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비(非)민주 단일후보가 예상치 못했던 바람을 일으켰던 것은 그 자체로 상당한 파장을 불러올 것으로 보인다. 영원히 변할 것 같지 않던 든든한 애인이 배신의 조짐을 보였기 때문이다. 광주 민심은 민주당에게 경고장과 동시에 마지막 기회를 주는 선택을 한 셈이다.
거대한 골리앗과 맞서 '선거혁명'의 가능성을 만들어냈던 민노당은 졌지만, 이겼다. 누구도 넘볼 수 없었던 광주에서 균열의 첫 삽을 뗀 주인공이 됐다. 2012년 총선은 물론이고 대선에서의 야권연대를 위한 협상력도 덩달아 높아지게 됐다.
민주당, 간신히 안방 지켰지만 체면 다 구겼다
▲광주 남구에서 민주당 장병완 후보가 2만6480표로 55.91% 득표율을 기록해 당선됐다. ⓒ연합뉴스 |
"민주당 공천장만 받으면 마른 나뭇가지에서도 꽃이 핀다"던 광주에서의 패배라는 치욕은 면했지만 자존심은 이미 있는 대로 다 구겨졌다.
당초 재보선 초기 야권연대를 얘기하며 민주노동당은 광주 남구를 달라고 노골적으로 요구했다. 민주당은 콧방귀를 꼈었다. 거의 다 잡은 고기도 아니고, 손 안에 쥔 고기를 달라는 건 양보가 아니라 무조건 내놓으라는 협박이라는 것이었다.
정작 선거가 시작되니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오병윤 민노당 후보는 단일화 이후 급격한 속도로 상승세를 탔다. 지지율이 올라가자 민노당은 "이제는 (광주 남구를) 준다고 해도 안 받는다"며 자존심을 세웠다.
끝내 민주당은 중앙당 지도부가 하루 뒤 공식적으로 유감을 표명해야 할 정도의 비난까지 동원하며 "힘을 실어 달라"고 엎드렸다. 오랫동안 공생의 관계를 유지해 온 시민단체에게도 "도를 넘지 말라"며 감정을 드러냈다. 위기감의 발로였다.
인물이 나쁜 것도 아니었다. 장병완 후보는 13명의 예비후보를 제치고 당에서 영입한 인사였다. 기획예산처 장관 경력도 가지고 있다. 광주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나왔다. 물론 전남대 총학생회장 출신인 오병윤 후보와 비교하면 덜 친밀하다 할 수는 있지만 광주 남구와 별다른 인연이 없기는 오 후보도 마찬가지다. 여러 차례 선거 출마 경력이 있는 점이 오 후보의 장점이기는 하나, 17대 때는 광주 서구갑에서 18대 때는 서구을에서 출마했었다.
"이번에는 경고 수준에서, 그래도 안 변하면 다음에는 '민주당 심판'?"
광주에서의 고전은 민주당에게 광주가 가지는 상징적 의미와 동떨어져 있지 않다. 광주는 민주당의 그야말로 안방이다. 누구에게도 내줄 수 없는, 저지선 것이다. 광주를 빼앗기면 수도권은 더 볼 것도 없다.
이런 광주가 민주당에게 "배신할 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보냈다. 다른 말로는 "지금 이대로는 안 된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단기적으로는 지난 지방선거 광주시장 후보 공천 과정에서 발생했던 여러가지 '잡음'에 대한 비판이다. 광주에서 민주당은 서울 여의도의 한나라당과 다를 바 없는 권력이다. 당연히 공천장을 쥐기 위한 지저분한 다툼도, 각종 비리도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터져 나온다.
장기적으로는 민주당의 '혁신'에 대한 바람 때문이다. 민주당이 2012년 정권교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성과 변화'가 필요하다는 질책인 것이다. 민노당도 선거 과정에서 이를 적절하게 자극했다. 오병윤 후보는 선거 기간 노골적으로 "2012년 정권교체는 민주당만으로는 안 된다"며 "더 큰 승리를 위해 양보할 줄 모르는 민주당에게 경고장을 보내달라"고 호소했다.
▲ 오병윤 민주노동당 후보는 선거 기간 노골적으로 "2012년 정권교체는 민주당만으로는 안 된다"며 "더 큰 승리를 위해 양보할 줄 모르는 민주당에게 경고장을 보내달라"고 호소했다. ⓒ연합뉴스 |
결국 오병윤 후보가 얻은 44%의 마음이 민주당에 대한 완벽한 배신으로 볼 수는 없다는 얘기다. "광주 민심은 재보선에서 민주당에게 '이번에는 경고에서 그치지만 계속 무시하면 다음에는 민주당 심판이다'라는 사전 경고를 보낸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도 투표 마감 직후 기자들과 만나 "광주에서는 정신 차릴 정도로 이겼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제2야당 입지 굳힌 민노당…"졌지만 이겼다"
민노당은 창원에서의 권영길 재선, 사천에서의 강기갑에 이어 또 다른 지역구 의원 배출 가능성을 확인시키며 제2야당으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그것도 기아자동차 등 민주노총 조합원도 거의 없고 대부분의 주민이 중산층으로 광주에서 가장 민노당 기반이 약하다는 남구에서 이룬 쾌거다.
광주 현장에서 개표상황을 지켜본 민노당 이정희 신임 대표는 "민주당은 과거로 회귀하려고 했지만, 우리는 이미 정치적으로 이겼다"며 "승리한 선거였다"고 자평했다. 민노당 관계자도 "비록 졌지만 민주당 핵심 지지층에서 균열의 기미를 드러낸 것은 승리와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광주에서는 이미 2006년 지방선거 이후 시의원, 도의원을 놓고 치러진 재보선에서 민노당이 민주당과 맞붙어 대부분 이겼던 경험도 가지고 있다.
광주에서의 선전을 계기로 2012년 총선과 대선 국면에서 민노당의 위상은 한 층 더 높아질 수 있다. 앞으로는 광주 등 호남은 제쳐 놓고 나머지를 주고받는, 기존의 민주당식 야권연대 협상은 무의미해진다.
광주에서의 선전이 엄밀히 말하면 민노당 자력으로 해낸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한계는 있다. 오병윤 바람은 '광주에서의 한나라당'인 민주당을 제외한 다른 정당의 '야권연대'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더욱이 광주지역 시민단체도 민주당으로부터 "순수성을 잃었다"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오 후보를 적극 지원했다.
당연히 지난해 10월 안상 상록 재보선에서부터 민노당이 밀고 나와 지난 6월 지방선거에서 정점을 이뤘던 '연합정치'의 흐름은 더욱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민노당은 2012년 대선까지 독자성 보다는 야권연대에, 그것도 진보신당 등 다른 진보정당보다는 민주당과의 연대에 무게 중심이 쏠릴 가능성이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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