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의 밤거리
9월 28일. 히코네시 루트인 호텔 1층에 보관했던 자전거를 꺼내 가방 여섯 개를 나눠 싣고, 추니는 ‘수상한 여행’ 깃발을 달았다. 핸들에 나란히 꽂은 한·중·일 국기가 바람에 펄럭이고, 호텔 종업원들은 신기한 듯 지켜보고 서 있었다.
얼굴에 선크림을 바르고 버프로 가렸다. 헬멧 조임줄 틈새로 고글을 끼워 넣고 체인에 기름을 둘렀다.
“하나, 둘, 셋, 넷.”
구호에 맞춰 허리와 목, 발목을 좌우로 돌렸다. 스마트폰을 핸들 거치대에 올려놓고 구글 지도를 열어 오늘의 코스를 살폈다. 늘 그렇듯이 준비하는 데만 그럭저럭 한 시간이 걸린다.
교토까지 산악과 해안 사이에 놓인 철로를 따라 달렸다. 벌써 벼를 베고, 과수를 수확하는 걸 보니 가을의 문턱에 접어든 느낌이다.
시골이지만 들르는 곳마다 환경이 깨끗하고 정연하다. 비록 짧은 여행 기간 동안 일면을 본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지방이 균형 있게 발전하는 모습이 부럽다.
‘교토의 부엌’으로, 4백 년 전통 시장으로 불리는 니시키 시장을 찾았다. 니시키텐만구에서 미부로 이어지는 2km, 폭 4m의 좁은 골목에 예쁘게 포장된 떡, 장아찌, 생선회, 어묵, 전통술, 꼬치구이, 그리고 시식거리도 많았다.
그런데 가격이 비싸고, 진열된 상품이 여느 백화점이나 다를 바 없이 세련돼 보여 흔히 흙냄새 물씬 풍기는 그런 재래시장은 아니었다.
교토의 밤. 기온 거리를 찾아 나섰다. 고색창연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시조도리를 중심으로 전통 공예품과 과자 판매점, 찻집이 즐비했다. 관광객들로 가득 차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전통 요릿집이 밀집해 있는 1km 남짓한 ‘하나미코지’는 집집마다 동그란 등을 달아 놓아 고풍스러움을 더해 주고 있었다.
옛 모습이 그대로 잘 보존된 가옥에서 술과 음식을 팔고 있었는데 전통 의상인 기모노를 입은 여성들이 총총걸음으로 사라지는 검은 골목 끄트머리에 유난히도 붉은 둥근달이 떠올랐다.
9월 30일. 오사카성을 찾아갔다. 16세기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한 후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10만 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지은 성이다.
처음엔 금박을 입혀 호화로운 모습이었는데 소실과 재건을 거쳐 지금의 건물은 1931년에 콘크리트로 복원된 것이라고 한다.
주탑은 천수각이라고 하는 높이 55m, 지상 8층의 누각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성곽 안으로 들어갔는데 보관할 곳이 마땅치 않아 누각 꼭대기는 올라가지 못했다.
10월 1일 오전 10시. 오사카에서 고베로 떠났다. 오사카 평야 한가운데를 흐르는 요도강 다리를 건넜다. 태풍이 다가온다는 소식을 알고 있는 듯 가마우지들이 강가에 근심스레 떼 지어 앉아 있었다.
조금 내리다 말겠지 하던 보슬비가 점점 굵어져 우비를 안 입고 버티다가 속옷까지 젖었다. 우비를 가지런히 접으며 안장에 올랐는데 곧 미끄러져 펄럭거리고 무릎에 휘감겨 아래 단추 두 개는 열어 놨다.
스마트폰을 비닐봉지에 감싸서 핸들 거치대에 올려놓았는데 습기 찬 비닐이 휴대폰 화면에 닿으면서 터치 기능을 하는 바람에 화면이 제멋대로 바뀌었다.
스마트폰을 가방에 넣고 아예 도로 이정표를 보면서 달렸다. 마침 작은 식당이 눈에 띄어 따끈한 우동으로 몸을 녹였다.
오후 1시. 비가 멈춰 식당을 나왔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또 쏟아지기 시작했다. 점차 빗줄기는 거세지고 아스팔트는 개울로 바뀌고 우리는 물속을 달렸다.
핸들 가까이 가슴을 대고 강한 바람의 저항을 줄여 보지만 좀처럼 속력이 나질 않는다.
“이 정도 비는 괜찮아.”
추니가 뒤에서 용기를 낸다. 광장 분수대를 들락거리는 애들처럼 즐겁다.
해 저물어 고베 호텔에 도착해 우비를 벗어 빗물을 툭툭 털어냈다.
