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의 '맥덕'들
맥주는 기원전 4000년경 수메르인들이 오랫동안 발효시킨 빵 반죽에서 흘러나온 액체를 맛본 후 여기에서 힌트를 얻어 만들기 시작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후 맥주는 수메르인들에 의해 주변 국가로 퍼져나갔는데, 흥미롭게도 이집트는 법전에 맥주에 관한 조항을 넣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원칙과 함께 최초의 성문법으로 알려진 '함무라비(Hammurabi)' 법전에는 맥주를 사고팔 때는 은이 아닌 곡물로만 지불해야 한다, 맥주의 분량을 속여 팔면 물에 던져버리는 엄벌에 처한다, 맥주에 물을 타서 팔면 그 술을 모두 마시는 벌에 처한다 등이 기록돼 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맥주를 즐겨 마셨으면, 이런 조항까지 만들어 법전에 넣었을까 싶다. 이 정도면 '맥덕(맥주 덕후)'의 나라로 불러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후대의 맥덕들이 그 당시 맥주에 빠질 일은 그리 많지 않을 듯하다. 그 당시 맥주는 빵을 잘라 넣어 발효시키는 방식이라 지금의 맥주보다는 막걸리에 더 가까울 정도로 걸쭉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수메르인들의 맥주에는 홉이 없었다.
전 세계적으로도 인기가 높은 맥주는 그 종류도 엄청나다. 독일만 하더라도 약 5000종을 만든다. 국내 대형마트만 가더라도 브랜드, 색깔, 도수, 맛 등이 다양한 국내외의 수많은 맥주들이 선보이고 있다. 심지어 직접 만들어 먹기도 한다.
이토록 다양한 맥주에도 공통점은 있다. 보리, 물, 효모, 그리고 홉이 기본적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보리로 만든 맥아가 맥주의 달달하고 진하고 깊은 맛을 낸다면 맥주 특유의 쌉쌀한 맛과 향, 크림이 풍부한 거품 등 맥주 하면 생각나는 것들을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이 홉이다. 또 홉은 맥주의 부패를 방지해 보존성을 높여주기도 한다.
'맥주의 영혼' 홉
그렇다고 하여 호프(hof)가 홉(hop)에서 유래한 것은 아니다. 호프는 마당, 혹은 정원을 뜻하는 독일어로, 원래는 독일 바이에른 지방에 있는 '호프브로이하우스(hofbruhaus)'라는 옛 궁정 양조장에서 유래된 말이다.
맥주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는 100년이 조금 넘는다. 1700년대 출간된 '산림경제'에 보리쌀로 만든 모미주에 대한 기록이 있지만, 원료나 만드는 방식이 맥주와는 다르다. 홉도 들어가지 않았고 맥주보다는 청주에 더 가깝다. 우리가 익히 아는 맥주는 1880년대 개항되면서 국내에 첫선을 보였다. 이어 1933년 일본인에 의해 조선맥주주식회사가 처음으로 설립되었는데, 당시에는 부유층이나 상류층만 마실 수 있는 고급술이었다고 한다. 맥주회사를 설립한 일본은 개마고원 부근에 홉을 재배해 맥주 원료로 사용했을 정도다. 그 양이 많아 일부 홉은 일본으로 보내기도 했다. 현재도 북한은 양강도 지역을 중심으로 홉 농사를 이어가고 있다. 북한 홉은 그 품질이 우수해 홉 수출량이 세계 10위 안에 들 정도다.
남한에도 홉이 재배된 적 있다. 1960년대 맥주회사들이 맥주의 국산화를 내세우며 국내 농가와 계약재배를 맺고 보리와 홉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맥주용 보리와 홉 자급률은 100퍼센트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농산물 수입 개방과 비용 절감을 내세운 맥주회사들이 국내 생산 대신 수입을 선택하면서 자급률 100퍼센트에 달하던 보리와 홉 생산량은 곤두박질쳤고 홉은 멸종되다시피 국내에서 그 모습을 감췄다.
사라졌던 홉을 다시 꽃 피우다
이 땅에서 사라졌던 홉이 강원도 한 산골 마을에서 다시 꽃 피우고 있다. 강원도 홍천군 서석면 용오름마을이다. 홉은 줄을 타고 2미터 넘게 자랐다. 사방으로 뻗은 초록 잎들 사이로 벌써 꽃들이 피었다. 언뜻 보면 노란색을 띤 연두색 솔방울 모양을 하고 있는데 홉 암꽃이다. 연꽃잎 벗기듯 겹겹이 달린 꽃잎들을 하나씩 떼어내면 노란색 꽃가루를 머금고 있다. 입안에 넣으니 뒷맛이 맥주의 그 맛과 같다.
