나 먹고 집이 두개 먹어."

아마 차 탄 값으로 나 주려고 일부러 삶은 옥수수를 산 모양이다.

"이것 하나 가질라요? 내가 이것을 언제 다 쓰겄어?"
"저는 타올 안쓴디요. 아니 집에 많이 있어요."
"그래? "
"우선 이 팥죽 반 그릇 잡수셔요. 얼마 안된께요."
"이것도 많구만. 나 배부른디."


나는 붕어빵도 이천원어치 샀다. 이거면 동네사람들한테 인심을 쓸 수 있겠다.

아니나 다를까 돌아오는 길, 동네 초입에 물가상집 아저씨와 종채네 아저씨가 앉아있다. 노인 일자리 사업하느라 두 분이 녹색 조끼를 입고 마을을 지키기라도 하는 듯 늘 그곳에 있는 것이다. 나는 얼른 차에서 내려 붕어빵을 하나씩 드린다.

"뭣을 이런 것을 다 주요."
"아. 아무것도 아니어요. 장에 갔다 오니라고요."
"잘묵으께요 잉."

또 인심 쓸 사람 없나? 길에는 아무도 안 보인다. 날은 그 새 해가 나서 다들 논으로 밭으로 하우스로 간 모양이다. 그래도 줄 사람은 있다. 마을회관 사무장도 주고 그 뒤에 혼자 사는 송정댁할머니에게 갖다 드리면 된다.

"오늘 나땜시 돈만 썼네. 팥죽 사느라고."

"뭣을요, 제가 다 묵었는디요. 요 붕어빵도 한나 잡수셔요 잉."
"나 배부른디."


날이 개서 해가 쨍 난다. 장 나들이 한 번 잘 했다.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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