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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천경개 수려하고 시원하다! 청송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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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산천경개 수려하고 시원하다! 청송고을

2017년 8월 고을학교

8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 제46강은 세종의 비 소헌왕후의 고향이고 영남학파의 본류 퇴계와 학봉의 연고지이며 임진, 병자 양란 때 가장 많은 의병을 일으켰던 곳이면서 산천경개가 수려한 청송고을을 찾아갑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명산 주왕산의 기암ⓒ청송군

고을학교 제46강은 2017년 8월 27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정시에 출발합니다.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46강 여는 모임)

이날 답사코스는 서울-진보면(백호서당/풍호정/진보향교/기곡재사)-파천면(평산신씨고택/서벽고택/사남고택/송소고택/송정고택)-청송읍(운봉관/찬경루/청송향교/우송당/망미정/보광사)-점심식사 겸 뒤풀이-부남면(항일의병기념공원)-현동면(오체정/후송당/화지재)-안덕면(방호정/금대정사)-현서면(추원당/침류정)-서울의 순입니다.


▲<청송고을> 답사 안내도 Ⓒ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46강 답사지인 <청송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명산 주왕산이 풀어놓은 아름다운 고을

청송(靑松)은 낙동정맥(洛東正脈)에 있는 주왕산(周王山)에서 갈라져 나온 지맥들에 둘러싸여 있는 산지(山地)고을입니다. 산과 계곡이 아름답기로 유명하고 특히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청송의 풍속(風俗)에 대하여 “검소하고 인간의 도리를 잘 지킨다(尙儉率)” 또 “사람은 순박하고 습속은 순후하다(民淳俗厚)”라고 기록하고 있듯이 순후한 인심이 가득한 지역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산줄기는 청송의 주산인 방광산(放光山 518.7m)이 읍치구역에 솟아있고 동쪽은 주왕산(周王山 721m)을 경계로 영덕과, 서쪽은 노래산(老萊山 796m)을 경계로 안동과, 남쪽은 보현산(普賢山 1,124m)을 경계로 영천과, 북쪽은 광덕산(廣德山 489m)을 경계로 영양과 접해 있습니다.

물줄기는 부동면과 부남면에서 흐르는 지류를 합한 용전천(龍纏川)이 청송읍과 파천면을 경유하여 영양에서 진보면을 지나는 반변천(半邊川)과 만나 임하댐으로 유입되고, 보현산에서 발원한 보현천(普賢川)은 안덕면을 경유하여 현서면을 경유하는 길안천과 만나 임하댐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청송(靑松)은 신라시대에는 757년(경덕왕 16) 군현(郡縣)의 명칭을 바꿀 때 청기현(靑己縣)에서 적선(積善)이라 하고 야성군(지금의 영덕)의 영현이 되었고, 진보(眞寶)는 칠파화현(漆巴火縣)과 조람현(助攬縣)을 합한 것으로 칠파화현은 진보로 개명하여 문소군(지금 의성)의 영현이 되었고, 조람현은 진안으로 고쳐 야성군(지금 영덕)의 영현이 되었고, 안덕현은 연무(緣武)라 개칭하여 곡성군(지금 안동군 임하면)의 영현에 속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918년(태조 원년)에 부이(鳧伊)라 개칭하고 그 후 운봉(雲鳳)이라 했는데 성종 때 행정개혁을 단행하여 청부(靑鳧)라 하여 예주(禮州 지금 영덕)의 속현이 되고, 안덕현은 1018년(현종 9) 연무(緣武)에서 안덕(安德)으로 고치고 안동에 예속되고, 진보현은 924년(태조 7) 문소군을 의성부로 승격하여 진보현(眞寶縣)과 진안현을 합해서 보성부(甫城府)로 넘겨주고 있다가 1018년(현종 9)에 예주의 속현이 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태조 3년에 진보와 합쳤다가 1418년(세종 원년)에 소헌왕후 심씨의 본향인 이유로 청보군(靑寶郡)으로 승격된 후 다시 진보와 분리하여 송생현(松生縣)과 합하여 청송군(靑松郡)으로 개칭하였으며 1459년 안덕현(安德縣)을 병합하여 청송도호부(靑松都護府)로 승격하였습니다.