마을에 홉의 불씨를 지핀 건 3년 전 이 마을로 들어온 정운희 씨다. 청년사업가로 성공한 그였지만, 자유로운 전원생활을 꿈꾸며 사업을 접고 이곳 강원도 산골 마을로 들어왔다. 하지만 산골마을 생활은 쉽지 않았다. "텃세가 심했어요. 이곳 주민들은 대부분 농민들이에요. 자신들은 일하느라 힘들게 죽겠는데, 쉽게 돈 버는 사람으로 저를 오해하시더라고요." 마을을 떠날까도 싶었지만, 자존심이 그를 붙잡았다. "마을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었어요. 내가 아니라 우리가 잘 되는 일을 함께한다면 인정받을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농사로 대박 날 수 있는 작물이 뭐가 있을까 찾기 시작했죠." 그의 눈에 띈 것이 바로 홉이다. 개정된 주세법으로 수제맥주 시장은 더 활성화될 것이라 홉은 사업성이 있었다. 더군다나 홉은 이 마을에서 재배됐던 작물이었다. 이건 운명이었다!
그는 곧장 연충흠 씨를 찾았다. 연 씨는 이 마을 토박이로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37년을 이곳에서 농사를 지어온 터라 마을에서 '농사 박사'로 통한다. 물론 홉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1980년대에 많이 지었어요. 이 동네에서 홉 농사 안 지은 사람은 거의 없었을 거예요. 한번 자라면 10미터까지도 자라는데 낫으로 줄기를 뚝뚝 잘라서 홉 꽃을 땄어요. 그 꽃을 말려서 맥주 회사에 납품했는데 우리는 호프라고 불렀죠." 주민들은 홉 꽃을 쌀독에 넣기도 했는데, 묵은 쌀 냄새도 나지 않고 벌레가 꼬이지 않았다고 한다.
사업은 자신이 맡겠으니 홉 재배를 맡아달라는 정 씨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였지만, 사라진 홉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주민들 모두 홉에 대한 기억은 있지만 갖고 있는 사람들은 없었다. 씨앗이 아니라 뿌리로 번식하는데다 맥주회사와의 계약재배가 끊기자 홉 대신 다른 작물을 심기 위해 밭을 갈아엎고 제초제까지 뿌려가며 홉의 흔적을 지웠다. 다행히 20년 전 굴착기로 갈아엎은 홉 밭 바로 옆 산벼랑에서 홉 몇 그루를 발견할 수 있었다. 20년을 야생에서 홀로 살아남은 홉이었다.
연 씨는 예전 기억을 떠올려 홉을 번식시켰고, 다행히 2년 연속 탐스러운 꽃을 피우고 있다. 아직은 시험재배인 탓에 재배면적도 적고 상용화하기도 이르지만 몇 년 안에 홉과 보리 등 마을 주민들이 직접 재배한 농산물로 100퍼센트 국산 맥주를 만든다는 계획이다. "청정한 곳에서 키운 보리와 홉, 순박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맥주죠. 그것이 우리가 만들 맥주의 정신입니다"라고 연 씨는 자신감을 내비쳤다.
마을의 희망을 꽃 피우다
본격적인 홉 재배에 앞서 정 씨는 마을주민들과 '용오름맥주마을협동조합'을 만들고 문화관광부가 지원하는 관광두레 사업도 진행하면서 홉과 마을을 알리고 있다. 이들의 이야기에 관광객이 늘어나고 덩달아 마을주민들은 부수입도 생겼다. 맥주뿐만 아니라 홉을 이용한 화장품 등 다양한 상품을 구상하고 조만간 출시할 계획이다. 홉의 쓰임새가 다양할수록 홉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고 결국 마을에 이득이 될 것이라 기대한다.
이들에게 홉 꽃은 단순히 맥주 원료가 아니다. 마을주민들을 웃게 할 희망의 꽃이다. 한여름 연둣빛 홉 꽃이 물들어가는 산골 마을에서 미리 잔을 채워본다. 이들의 꿈과 앞으로 마실 나의 맥주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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