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박열>의 흥행과 더불어 주인공의 동지이자 아내인 가네코 후미코가 주목을 받고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두 한일의 아나키스트 이야기는 그 자체로도 극적이다.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가해자(제국 일본)와 피해자(식민지 조선)의 이분법적 구도에 대한 비판으로부터도 비껴서 있다. 그러면서도 최근의 '항일영화'가 호명하는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에도 부합한다.
그렇다면 가네코 후미코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의 속성이 여성인가, 반일인가, 아나키스트인가, 아니면 그 집합체인가. 이 물음의 의도는 가네코 후미코가 단일한 속성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가 아님을 확인하고자 함이다. '재조일본인여성'이기도 한 후미코는 조선인과 삶을 함께 한 일본인(=민족) 여성(=젠더) 아나키스트(=계급)로서 지금 우리를 향해 손짓하고 있다.
영화의 두 주인공이 '치안유지'를 위한 국가폭력의 희생양이 되지 않았다면, 혹은 후미코가 일본 패망 후까지 살아남았다면, 거주지가 일본이든 한반도든 한일 가족을 형성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거주지가 한국이었다면 후미코는 나아가 '재한일본인여성'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식민지 시기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여성과 결혼하거나 내연관계에 있던 많은 조선인 남성들이 해방 후에 이들 여성을 데리고 귀환했다.
그것이 식민지 제국의 남녀관계였고, 독점자본주의의 계급관계였고, 조선과 일본의 민족관계였다. 재일동포 사회학자 김부자가 지적하듯이 '민족・계급・젠더 상호의 관계성'을 통해 제국/식민지를 산 여성을 바라보면, 우리는 후미코처럼 "내셔널리즘을 벗어나, 국제주의에도 대단히 열린"(김삼웅) '재조일본인여성'과 만날 수 있다. 모리사키 가즈에(森崎和江, 1927〜)도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난 고뇌를 사상적 기반으로 삼은 작가이자 사회운동가다.
조선 출생의 작가, 모리사키 가즈에
모리사키는 일본과 한국 사이의 '경계'를 의식하여, 거기에 가려진 탈식민주의의 영역을 열어젖히면서 "일본 민중에게 있어서, 조선 문제란 무엇인가"(<두가지 말, 두가지 마음> 1968)에 대해 사상으로써 첨예하게 물음을 던진 사람이다. 후미코처럼 불꽃같은 삶이 아니라 최근까지도 저술 활동을 전개했던 만큼, 모리사키는 일본에서 저명한 작가・사상가로서 위치를 굳건히 하고 있다. 다만 모리사키의 사상의 근원이 조선에서의 소녀 시절에 있으며, 그 경험을 민중과 함께 숨 쉬는 감수성과 혼종성을 통해 '경계를 넘는 연대'로 승화시킨 사상적 궤적에 대해 주목하는 것은 근래에 들어서이다.
모리사키 가즈에의 조선에서의 생활은 불우했던 가네코 후미코의 소녀 시절과는 딴판이었다. 조선인 보모에게 업혀서 고이 자란 모리사키는 지배층의 위치에 있었다. 교육자인 아버지가 근무하는 대구에서 1927년에 출생하여, 전문학교 진학을 위해 1944년에 홀로 규슈에 건너갈 때까지 조선에서 보냈다.
하지만 조선의 대지에서 성장하면서 체화된 감성이 제국주의 침략의 소산이라는 것을 '원죄'로 여긴 모리사키는, 그 고뇌를 자신의 사상 속에 녹여냈다. 학교장으로 파견한 제국주의와 학생들의 민족주의 사이에서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아야만 했던 자유주의자인 아버지의 영향도 컸다.
모리사키는 자신을 업어 키운 조선인 보모의 향내와 살결의 감촉을 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유년기의 원체험을 갖는 모리사키에게 일본은 낯선 땅이었다. 조선이 고향이고 일본이 이향이었다. 고향을 상실하여 일본이라는 이향에 동화하려 했으나 끝내 거부할 수밖에 없었던 모리사키는 일본인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일본의 참 모습을 찾아내야 했다. 그것이 '식민자 2세'를 벗어 던져 진정한 '일본인'으로서 한국을 다시 찾을 수 있는 자격이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정착한 곳이 규슈 치쿠호(筑豊) 지방의 탄광촌, 나카마(中間)였다.
탄광촌에서 <서클촌> 발행
1950년대 후반, 일본경제는 바야흐로 고도경제성장을 향해 발돋움하려 하고 있었다. 에너지 정책은 석탄에서 석유로 이행하여 산업 합리화의 명목으로 광부들의 정리해고와 폐광이 잇달았다. 치쿠호는 그 중심지였다. 모리사키는 이곳에서 광부들과 부대끼며 활동을 전개함과 동시에, 시인이자 노동운동가인 다니가와 간(谷川雁), 우에노 에이신(上野英信) 등과 함께 규슈 지역의 문화 활동 모임인 서클을 아우르는 문예지 <서클촌(サークル村)> 발행에 전념했다.