“여기요. 이걸로 좀 닦으십시오.”
호텔 여직원이 얼른 수건을 건네주며 얼굴을 닦으란다. 마치 물에 빠진 쥐 같은 행색이 불쌍해 보였던 모양이다.
“체크인 해야죠? 자전거 보관 장소는 어디입니까? 짐을 풀어야 하는데요.”
“여기 잠깐만 앉아서 쉬셨다가 천천히…….”
우리가 부산스럽게 서두르자 의자를 가져와 우선 편안히 앉아서 쉬란다.
고베에 대해 아는 거라곤 기껏해야 20년 전 대지진으로 수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도시 전체가 파괴되었던 곳 정도다.
오사카에서 고베까지 차로 몇 시간이 걸리고, 몇 번 국도를 타야 하고, 인구가 몇 명이고, 볼거리는 뭐가 있는지 제대로 모르고 이곳에 왔다.
하지만 여행은 미리 다 알고 가면 다소 밍밍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여행은 그야말로 예상치 않았던 상황과 부딪쳐 후회도 하고, 작은 기쁨에 놀라면서 풋풋한 여정이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인연, 페이스북 친구
10월 2일. 오늘은 고베에서 희메지로 간다. 어제 일본에 사는 페이스북 친구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우리나라 광양 출신인데 어릴 적 일본으로 이민을 왔단다.
일본 아카시라는 곳에 살고 있는데 지나가다가 꼭 연락을 달라고 했다.
아카시?
지도를 펴 보니 희메지로 가는 길에 아카시를 지난다. 오늘 아침에 출발하며 메시지를 보냈는데 조금 전에 답신이 왔다.
“지나다가 점심 식사를 꼭 같이 하고 가세요. 연락 기다리겠습니다.”라고.
해안선 따라 남서쪽으로 쭈욱 달렸다. 하필 공사 구간에 막혀 되돌아 나와 우회 도로를 달리느라 약속 시간에 늦을까 봐 허둥댔다.
김종희 님. 페이스북 이름은 ‘Chie Kaetsu’.
12시 10분 전, 아카시성 후문에 도착해 서둘러 반대쪽 정문으로 돌아가다가 우산 들고 종종걸음 하는 중년 여성을 만났다.
“반가워요. 이렇게 만나다니.”
“어서 오세요. 이렇게 먼 길을…….”
마치 초등학교 동창생처럼 스스럼없다.
예약한 점심 식사 장소에 도착하니, 손님이 많아 잠시 기다리게 되었다. 1시 이후에 가능하다고 해서 우선 자전거를 공용 주차장에 보관하고 기다리는 동안 차를 마시기로 했다. 바다가 내다보이는 예쁜 찻집이었다.
“에구, 힘 안 드세요? 다리 그을린 것 좀 봐, 집 나온 지 도대체 얼마나 되신 거예요? 음식은 괜찮으세요?”
친구의 위로와 걱정이 이어졌다.
“일본에 이민 오신 지 얼마나 되셨어요?”
“어릴 적에 왔어요.”
“이렇게 경치 좋은 곳에 사시니 좋으시겠어요.”
“네. 이곳 아카시는 일본에서도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랍니다.”
“일부러 이렇게 시간을 내 주셔서 고마워요.”
“이곳을 지나는 걸 몰랐으면 몰라도 지나는 걸 알고 있는데 어떻게 그냥 있을 수가 있어요? 따끈한 밥 한 끼 꼭 대접하고 싶었어요.”
“일본 생활은 괜찮으세요? 혹시 한국 사람이라고 차별 같은 거 안 해요?”
“네, 괜찮아요. 자주 만나는 한국 친구들도 몇 명 있어요.”
말끝이 서운하다.
“근데 이상해요. 처음 만났는데 낯설지가 않아요.”
나보다 추니 입이 터졌다. 그동안 두 달 넘게 무뚝뚝한 신랑이랑 계속 지냈으니 얼마나 답답했으랴.
친구는 찻집을 나와 추니와 손잡고 앞장서 나란히 점심 장소로 이동한다.
‘어~ 내 친군데….’
우리가 간 곳은 ‘이찌젠’이란 식당인데 메뉴는 일본 정식이었다. 밥과 된장국, 생선 조림, 채소 절임, 새우튀김, 고구마튀김, 연근튀김, 가지튀김 등 참 맛깔나게 차렸다. 두 시간 동안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진한 시간이었다.
“타국에서 한국인을 만나니 정말 반갑네요. 오늘 신세 많이 졌어요. 훗날 고국에 오실 때 꼭 연락 주세요.”
훗날 언제 또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소중한 만남이었다. 나보다 추니가 더 헤어지기 아쉽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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