청송이 적은 인구임에도 불구하고, 경상도 7개 도호부의 하나로 그 위상을 437년간 유지해온 것은 세종대왕 비인 소헌왕후의 출신지로서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위난의 시대에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일으켰으며, 퇴계 이황, 학봉 김성일 등 명현거유(明賢巨儒))의 연고지로서 국가의 동량이 되는 인재를 꾸준히 배출해온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청송은 전국에서 의병유공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지역입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우국충절의 선비정신이 의병정신으로 나타난 것인데, 퇴계(退溪)의 본향은 청송의 진보(眞寶)이고, 의병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임란 초에 퇴계(退溪)·남명(南冥)의 후학을 의병으로 동원하여 진주성을 사수한 학봉(鶴峯)의 태지향이 청송의 안덕(安德)이며, 승장(僧將) 사명대사(四溟大師) 또한 주왕산 대전사에서 의병을 훈련시켰습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부, 군, 면 통폐합에 따라 진보군(眞寶郡) 일부를 합병, 8면으로 구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1973년 현서면(縣西面) 3개 동이 안덕면(安德面)에 편입되었고 1979년 청송면(靑松面)이 청송읍(靑松邑)으로 승격(1읍 7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1983년 영양군 입암면 일부(흥구동·방전동)가 진보면에 편입되었습니다.

▲절골계곡ⓒ청송군

청송읍과 진보면이 읍치구역

청송 지역에는 청송읍과 진보면에 읍치구역이 있었습니다.

운봉관(雲鳳館)은 1426년(세종 10) 군수 하담(河擔)이 찬경루(讚慶樓)와 함께 건축한 청송군의 객사(客舍)로 선조 때(1600년경) 한 차례 중건하고 1717년(숙종 43) 부사 성환(成煥)이, 1812년(순조 12) 부사 강휘옥(姜彙鈺)이, 1871년(고종 8) 부사 윤현기(尹顯技)가 중수하였습니다. 원래는 중당을 가운데 두고 좌, 우에 양익사가 배치되어 있었으나 1918년 경 중당과 서익사(西翼舍)는 없어지고 현재 동익사(東翼舍)만 남아 현판을 달아 보존하고 있습니다.

청송향교(靑松鄕校)는 1426년(세종 8) 창건되었고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가 1606년(선조 39) 부사 이영도(李泳道)가 국동(菊洞)에 대성전을 건립하고, 1629년(인조 7) 부사 이문증(李文證)이 동무(東廡), 서무(西廡)와 강당 등을 중수하였으며, 1693년(숙종 19) 부사 이문징(李文徵)이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고 1700년 부사 이상훈(李相勛)이 청아루(菁莪樓)를 증축하였으며 1869년(고종 6) 부사 윤현기(尹顯岐)가 대대적인 개수와 보수를 하였습니다.

대성전, 청아루, 명륜당, 외삼문(外三門), 일각문(一閣門), 주사(厨舍) 등이 남아있으며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2현(宋朝二賢), 동국18현(東國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진보향교(眞寶鄕校)는 1440년(태종 4) 창건되었고 1762년(영조 38)에 광덕산 기슭으로, 1882년(고종 18)에는 구읍으로, 1886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며 외삼문, 명륜당, 동재, 서재, 내삼문, 대성전이 남아있습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6현(宋朝六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습니다.

낙금당(樂芩堂)은 1899년(고종 3)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군량미를 지원하고 향리에서 많은 빈민을 구제한 낙금당(樂芩堂) 남성로(南星老)의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유림들과 문중에서 경모계를 조직하여 건립한 서당입니다. 남성로는 안덕에서 세거한 영양 남씨 입향조인 운강(雲岡)의 10대손으로서 만년에 성리학을 강학하여 후진을 육성한 학자입니다.

백호서당(栢湖書堂)은 숙종 때의 유학자 존재(存齋) 이휘일(李徽逸)의 유업을 기리기 위해 당시의 청송현감 조명협(曺命協)의 발의로 영남유림과 진보 향중(鄕中)에서 1757년(영조 33)에 건립한 서당으로, 임하댐 건설로 1989년 현 위치로 이건하였는데 1700년대 초 건축의 구조적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송소고택ⓒ청송군