<서클촌> 발행은 3년 여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일본 사상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탄광에서 여성 광부들의 이야기를 듣게 된 모리사키에게 <서클촌>에서 '성'과 '식민지'의 문제가 다루어지지 않는 것이 못마땅했다. 모리사키는 별도로 가부장주의에 맞서 여성이 중심이 되는 <무명통신(無名通信)>을 창간했다.
조선을 떠나 온 것을 유배로 생각하는 모리사키는, '민족'과 '성'에 구애받지 않은 치쿠호 탄광의 민중의 삶 속에서 안주할 고향을 찾으려 했다. 그곳이 노동자의 이상향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대기업과 하청기업으로 나뉘어지는 '일본 산업구조의 이중성'의 기반이 되는 일본 대중의 생활권인 하급 공동사회의 전근대적 집단성과 피지배성으로 인한 단층이 겹겹이 쌓인 곳이었다. 그러한 단층을 노동자 계급이라는 하나의 집단으로 묶어내려고 하지 않았다. 연대는 동질적으로 결집하는 것이 아니라, 인접하는 의식의 대결로부터 시작된다고 보았다.
시작(詩作)이 중심이던 모리사키는 1961년에 여성 광부 이야기를 담은 단행본 <맛쿠라>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저술 활동에 들어간다. 노동/자본, 남성/여성, 식민자/피식민자의 대립 구도를 일관된 테마로 하여 <비소유의 소유>(1963), <제3의 성>(1965)을 잇달아 발간했다. 그리고 1968년에는 경주중고등학교 초대 교장을 지낸 아버지를 대신해 개교 3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한국 방문에 관한 에세이와 자신의 '원죄'에 얽힌 글을 발표한다.
이후 모리사키의 저작은 수십 권에 이른다. 민족과 계급, 성이라는 주요 테마를 가지고 여성문제, 노동문제, 천황제, 내셔널리즘, 한일관계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서 근대 일본에 대한 물음을 제기했다. 포스트콜로니얼(탈식민지주의), 페미니즘, 마이너리티 등 서구 이론이 유행하기 전부터 이미 자신을 체험과 활동과 언어를 통해 근대 일본의 사상적 과제를 풀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모리사키의 사상은 <서클촌>이 지향했던 구상과 맞닿는다. <서클촌>은 봉건적인 공동체 의식을 해체하고 개인의식을 형성하여 민주화를 이루려는 근대주의를 내세우지 않았다. "일본 전래의 공동생활체가 낳은 정신성에서는 일본이라는 민족의식의 총의에 대해서 개인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매개자의 사상> 1967)는 것을 꿰뚫어 보고 있었기에, 모리사키에게 '개인' 자체는 연대의 축이 될 수 없었다. 따라서 오래된 공동체의 연대감은 근저에 두면서, 그 내부의 단층이나 이질적인 것이 서로 부딪히면서 생기는 창조적인 에너지를 문화운동을 통해 발현하고자 했다. 무엇보다도 "일본 전래의 공동생활체가 낳은 정신성"을 넘어서는 것이 시급했다.
'경계'를 넘는 연대의 사상
여기서 모리사키의 방대한 작업을 소개하는 것은 무리이다. 다만 <박열> 을 통해 가네코 후미코가 주목을 받는 맥락에서, 한일 간의 지배와 피지배의 역사를 바라보는데 있어 시사를 주는 모리사키의 사상적 핵심을 간추려 본다.
모리사키는 탄광촌에서의 활동 위에서 민중이 지닌 이질적인 집단과의 '접촉의 사상'을 모색했다. 따라서 단순히 피지배의 비극을 가지고 한일 양국의 연대를 추구하지 않았다. 국가권력에 동원된 피지배자가 갖는 침략의 속성은 자신의 '원죄'의 근원이기도 했다. 그 속죄를 위해서도 모리사키는 식민자로서의 인간의 태도 및 의식의 전체적 구조를 드러내야만 했고, 자신도 그 속에 위치지웠다. 그리고는 "식민지주의 하에서 현지 사람들에 대한 민족성・인간성에 대한 경애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내부로부터 침식하게 될 것임이 분명하다"(<한번 본 학교> 1984)고 확신하며 자신의 아버지마저 심판해야 했다.
아버지를 대신한 모리사키의 한국 방문은, 국가권력을 매개로 하여 조선민족에 접근했던 '원죄'를 짊어지면서 "민중 차원에 있어서의 독자적인 만남"(<민중이 지닌 이질적인 집단과의 접촉 사상>1970)을 찾아나서는 여정이었다. 그것은 식민지 상황에서의 고유한 양의성을 체험한 모리사키가 "식민지 사람들의 절망을 감각적으로, 감정적으로 내부로부터 느끼고자 했기에"(프란츠 파농) 가능했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이해하려 드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모리사키에게 있어서 '가해'와 '피해'는 뒤얽혀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가해'와 '피해'를 대립적으로 보는 단순한 도식을 거부했고, 그것으로는 자기 자신을 재단할 수도 없었다.
