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게이츠(PEARLY GATES)' 브랜드로 유명한 크리스F&C(옛 크리스패션)가 '갑질' 시비에 휘말렸다. 국내 골프웨어 업계 1위 업체다. 크리스F&C는 지난해 말 하도급법 위반으로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과징금을 부과 받았었다.
협력업체가 샘플 만든 비용, 왜 안 주나
이번에는 이른바 '샘플비' 지급을 놓고 문제가 생겼다. 크리스F&C는 과거 협력업체에게 견본(샘플) 제작을 맡기면서 비용(샘플비)을 주지 않았다. 협력업체는 4년간 거래하며 못 받은 샘플비가 약 1억9000만 원이라고 주장한다. 크리스F&C 측은 샘플비 명목으로 비용을 따로 지급하지 않는 게 의류업계 관행이라고 한다. 협력업체에 지급한 납품 대금에 샘플비가 포함돼 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이는 설득력이 약하다. 제일모직 등 상당수 의류업체가 협력업체에게 샘플비를 지급해 왔다. 이 협력업체는 제일모직과도 거래했었다.
협력업체가 샘플비를 못 받으면서도 크리스F&C와 거래를 한 건, 미래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그런 식으로 관계를 유지하면, 언젠가 대규모 주문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다. 이 협력업체는 결국 문을 닫았다. 그리고 최근, 크리스F&C를 공정거래위원회에 제소했다.
협력업체가 관행적으로 부담한 비용
공정거래위원회의 움직임과 맞물려 눈길을 끄는 사건이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최근 "중소사업자들이 더 작은 영세사업자에 불공정 행위를 하면서 정부에 대기업의 '갑질'로부터 무조건적인 보호를 요청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말했다. "하도급법을 위반해 제재를 받은 사업자의 약 79%가 중소사업자"라고도 했다. 중견기업, 중소기업도 협력업체와 투명하고 공정한 거래 관행을 만들려 노력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협력업체에 샘플비를 주지 않는 게 관행"이라는 크리스F&C 측 주장이 꼭 틀린 건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 제일모직, LF(LG패션) 등 대기업들은 샘플비를 지급한다. 그러나 상당수 중견, 중소 의류 업체는 샘플비를 지급하지 않았다. 이번 사건에 대해 의류업계의 관심이 쏠린 이유다.
협력업체가 관행적으로 부담한 비용을 투명하게 정산하는 관행이 정착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소규모 샘플 제작 비용을 매번 정확하게 치르는 관행이 있다면, 협력업체가 대규모 추가 주문을 보장받지 않아도 손해가 아니다. 발주업체가 대규모 추가 주문을 다른 업체에 해도, 덜 억울한 구조다.
반면, 당장 나간 샘플 제작 비용을 미래의 거래에서 보상받는 구조에선 갈등이 필연이다. 이런 구조에서 발주업체가 대규모 추가 주문을 다른 업체에 한다면, 초기 샘플을 만들었던 업체는 반발할 수밖에 없다. 이번 사건이 이런 경우다.
돈 안 받고 샘플 만들어준 이유?
박해순 씨는 의류 임가공 업체 에스더를 경영하던 지난 2011년, 크리스F&C와 거래를 시작했다. 과거 숙녀복 임가공 경험이 있는 박 씨는 골프웨어 시장이 빠르게 성장한다는 말을 듣고 크리스F&C 관계자를 만났다.
크리스F&C 관계자는 종종 소규모 물량을 주문하며 샘플 제작도 함께 맡겼다. 박 씨의 회사인 에스더는 이른바 CMT(Cut, Make, Trim) 업체다. 원자재(원단)는 발주 업체에서 받고, 부자재(단추, 지퍼 등)는 발주 업체가 지정한 회사로부터 구입한다.
박 씨는 소규모 물량 샘플을 만드는 과정에서 만만치 않은 비용과 수고가 들었다고 주장했다. 기존에 만들던 걸 추가하는 경우와 달리, 새로운 공정이 필요하다는 게다. 박 씨는 크리스F&C 관계자가 다른 임가공 업체가 제작을 거부한 샘플을 자기네 회사에게 만들라고 했다고 여긴다.
그렇다면 박 씨도 거부하면 될 것 아닌가. 박 씨 역시 '관행'을 믿었다. 샘플을 만든 업체가 대규모 주문을 먼저 챙기는 게 박 씨가 믿는 '관행'이다. 크리스F&C 관계자 역시 비슷한 언질을 했다고 했다.
