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전 대통령은 자서전 출간을 위한 구술 작업을 하면서 "내가 세상을 떠난 뒤 출간하라"고 당부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자서전 출간위원회는 이런 뜻을 거듭 만류했지만, 지난해 김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면서 결국 자서전은 그의 뜻대로 서거 1주기에 즈음해 완성됐다.
이희호 여사는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1년 가까이 자서전 원고를 읽어보고 다듬는 과정을 통해 남편을 잃은 슬픔을 달랬다고 토로했다. 이 여사는 "이 책은 저자의 일생을 기록한 것이지만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힘겨운 고난의 시기를 겪어 온, 좀처럼 찾아보기 드문 기록"이라고 말했다.
이희호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힘겨운 시기에 대한 기록"
▲ 이희호 여사는 김 전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을 통해 직접 자서전의 서문을 집필했다. ⓒ연합뉴스 |
김 전 대통령은 생전에 김택근 논설위원이 작성한 원고를 직접 꼼꼼히 읽어보고 수정하기도 했다. 이런 작업은 2009년 7월 병원에 입원하기 직전까지 계속됐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에는 이희호 여사가 원고를 직접 읽고 검토했다.
이희호 여사는 김 전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을 통해 직접 자서전의 서문을 집필했고, 자서전 앞머리에는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고르바쵸프 전 소련 대통령, 폰 바이체커 전 독일 대통령이 보내온 글이 함께 실려 있다.
이희호 여사는 서문에서 "자서전을 읽으면서 당신이 살아 계시다는 느낌을 받는다"며 "이 나라를 민주,자유, 평화의 꽃이 피는 나라로 만들겠다는 당신의 꿈은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당신이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내일의 희망을 향해서 나아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작은댁으로 사신 어머니, 감추는 게 명예 지키는 것 아니다 싶었다"
김 전 대통령은 자서전을 통해 1973년 동경납치사건 등 세상에 알려진 사건의 기록에도 충실했지만 출생의 비밀 등 평생을 감춰왔던 사실까지 모두 진솔하게 기록했다.
그는 "나는 오랫동안 정치를 하면서 내 출생과 어머니에 관해 일체 말하지 않았다. 많은 공격과 시달림을 받았지만 '침묵'했다. 평생 작은댁으로 사신 어머니의 명예를 지켜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그러나 사실을 감춘다 해서 어머니의 명예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며 "어머니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나를 남부럽지 않게 키우셨고, 나 또한 누구보다 어머니를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애틋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가 자서전을 통해 평생의 비밀을 공개한 것은 "모든 것을 진실 되게 기록해야 한다"고 당부한 자서전 집필 원칙과도 맞닿아 있다.
"박근혜의 사과,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 했다"
그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에 대한 고마움도 표현했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지 25년 만인 2004년, 자신을 찾아온 박근혜 대표가 "뜻밖에 아버지 일에 대해서 사과를 했다"며 "나는 그 말이 참으로 고마웠다"고 말했다.
그는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 했다"며 "박정희가 환생하여 내게 화해의 악수를 청하는 것 같아 기뻤다. 사과는 독재자의 딸이 했지만 정작 내가 구원을 받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장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공동선언 최종 문구를 조율하며 줄다리기를 하던 당시 김 국방위원장이 김 전 대통령에게 "대통령이 전라도 태생이라 그런지 무척 집요하군요"라고 말했던 일도 기록돼 있다. 그는 "갑자기 튀어나온 김 위원장의 농이었다. 절박한 분위기를 단번에 깨뜨렸다"고 설명했다.
나도 다시 그에게 농담을 날렸다.
"김 위원장도 전라도 전주 김 씨 아니오. 그렇게 합의합시다."
"아예 개선장군 칭호를 듣고 싶은 모양입니다."
"개선장군 좀 시켜주시면 어떻습니까. 내가 여기까지 왔는데, 덕 좀 봅시다."
그러자 비로소 김 위원장이 웃었다. 정상 회담은 이렇게 종료되었다. 저녁 7시였다. 합의문은 '남북 공동 선언'으로 하기로 했다.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서전 <김대중 자서전>(삼인 펴냄)이 29일 출간됐다. ⓒ연합뉴스 |
"MB, 실용적인 사람으로 알았는데 내가 잘못 본 것 같았다"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대한 우려도 담겨 있다. 그는 생전에 이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해 "과거 건설 회사에 재직할 때의 안하무인식 태도를 드러냈다"며 "그의 말대로 실용적인 사람으로 알고 대세에 역행하지 않을 것으로 믿었는데 내가 잘못 본 것 같았다"고 실망감을 표현했다.
