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보는 국민도 아쉽다. 그의 사임이 아쉬운 게 아니라 그의 취임이 지금도 아쉽다.
뜬금없지만 다시 묻는다. 꼭 총리직을 받았어야 했을까? 그냥 '석학'으로, '원로'로 남아 사회의 균형추 역할을 하면 안 됐을까?
물론 선택은 자유다. 그가 총리직을 맡고 안 맡고는 전적으로 그의 자유의지 영역에 속하는 문제다. 또한 참여는 당위다. 학문 하는 목적이 세상을 발전시키는 데 있다면 정치 참여는 자신의 학문적 입장을 구현하기 위한 최고·최후의 방법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쉽다. 여전히 그의 총리직 취임이 아쉽다.
▲29일 사의를 공식 밝힌 정운찬 총리 ⓒ프레시안(자료사진) |
그는 '특임 총리'였다. 세종시로 출발해 세종시로 끝난 '원 포인트 총리'였다. 이런 그의 위상과 역할, 그리고 자신의 위상과 역할에 충실했던 그의 행적에 비춰볼 때 10개월이란 시간은 그리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끝장' 보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둔감했고 무능했던 것이다. "험난한 정치지형"을 제대로 간파할 시각이 없었고, "험난한 정치지형"을 효과적으로 돌파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 이랬으면 어땠을까? 그가 '석학'과 '원로'의 위치에서 소신을 폈다면 어땠을까? 그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경제와 교육 문제에 대해 중립적 위치에서 발언했다면 어땠을까?
그의 경제관과 교육관에 찬동해서 하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가 사회에 끼칠 수 있는 긍정적 영향과 역할이 스러지는 게 아쉽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우리나라엔 '원로'가 없다. 자처하는 '원로'는 많지만 존경받는 '원로'는 거의 없다. 청와대에서 밥 먹는 '원로'는 많지만 저잣거리에서 대중과 말 섞는 '원로'는 거의 없다. 그래서 제 역할을 못한다. 정파와 세력이 정면충돌 할 때 완충 역할을 못하고, 극단과 극단이 대립할 때 완화 기능을 못한다. "험난한 정치지형"을 중화시키는 데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한다.
정운찬 총리는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정파와 이념과 세력의 중간지대에서 균형추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총리직을 받아들이기 전까지만 해도 이럴 여지는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이젠 없다. 그가 다시 '야인'이 되고 '학자'가 돼도, 그가 '원로'를 자처해도 더 이상 그는 중립지대에서 균형추 역할을 할 수 없다. 그의 도덕성은 인준청문회 과정에서 상처 받았고, 그의 위상은 총리직 수락과 동시에 한편으로 기울었다.
이게 아쉬운 것이다. 정운찬의 총리직 사임이 아니라 '원로' 정운찬의 사회적 퇴장이 못내 아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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