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이 하는 캐피탈에서 40~50% 이자 받는 게 맞느냐. 일수 이자보다 더 비싸게 받아서 어떻게 하나. 큰 재벌에서 이자를 일수 이자 받듯이 이렇게 받는 것은 사회정의상 안 맞지 않느냐"
180도 다른 이 두 발언은 모두 이명박 대통령의 것이다. 전자는 지난 2009년 6월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시장에서, 후자는 지난 22일 서울 강서구 화곡동 재래시장에서 이 대통령 입에서 나온 말이다.
이문동 시장에서 이 대통령 특유의 '나도 한 때는~'도 빠지지 않았다. 이 대통령은 당시 하소연 하는 시장 상인들 앞에서 "내가 옛날 젊었을 때 재래시장(에서) 노점상 할 때, 우리는 그때 이렇게 만나서 얘기할 길도 없었어"라고 회고했다.
하지만 화곡동 시장에서는 "내가 현장을 제대로 몰랐다는 것과 똑같다"는 탄식이 뒤따랐다.
과연 이 대통령의 인식이 1년 만에 바뀐 걸까? 만약 바뀌었다면 배경에는 무엇이 자리잡고 있을까?
MB, 지방선거 패배의 답을 찾았나?
▲ '대기업 압박'을 강화하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 ⓒ연합뉴스 |
6.2 지방선거 이후 지난 달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 이래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점점 구체화됐고 수위도 높아졌다.
화곡동 시장에서 도마에 오른 재벌 계열 캐피탈사 고금리 문제의 경우가 단적인 예다. 미소금융에 대출을 받으려던 상인이 대부업체와 캐피탈사의 금리를 혼동했고 캐피탈사의 금리는 30%대라는 후속 보도가 나왔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30%대 고금리"라고 못을 박았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 들어 부쩍 힘이 세진 공정거래위원회도 하도급 관행에 대해 칼을 빼들었다.
이같은 상황에 대해 진보·개혁진영에선 "진정성 없는 립서비스 아닌가"라며 의구심을 감추지 않고 있다.
2007년 대선 예비 후보 설문조사에서 '대부업법 입법 예고 이자 상한선 49%가 적정하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12명의 예비 후보 중 유일하게 '적정하다'고 답한 인물이 이 대통령이다. 취임 후에도 '비지니스 프렌들리'를 금과옥조로 삼아왔던 점을 감안할 때 충분히 정당한 의심이다.
또한 정치적 수세기마다 청와대가 '서민', '중도실용' 기치를 내걸었다가 잠잠해지면 슬그머니 접었던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다.
이번도 마찬가질까?
한국은행은 26일 올해 2분기 실질 국내총생산(GDP)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7.2% 증가한 것으로 잠정 집계했다. 1분기 실질 GDP 증가율(8.1%)과 합산한 상반기의 경제 성장률은 7.6%로 10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다. 주식시장은 이날 종가 기준으로 종합주가지수 1769.07을 기록했다. 그야말로 견조한 흐름이다.
1년 전 같으면 "경제가 전 세계에서 가장 잘 돌아간다. 조금만 참으면 서민층으로도 혜택이 간다"는 이야기가 청와대 관계자 입에서 나올 법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서민 경제 살리기가 최우선이다"는 이야기가 하루에도 몇 번씩 들린다. 차라리 "대기업을 압박하는 것이 아니다"는 이야기가 립서비스로 들릴 정도다.
부동산 문제도 그렇다. 청와대의 제2금융권 고금리, 대기업 투자 부진에 대한건설업계·보수언론이 "총부채상환비율(DTI)를 완화하라"고 아우성을 치고 과천 경제부처도 은근히 힘을 싣고 있지만 청와대가 버티고 있는 형국이다.
26일 <조선일보>는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요즘 청와대에는 '우리가 정권 내내 친(親)기업 기조로 얼마나 잘해줬는데도 대기업들은 하나도 사회를 위해 기여하는 것이 없다'는 분위기가 있다'며 '대통령은 요즘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활동과 성장을 막고 있는 것은 없는지에 대해 속된 말로 '꽂혀 있다'고 할 정도로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한 재벌그룹 임원도 "대통령 입장에선 대기업에게 배신감을 느낄수 있겠다 싶기도 하다"고 말했을 정도다.