조선시대 사대부집들 즐비

청송에는 조선시대 사대부 집들이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송소고택(松韶古宅)은 영조(英祖) 때 만석의 부를 누린 심처대(沈處大)의 7대손 송소(松韶) 심호택(沈琥澤)이 1880년경 호박골에서 조상의 본거지인 덕천동으로 옮겨 오면서 지은 집입니다. 큰 사랑채는 크고 화려한 건물로 주인이 거처하며 우측에 작은 사랑이 있고 그 뒤로 안채가 있는데 안채는 전체적으로 ㅁ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건물에 독립된 마당이 있고, 공간이 구분되어 있는 등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초전댁(草田宅)은 순조(純祖) 때 통정대부첨지중추부사(通政大夫僉知中樞府事)를 재낸 청송심씨(靑松沈氏) 석촌공파(石村公派) 17세인 덕활(德活) 공(公)이 요절한 아우 덕종(德宗)의 양자로 입적한 친아들 헌문(憲文)의 네 번째 돌을 기념하여 1806년(순조 6)에 지은 집으로, 21세인 선해(宣海)가 1900년에 보수하여 세거(世居)해 오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전면의 대문을 중심으로 우측 편으로 큰사랑, 좌측 편은 작은 사랑이, 온돌방 좌우로 외양칸과 고방이 있습니다.

평산신씨판사공파(平山申氏判事公派)는 고려개국공신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의 21대 손이며 판례빈사사태복판사(判禮賓寺事太僕判事)를 지낸 신득청(申得淸)을 시조로 모시고 있는데, 종택(宗宅)은 27세 신한태(申漢泰)가 숙종(潚宗) 때 지은 집입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안채와의 사이에 넓은 사랑마당이 있고 이 마당의 우측에 새 사랑채가 따로 있으며 안채 뒤로는 오른편에 사당이, 왼편에 영정각과 서당이 나란히 배치되어 조선시대 사대부 저택의 면모를 갖추고 있습니다.

사남고택(泗南古宅)은 'ㅁ'자형 건물로서 19세손인 신치학(申致鶴)이 1780년경에 지은 집으로 오른쪽에 있는 서벽고택, 평산신씨종택 등과 같은 시대에 건립되었습니다. 사랑채는 기단을 높게 조성하여 누각처럼 보이게 하였고 팔작지붕을 높지막하게 올려 마치 독립된 별동의 건물과 같은 느낌을 주게 하는 일반살림집으로는 특이한 구조입니다.

신치학은 8형제 중 다섯째였는데, 분가하면서 이 집을 지은 것으로 생각되며 전란으로 다른 6형제의 집은 다 불탔으나, 장남이 거처하던 서벽고택(棲碧古宅)과 사남고택(泗南古宅)은 보존되었습니다. 사남(泗南)은 신치학(申致鶴)의 손자인 신우호(申遇浩)의 호인데, 마을 앞을 흐르는 사양천(泗陽川)에서 그 호를 따왔다고 합니다.

서벽고택(棲碧古宅)은 신숭겸(申崇謙)의 자손인 신한창(申漢昌)이 분가할 때 지은 집으로, 그 후에 신치구(申致龜)가 1739년(영조 15)에 확장 증축하고 신한창의 ‘서벽’이라는 호를 따서 서벽고택이라 칭했는데 정면 6칸 측면 4칸의 'ㅁ'자형 주택입니다.

후송당(后松堂)은 후송(后松) 조용정(趙鏞正)이 지은 집으로 일자형의 안채와 ㄴ자형의 중문간채 그리고 ㄴ자형의 사랑채가 안마당을 감싸고 있어 전체적으로 보아 튼ㅁ자형의 배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안채는 우측의 부엌을 제외한 각 면에 툇마루를 돌렸고 사랑채는 짧은 누하주를 세우고 난간을 설치하여 누각 모양으로 꾸몄는데, ‘후송헌’이라 쓴 현판이 걸려있으며 이 밖에 행랑채, 곡간채, 창고 등이 있습니다.

우송당(友松堂)은 망미정을 마주보는 곳에 있으며 도정(都正) 윤두석(尹斗錫)이 용전천변(龍纏川邊)을 거닐며 전경을 관망하던 곳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손자 윤상영(尹商榮)이 1688년(숙종14년)에 지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운봉관과 찬경루ⓒ청송군

청송 입향조(入鄕祖) 재사(齋舍)들도 많아

청송은 특이하게 각 문중의 청송 입향조(入鄕祖)의 재사(齋舍)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찬경루(讚慶樓)는 1428년(세종 10)에 군수 하담(河澹)이 건립하였다고 전하며 일설에는 소헌왕후의 8왕자가 어머니를 위해 각 2칸씩 건축하였다고 합니다. 맞은편 보광산에 있는 청송심씨 시조 심홍부(沈洪浮) 묘소의 재각(齋閣)으로 장마철 용전천의 범람으로 묘소로 갈 수 없을 때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하며 ‘찬경루’란 누각명은 경상도 관찰사 홍여방(洪汝方)이 순시 때 지은 것으로, 누각에 올라 심씨 시조묘를 보니 소헌왕후를 배출한 경사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라고 합니다.

