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체스터 바이 더 씨>(케네스 로너건 감독, 2016)의 '맨체스터'는 축구 영웅 박지성과 록 밴드 오아시스가 살았던 영국의 그 유명한 맨체스터가 아니라, 미국 뉴햄프셔 주에 있는 도시 이름이다. 그 바로 아래에는 매사추세츠 주에 속한 '맨체스터 바이 더 씨'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지도를 살펴보니 두 지역은 서로 다른 주이지만, 아주 가깝다. 영화 속에서는 이 두 지역을 통칭해 '맨체스터'라고 부르는데, 제목이 뜻하는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특정 지역의 이름이면서 '맨체스터 바닷가'라는 영화 속 주된 배경을 뜻한다.
본격적으로 그의 과거를 드러내기 시작하는 지점은 시나리오 작법대로, 정확히 영화 시작 15분 후부터다. 평소 심장병을 앓던 리의 친형 조가 임종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리는 그의 과거의 시간이자 장소인 맨체스터로 향한다. 이때부터 보스턴에서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조카와 함께 보트 낚시를 하고, 친구들과 파티를 즐기던 그의 과거가 파편적인 플래시백(회상 장면 등을 표현하는 교차 편집 기법)으로 그려진다.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결국 형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고 당분간 고향에 머무르게 된 그를 사람들은 수군대며 경계한다. "저자가 그 유명한 리 챈들러야?" 때로는 낯선 호의가 그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주변에서 배회하던 그는 형의 유언장에서 조카 패트릭의 후견인으로 자신이 지목된 사실을 알고는 큰 혼란에 빠진다. 이 시점에서 파편적으로 이어지던 플래시백 화면은 감춰져 있던 그의 과거사를 모두 토해낸다. 관객은 그가 돌이킬 수 없는 기억과 감당하지 못할 죄책감을 안고 맨체스터를 떠나게 된 이유, 그리고 다시 돌아온 그곳에 결코 머물 수 없는 이유를 알게 된다.
상처가 시작되는 고향
이 영화의 압권은 아무래도 냉장고를 열자 우당탕 쏟아져버린 냉동식품들을 바라보며 만지지도 치우지도 못하고 주저앉아 오열하는 패트릭의 모습일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도 담담한 듯 보이던 패트릭이 안치실에 냉동 상태로 방치된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며 순식간에 무너지는 이 장면에서 우리는 열여섯 살 패트릭에 대해 연민을 느끼는 동시에 자연스럽게 후견인으로 어린 조카의 상처를 보듬어 줄 삼촌 리를 연결해보지만, 막상 리는 그런 패트릭의 고통을 외면하고 만다. 하키부의 주전선수, 록 밴드의 리더로 활약하고 두 명의 여자친구를 동시에 사귀는 등 외향적인 모습을 보이던 패트릭이 상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리는 그 고통을 이해해줄 수 있는 유일한 조력자의 역할을 포기해버린다. 감독은 지금까지 이어온 익숙한 플롯의 흐름에서 의도적으로 탈선해버리는 전환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즈음부터는 사건이 더 이상 진전되지 않는다. 영화의 전형적인 전개 방식이라면 리와 패트릭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을 촉발하는 사건들이 등장하고 이를 해결해가는 과정에서 결국 서로 화해하는 결론으로 흘러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감독은 특정한 사건을 배치하기보다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상처가 서로에게 어떤 고통을 주는지 관객들이 반복적으로 응시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상처로 인해 서로를 자신의 바깥으로 내모는 과정이 이어진다. 등장인물의 불안을 통해 긴장을 연출해내며 감독은 저마다의 관객이 가지고 있을 부정적 경험과 조우하도록 이끌어간다.
어떻게 보면 137분이라는 상영시간(한글로 바꿈)은 길다. 물리적인 시간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며 자신의 경험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기에 영화 속 보스턴과 맨체스터의 거리만큼이나 심리적인 괴리와 동요를 경험하는 시간이다.
리는 결국 맨체스터와 패트릭을 떠나며 고백한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어." 상처는 그가 날마다 치우던 눈처럼 해소되지를 않고, 오히려 주변과 상대를 향해 이어지고 쌓여간다. 어쩌면 우리는 이 비관적 세계관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고된 노역을 감당하며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영화는 관객들에게 이 가혹한 사실을 계속 상기시킨다. 영화 속 리, 그리고 점점 삼촌을 닮아가는 패트릭을 통해.
저마다의 상처를 들여다보게 하는 그들
'20대의 영화'는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을 매개하는 역할이라고 한다. 우연히 이뤄지는 달콤한 로맨스, 세상을 구원하는 영웅 서사를 통해 현실에서 경험할 수 없는 세계관을 열망하게 되지만 '40대의 영화'는 반대로 자신의 과거를 반추하게 만든다. 영화 속 영웅이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음을 잘 알기에, 시시껄렁하고 무책임한 결말을 즐기기 어려워진다. 이 영화를 가족과 함께 봐야 한다는 어느 관객의 리뷰를 읽었는데, 개인적으론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 이 영화의 태도는 두 세대가 함께 공감하기에는 비관적이다. 영화는 앞서 말했듯 고통스러워하는 인물의 현실을 반복적으로 응시하게 하고, 이를 통해 우리가 왜 떠나왔는지, 떠나온 곳으로 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지 자신의 경험 안에서 대답하게 만든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상처, 당신이 버틸 수 없었던 죄책감. 함께 마주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영화는 명료하게 드러내지는 않지만, 우리의 현실과 비슷한 작은 변화의 희망을 암시하고도 있다. 후반부의 리는 곧 성인이 될 패트릭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보스턴에 방이 두 개인 집을 구하겠다고 말한다. 이러한 배려 또는 타협에 대해 패트릭은 맨체스터를 떠나지 않을 것처럼 응수하지만, 리는 자신처럼 패트릭 역시 그의 고향 맨체스터에서 더 버틸 수 없을 때가 올 것을 알고 있는 듯하다. 상처는 서로를 밀어내기도 하고, 상대방과 같은 상처를 공유할 때 공감을 낳기도 하는 것 아닐까. 어쩌면 공감과 외면은 같은 이유에서 시작되는 것일지 모른다.
TV 광고에 범람하는 '고향'의 상투적인 이미지와 상징들, 예컨대 고향을 따뜻하고 그리운 정서로 보자면 <맨체스터 바이 더 씨>라는 제목은 그 느낌을 잘 살리고 있다. 그러나 주인공 리에게 고향은 다시 돌아가고 싶은 기억이기도 하지만, 극복해야 할 기억과 고통이기에 이 제목은 반어적이며 역설적이다. 영화 속 이야기처럼 큰 비극적 사건이 아니더라도 우리 역시 '고향'이라는 특정한 시절의 기억에서 빠져나와 살고 있다. '고향'의 상투적인 이미지가 미디어를 통해 소비되는 이유는 우리가 극복해야 하는 기억(맨체스터)과 우리가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같기 때문에, 지금 사는 이곳(보스턴)에 계속 남아 있을 수밖에 없어서이다. 떠날 수 없는 맨체스터에 혼자 남은 아들을 가장 잘 돌봐주고 이해해줄 것이라 믿었던 형의 마지막 기대,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버틸 수가 없었던 주인공의 모순적인 태도, 그 모순을 점차 이해하게 될 패트릭과 이미 그 모순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 관객의 기억이 서로를 응시하고 저울질하는 137분 후, 극장을 나서는 관객들의 표정에서 '공감' 또는 '외면'의 모습을 읽었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