그러나 3년 반이 지나도록, 박 씨가 원하는 규모의 추가 주문은 없었다. 박 씨 입장에선 일종의 '희망고문'을 당한 셈이었다. 이 대목에선 크리스F&C 측과 입장이 엇갈린다. 그 기간 동안 크리스F&C와 박 씨의 회사 사이의 총 거래금액은 약 19억4515만 원이다. 이 정도면 적은 거래 규모가 아니라는 게 크리스F&C 측 입장이다.
박 씨는 2014년 초 크리스F&C 관계자에게 거세게 항의했다. 관계가 틀어졌고, 박 씨는 회사를 접었다. 손해를 무릅쓴 결정이었다. 그 뒤부터 박 씨는 캐나다에서 머문다. 그리고 한국 내 법무법인을 통해 크리스F&C 측에게 샘플비 지급 등을 요구했다. 박 씨는 "크리스F&C 관계자의 '갑질'에 농락당했다"고 말했다.
크리스F&C "협력업체에 손해 끼치지 않았다"
크리스F&C 측 입장은 완전히 다르다. 샘플비 명목으로 지급한 돈은 없지만, 납품 대금에 반영돼 있으므로 협력업체가 부당한 손해를 입은 건 아니라고 했다. 또 박 씨 측이 주장하는 샘플비 규모가 턱없이 부풀려져 있다고도 했다. 아울러 크리스F&C 측은 박 씨의 회사에 충분한 물량을 주문했다고 밝혔다. 예컨대 박 씨의 회사가 샘플을 만들지 않은 제품에 대해서 임가공 제작 주문을 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아울러 크리스F&C 측은 '갑질'이라는 표현에 대해선 완강히 거부했다. 박 씨 측이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갑질'을 단속하는 분위기에 편승해서 크리스F&C 측을 공격한다고도 했다.
박 씨는 크리스F&C 측이 초기 샘플 제작 및 소규모 생산 단계에선 자기네 회사에 주문하고, 막상 대량 생산 단계가 되면 개성공단 등 인건비가 파격적으로 싼 지역 업체에 임가공 주문을 했다고 주장한다. 반면, 크리스F&C 관계자는 이런 주장이 거짓이라고 말했다. 크리스F&C의 거래 기록을 살펴보면, 일치하는 사례가 없다는 게다.
미지급금, 폐업 회사라서 줄 수 없다?
다만 크리스F&C가 얼마 전까지 하도급법을 위반했던 건 사실이다. 지난해 말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크리스F&C(당시 크리스패션)는 2014년 1월 1일부터 2016년 2월 29일까지 협력업체 134곳과 거래하며 하도급대금 691억2140만8000원의 대부분인 679억4961만4000원을 어음으로 지급했다. 그러나 어음할인료 6억2462만 원을 주지 않았다. 하도급 대금을 어음으로 지급하는 경우 납품을 받고 60일이 지난 뒤부터 어음 만기일까지의 기간에 해당하는 할인료를 연 7.5%로 계산해 지급해야 한다. 또 협력업체 4곳으로부터 납품을 받은 지 60일이 지나서야 하도급대금 4189만5000원을 지급하면서 초과 기간에 대한 지연이자 56만5000원을 지급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공정거래위원회는 크리스F&C에게 시정 명령과 함께 과징금 5억1100만 원을 부과했다.
문제가 된 기간 동안 박 씨의 업체도 크리스F&C와 거래 했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시정 명령을 했으므로, 박 씨 역시 크리스F&C 측에게 어음 할인료 지급을 요구했다. 하지만 아직 받지 못했다. 박 씨의 회사가 폐업했다는 이유로 크리스F&C 측이 지급을 거부했다는 게 박 씨 측 주장이다. 크리스F&C 관계자는 "공정위 제소 등 법적 절차가 마무리된 뒤 지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모호한 관행, 투명한 계약으로 대체해야
이번 분쟁을 지켜본 다른 의류업체 관계자는 "크리스F&C와 박 씨의 업체 입장이 모두 이해가 된다"고 말했다. 양 쪽 모두 나름의 관행을 따랐을 뿐이라는 게다. 크리스F&C는 중소기업의 관행대로 협력업체와 거래했다. 박 씨의 업체 역시 샘플을 만들어주면 대규모 주문이 뒤따른다는 관행을 믿었다.
이 같은 모호한 관행이 투명한 거래 계약으로 대체돼야 한다는 지적에 대해선 양 쪽 모두 동의했다. 크리스F&C 관계자 역시 "이번 일을 계기로, 소소한 비용도 정확하게 반영하는 거래 관행이 생기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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