만세루(萬歲樓)는 세종(世宗)이 군수 하담에게 명하여 청송심씨(靑松沈氏) 시조인 심홍부(沈洪浮)의 묘 아래 건립한 재각으로 보광산에 있는 심흥부의 묘에 제사 지낼 때 비가 오면 이 누각을 사용하였다고 하는데, 찬경루와 같은 시기에 지은 것으로 보이며 보광사 사찰 경내 극락전(極樂殿)과 마주 보이는 곳에 있습니다.

기곡재사(崎谷齋舍)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6대조이며 진성이씨(眞城李氏) 시조인 이석(李碩)의 재각입니다. 원래 시조묘를 잃어 버렸는데 1679년(숙종 5) 지석(誌石)이 발견됨에 따라 제사를 봉안하였다고 하며 우익사에는 노년층이 사용하는 윗방을 꾸미고 좌익사에는 장년층이 사용하는 중간방을 배치하여 서열에 따라 용도를 구분하여 문중회나, 묘제 지낼 때 숙소로도 활용되고 있습니다. 조선후기 경상도 북부지방의 재사건축의 유형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화지재(花池齋)는 영양남씨(英陽南氏) 청송 입향조인 운강(雲岡) 남계조(南繼曺)의 묘를 수호하는 재사로, 1670년(현종 11)에 건립되었다고 전하나 건축 연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화지재가 있는 곳은 주사형(走蛇形) 형국의 길지(吉地)라고 하며 재사, 신도비, 그리고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향나무가 남아 있습니다.

덕양재(德陽齋)는 달성서씨(達城徐氏) 학유공파(學諭公派) 9세손인 청송 입향조(入鄕祖) 서윤(徐尹)과 그의 손(孫) 서창(徐昌), 그리고 서창의 손(孫) 서봉(徐琫)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약 200여 년 전에 달성서씨 문중에서 창건하였다고 합니다. 창건 당시에는 재사(齋舍) 뒤편에 사당(祠)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재사, 대문채, 곡간채, 주사(廚舍)만 남아 'ㅁ'자형 배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추원당(追遠堂)은 의성김씨(義城金氏) 청송 입향조인 김한경(金漢卿)의 묘소 아래 세운 재사로 건립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18세기의 건축물로 추정됩니다. 김한경은 1456년(세조 2) 개성에서 태어나 제용감정(濟用監正)에 올라 1506년(중종 원년) 정국공신(靖國功臣)에 녹훈되고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습니다.

그후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청송 도동으로 낙향하여 후학 양성에 평생을 바쳤는데 추원당은 넓은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 양측에 2칸통의 온돌방이 배치하고 오른쪽 온돌방에는 사성재(思成齋)라는 편액을 걸려 있으며 유허비와 재사, 묘소가 가까이에 있습니다.

계곡 수려하니 정자들도 많이 세워져

청송은 계곡이 수려하여 여러 곳에 정자가 세워졌습니다.

방호정(方壺亭)은 창석(蒼石) 이준(李埈), 동계(東溪) 조형도(趙亨道), 풍애(風崖) 권익(權翊), 방호(方壺) 조준도(趙遵道), 하음(河陰) 신집(申輯) 등이 학문을 강론하고 산수를 즐기던 곳입니다. 1619년(광해군 11) 조준도가 생모 안동 권씨의 묘가 바라보이는 이곳에 정자를 세우고 어머니를 생각한다는 뜻에서 ‘사친(思親)’ 또는 ‘풍수당(風水堂)’이라고 하였다가 뒤에 자신의 호를 따 이름붙인 정자로 안에는 <방호문집(方壺文集)>의 판각이 보관되어 있으며 제현들의 제영현판(題詠懸板)이 걸려 있습니다.

풍호정(風乎亭)은 1414년(세종 14)에 장절공(莊節公) 신숭겸(申崇謙)의 후손인 풍호(風乎) 신지(申祉)가 세운 정자입니다. 신지는 의영고부사(義盈庫府使)를 지냈으며, 말년에 진보(眞寶)로 낙향하여 지방 시조(始祖)가 되었는데 정자 오른쪽에는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우다 순절한 신지의 후손 신예남과 부인 민씨를 기리는 쌍절비각(雙節碑閣)이 있으며, 왼쪽에는 주사(廚舍)가 있는데 건물은 당시의 것이 아니고 다시 지은 것입니다.