그는 "나라와 국민을 위해 가장 보편적인 길을 찾는 것이 실용일진대, 그는 실용의 개념을 잘못 이해하는것 같았다"고 덧붙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정부의 반대로 준비했던 조사를 읽지 못했던 슬픔도 기록돼 있다. 노 전 대통령의 장례식장에서 권양숙 여사를 붙잡고 오열하며 깊은 슬픔을 감추지 않았던 김 전 대통령은 "이제 비로소 그의 영전에 조사를 바친다"는 말로 조사가 무산됐던 당시의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그 외에도 김 전 대통령은 하의도 출생에서부터 목포 학창 시절, 사업가 시절, 정치입문과 야당 활동, 1971년 대선 출마, 10월 유신과 망명, 1976년 3.1 구국선언과 감옥생활, 미국 망명생활,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과의 어려웠던 정상회담 등에 대해 자세하게 구술했다.
자서전에 담지 못한 많은 사연과 인연…"내 코가 왜 이렇게 크게 그려지냐"
총 2권, 1356쪽의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미처 담지 못한 이야기는 많이 있다. 박지원 김대중평화센터 비서실장 겸 민주당 원내대표는 이날 김대중도서관에서 열린 언론 설명회에서 "김 전 대통령께서 생전에 남기신 많은 인연과 사연이 <김대중 자서전>에 모두 포함되지는 못했다"고 설명했다.
박 비서실장은 "예를 들면, 대통령께서 DJ라는 이니셜을 사용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고 김영삼 전 대통령을 호칭할 때도 YS라는 말은 거의 쓰지 않았던 것이나, 시사만화를 보시면서 '왜 내 코가 이렇게 크게 그려지느냐. 이건 아니지 않냐'고 하셨던 말씀도 담기지 못했다"고 말했다.
박 비서실장은 "또 정치권에서 김 전 대통령이 대식가라고 하는데 대통령께서는 당신은 절대 대식가가 아니라고 하면서 '이 억울함은 우리 집사람이 한 번은 풀어줘야 한다'고 여사님께 요구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젊은이에게는 희망과 신념의 지침서, 국민에게는 역사적 교양서"
자서전 출간위원회의 여러 가지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자서전>은 한 개인의 기록을 넘어 우리 시대와 역사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그 자체로 상당한 의미를 가진다.
김 전 대통령은 생전에 자서전에 대해 "자서전은 국민을 위해 쓰는 것"이라며 "역사에 충실한 기록이 되어야 하겠지만 독자들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 되어야 한다"고 얘기하기도 했었다. 김 전 대통령은 "정부 요직에 있는 사람들은 자서전 같은 기록을 남기는 것을 의무로 생각해야 한다"며 "후세에 역사 기록이자 교훈이 되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성재 김대중도서관 관장은 "이 책은 젊은이들에게는 희망과 신념의 지침서가 되고 학자들에게는 한국 현대사를 연구하는 생생한 구술 자료가 되며 물론 정치인에게는 더없는 정치 교과서가 되고 국민에게는 역사적 교양서가 될 것이며 세계인들에게는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를 사랑하는 삶이 어떤 삶인지를 보여주는 소중한 보물"이라고 설명했다.
김성재 관장은 "이 책은 그런 면에서 한 개인의 자서전이 아니라 한국 현대사 100년을 다시 반추하고 세계에 우리를 알리는 귀한 일이 된다"고 덧붙였다.
김대중평화센터와 김대중도서관은 <김대중 자서전>이 세계 각 언어로 번역되는 데도 힘을 쏟을 계획이다. 이미 일본어판 출판을 위한 번역 작업은 진행 중에 있다. 국내에서는 만화, 청소년용 전기, 평전, 영상 회고록 등도 추진하겠다고 설명했다.
서거 1주기 맞아 육필 수첩, 구술 기록 등 '특별기획전시회' 개최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은 김 전 대통령의 서거 1주기를 맞아 특별기획전시회와 추모강연회 등 추모 행사를 갖는다. 특별기획전시회는 오는 8월 3일부터 29일까지 김대중도서관에서 진행된다. 이번 전시에는 김 전 대통령이 저술해 국내외 출판사에서 출간된 56종의 저서와 총 47권에 달하는 김 전 대통령의 육필 수첩이 공개된다. 또 퇴임 이후 김대중 대통령이 작성한 4권의 연설문 요지 노트와 김 전 대통령의 구술 영상 기록도 공개될 예정이다. 구술 영상 기록은 2006년 7월 27일일부터 2007년 10월 25일까지 약 1년 간에 걸쳐 총 41회, 43시간 분량이 있으나 도서관 측은 이 가운데 8개 주제, 총 19분 분량의 영상만을 발췌해 세상에 보여줄 예정이다. 김 전 대통령 추모를 위한 특별 강연회는 '민주주의와 평화의 트랜스포머'라는 주제로 8월 16일 오후 3시에 열린다. 이날 강연에는 한상진 서울대 교수가 '아시아 정체성을 가진 코스모폴리탄 비전'이라는 주제로, 이지마 마코토 전 일본 교회협의회 총무가 '일본에서의 김대중 구명운동과 아시아 화해와 평화'라는 주제로 연단에 오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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