한나라당 한 의원은 "50%에 육박하는 대통령 개인 지지율과 바닥인 지방선거 결과의 괴리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을 것이고 그 답을 찾은 것이 서민경제 드라이브가 아니겠냐"고 분석했다.
"'쇼'하는 것이라곤 보지 않는다"
이같은 상황을 바라보는 각계의 시야는 미묘하고 복잡하다. 4대그룹 중 한 곳의 전략파트에서 일하는 한 임원은 "당황스럽다"면서 "정확하게 무엇을 요구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미소금융이나 세종시 수정안 추진 당시에는 청와대의 의중이 비교적 명확히 보였지만 지금은 다르다는 전언이다. 이 대통령이 현금 유보 과다, 투자 부진, 하도급 관행 등 재벌그룹의 '문화'라 할 만한 관행들에 손을 댈 것인지에 대한 불안감이 상당해 보인다.
한나라당 내 경제통이자 개혁파인 김성식 의원은 이 대통령의 최근 행보에 대해 "아주 긍정적으로 본다"고 평가했다. 김 의원은 "대기업이 투자와 일자리를 늘리고 있는 것이 전혀 없지 않냐"고 반문하면서 "두 축이 맞물려 가야 한다"고 말했다.
김 의원은 "일자리 창출을 위한 불공정한 하도급 관행 개선 등 공정거래에 대한 제도개혁과 보육·교육·복지 시스템 마련이 맞물려 가야 한다"고 제언했다.
한성대 김상조 교수도 "쇼 하는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이 대통령도, 재정 퍼붓기나 수출대기업의 어닝서프라이즈가 아니라 중소기업에 의해 고용과 소득이 만들어질 때 한국경제가 선순환한다는 쪽으로 인식하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김 교수는 "현실인식은 올바르게 했지만 쭉 가는 것인지는 좀 더 지켜봐야 겠다"면서도 "이 대통령에게는 전임자들과 다른 두 가지 호조건이 있다"고 말했다.
첫째 글로벌한 차원에서 한국 정부의 정책적 자율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는 것. 김 교수는 "IMF때는 미국 재무부 뜻을 거스를 수 없었지만 지금은 이른바 G2든 G7이든 자기 코가 석자라 우리한테 왈가왈부할 수 없는 상황이다"면서 "한국 정부가 어떤 정책을 사용하던지 밖에서 뭐라 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말했다.
둘째 보수진영의 압박을 견뎌내기가 상대적으로 용이하다는 것. 김 교수는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 때는 정책 내용이 뭐든 간에 기업과 보수언론이 '좌파 정책'이라고 흔들었지 않냐"면서 "지금도 그런 기미가 보이지만 그때와 비교할 순 없다"고 말했다.
방향은 옳게 잡았다. 하지만…
과연 이 대통령은 '서민 드라이브'를 계속 밀고 갈 수 있을까? 지금으로선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아파트 값이 지금보다 더 떨어지면 이 대통령에 대한 압박이 더 높아질 것이 불문가지다. 종합편성채널 선정, 정권 재창출 등을 감안하면 보수 언론의 영향력도 강화될 수 있다.
야당이나 진보진영이 이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줄 것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4대강 사업을 양보하면 진정성을 인정받겠지만 가능성은 극히 낮다.
이 대통령의 뇌리에 노무현 정부 후반기의 한미FTA 딜레마가 오버랩 될 수도 있다. 한미FTA로 인해 노 대통령의 지지율이 반짝 반등하고 보수언론의 상찬이 쏟아졌지만 지지자들은 돌아섰었다. 이 대통령도 '집토끼나 잡자'는 쪽으로 돌아설 수 있다.
이 대통령의 진의를 인정한다손 치더라도로 '선한 의도'와 결과물은 별개다. 선의에 노련한 정치력과 반대를 무릅쓰고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상당한 지지율이 결합돼야 서민경제 드라이브의 결과물이 나올 수 있다는 이야기다.
김상조 교수는 "이명박 대통령은 (서민경제 드라이브로) 이념에 구애받지 않는 실용주의자의 면모를 보여줄 수 있다"면서 "앞으로 몇 달이 아주 중요한 변곡점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어쩌면 올 하반기가 '역사 속의 대통령 이명박'을 규정지을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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