침류정(枕流亭)은 조선 중기의 학자 김성진(金城振)의 정자로, 17세기에 지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김성진은 의성김씨 청송 입향조인 김한경(金漢卿)의 증손으로 학식이 높고 효행이 지극하였으며 임진왜란을 당하자 동생들을 창의(倡義)케 하고 자신은 노모를 무사히 피난시켰으며 난후에 이 정자를 지어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습니다.

침류정 향나무는 김성진(金聲振)의 문도들이 의해 심었다고 전하는데 높이는 약 10m, 가슴높이의 지름이 80cm 정도인 수령 약 350년 이상 된 노거수입니다.

오체정(五棣亭)은 영양남씨(英陽南氏) 청송 입향조 운강공(雲岡公) 남계조(南繼曺)의 고손(高孫) 5형제(自熏, 應熏, 有熏, 必熏, 是熏)의 효행과 우애를 추모하기 위하여 자훈의 손자 남도성(南道聖)이 제종(諸宗)들과 합의하여 1774년경 지은 정자입니다. 오체(五棣)란 시경(詩經)의 체화시(棣華詩)에서 따온 말로 오형제를 뜻하며, 건물배치는 튼'ㅁ'자형이고 뒤편에 주사(廚舍)가 있으며 주변에는 오래된 소나무 군락이 있습니다.

유서 깊은 사찰 보광사와 대전사

청송 지역에는 유서 깊은 사찰 보광사와 대전사가 있습니다.

보광사는 7세기경 의상(義湘)이 건립하였다고 전해지며, 조선 세종(世宗)의 비(妃)인 청송심씨(淸松沈氏)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시조 묘를 모시는 사찰이었습니다. 극락전(極樂殿)은 1429년(세종 11)에 만세루 등과 함께 처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의 건물은 중창불사 중 만력(萬曆) 43년 12월 1일자의 상량문이 나왔으므로 1615년 건축으로 여겨집니다.

대전사(大典寺)는 672년(문무왕 12)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는 설과, 919년(태조 2)에 주왕(周王)의 아들이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으며 그 뒤의 자세한 역사는 전해지지 않고 조선 중기 실화(失火)로 전소된 뒤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보광전(普光殿), 명부전(冥府殿), 산령각(山靈閣), 요사채가 남아있고 유물로는 보광전 앞의 삼층석탑 2기와 사적비, 부도(浮屠) 등이 있으며, 부속암자로는 백련암(白蓮庵), 주왕암(周王庵) 등이 있습니다.

소헌왕후(昭憲王后)는 세종의 왕비로 성은 심씨(沈氏).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영의정 심온(沈溫)의 딸로서 1408년(태종 8) 충녕군(忠寧君)과 가례(嘉禮)를 올려 빈(嬪)이 되어 경숙옹주(敬淑翁主)에 봉해졌으며 1417년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개봉(改封)되고, 이듬해 4월 충녕대군이 왕세자에 책봉되자 경빈(敬嬪)에 봉해졌으며, 같은 해 9월에 즉위하니 12월에 왕후로 봉하여 공비(恭妃)라 일컬었다가 1432년(세종 14)에 왕비로 개봉되었습니다.

심온(沈溫)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중옥(仲玉). 세종의 장인이며, 개국공신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의 아들로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여 고려 조정에서 벼슬을 하다가 아버지와 함께 조선왕조 창업에 참여하여 간관(諫官)의 직무를 맡아보았습니다. 그 뒤 이조판서, 공조판서를 역임하고 양녕대군을 대신하여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고, 이어서 세종으로 즉위하자 국구(國舅)로서 영의정이 되었습니다.

1418년(세종 원년)에는 사은사(謝恩使)로서 명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이때 그의 동생 심정(沈正)이 병조판서 박습(朴習)과 같이 상왕인 태종의 병권 장악을 비난한 것이 화근이 되어 이듬해 귀국 도중에 의주에서 체포되어 수원으로 압송, 사사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그가 국구로서 세력이 커짐을 염려한 태종과 좌의정 박은(朴訔)의 무고로 밝혀져 뒤에 세종은 관직을 복위시키고, 안효(安孝)라는 시호를 내렸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풀숲에선 필히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식수, 윈드재킷, 우비,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이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 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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