모리사키는 지배권력에 의해 격리된 피지배자 상호의 주체적 연대의 어려움도 자각하고 있었다. "민중 차원에 있어서의 독자적인 만남"에 대해서 스스로가 파악하고 창조하려는 이질적인 집단과의 '접촉의 사상'을 통해 비춰내고자 했다. 이처럼 국가의식과의 대항을 통해서 각기 다른 민족성을 갖는 집단인 '이족(異族)'을 발견함으로써 민중이 자율적이고 이질적인 집단과 뒤섞여 만들어내는 연대관계를 추구했다.
이렇게 해서 모리사키의 연대론은 평화와 민주주의를 지향한 이데올로기에 따른 합목적적인 동원이 아니라, 민중의 직접적인 만남을 저해하는 공동체의 폐쇄성과, 그 폐쇄성이 국가권력과 산업자본에 의존하는 매커니즘을 겨냥하여 민중끼리의 '경계'를 극복하는 '월경의 사상=접촉의 사상'의 핵심에 다가선다. 모리사키가 왜구와 해녀, 그리고 '가라유키상' 등 '국경의 사람들'이 '혈연의 원리'로 구성되는 공동체의 '경계'에 사로잡히지 않고 '공동의 원리'에 기반하여 생활권을 자유롭게 확대해 나간 역사적 체험의 가능성과 창조성에 기대를 걸었던 것도 여기로부터 비롯한다.
가라유키상과 <제국의 위안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어느 정도 관심 있는 독자라면, 여기서 모리사키 가즈에가 <가라유키상>(1976)의 저자임을 눈치 챘을 것이다. '가라유키상'은 19세기 후반부터 제국주의에 이르는 시기에 주로 규슈 지역에서부터 해외로 팔려나간 소녀들을 일컫는 말이다. 구술과 치밀한 문헌 조사를 통해 '민족・계급・젠더 상호의 관계성' 속에서 일본의 팽창 정책에 빨려 들어간 여성의 고난을 커다란 스케일로 담담하지만 당당하게 묘사한 <가라유키상>은 민중사・여성사에 있어서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모리사키의 저작 중 국내에 소개된 것으로는 <쇠사슬의 바다>(2002)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이 책이 유일하다. 이외에도 모리사키 사상의 핵심을 보여주는 글이 번역됐으나(<두가지 말, 두가지 마음><민중이 지닌 이질적인 집단과의 접촉 사상>, 연구공간 수유+너머<부커진R Vol.4 휘말림의 정치학>2012) 단편적인 소개에 그쳐, 그간 우리는 모리사키의 사상을 충분히 접하지 못해왔다. 뿐만 아니라 '위안부' 문제로 인해 <가라유키상>마저 왜곡되게 받아들여 모리사키의 사상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
모리사키의 사상을 왜곡시키는데 크게 일조한 것이 문학연구자 박유하의 저서 <제국의 위안부>(2013)이다. 잘 알려졌다시피 박유하는 이 책에서 한일 간의 역사 대립을 넘어서는 방법으로, '위안부'를 '구 식민지의 피해자'가 아니라 빈곤과 가부장제로 인해 제국 일본에 동원된 존재인 '제국의 위안부'로 바라보았다. 민족보다는 계급과 젠더에 중점을 두고 '위안부'의 생성에 대해 고찰했다고 볼 수 있다. 그것 자체는 '위안부'의 다면성과 복합성을 이해하기 위한 시도로 평가할 수 있다.
문제는 저자가 <가라유키상>을 인용하면서 그것을 일본군 '위안부'의 전사(前史)로 삼는 것이다. '가라유키상'을 호출하는 것은 '공창'과 '사창'의 관계를 무화시키는 자발적이고 애국적인 존재를 통해, 그 연속선상에 있는 '위안부' 또한 국가권력에 동원된 제국의 확대에 따른 우발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보강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모리사키가 그린 '가라유키상'은 결코 그러한 존재가 아니었다. 모리사키는 '가라유키상'이 생겨나는 지역의 독특한 성 개방적인 문화 풍토를 더듬고 있지만, 그것을 악용한 '업자'들에게 분노했다(<가라유키상> 1976).
모리사키가 '가라유키상'을 취재하게 된 것은 그들이 자신과 같은 '식민자'이면서도 자기와 전혀 다른 운명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존재였기 때문이다. 모리사키는 '가라유키상'이 해외에서 아시아 여러 민족들과 살을 부대끼면서 길러낸 특유의 심상 세계를 일본에 대한 날카로운 내부 비판으로 받아들이면서 그들과 마주할 수 있었다.
모리사키가 '가라유키상'의 생생한 상흔으로부터 다양한 민족 세력의 부딪힘 속에서 개척한 인터내셔널한 심상 세계를 찾으려 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접촉의 사상'은 '제국 군인'과 '제국의 위안부'의 '동지적 관계'를 통해 생겨나지 않는다. 모리사키는 "서민의 생존과 국가의 의도와의 숙적과 같은 관계"(<가라유키상이 안은 세계> 1974)를 간파하고 있었다. 모리사키가 말하는 연대는 '제국'의 지배권력에 의해 파편화된 피해자적 만남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서로의 본질을 소통함"(<동질성 속의 이족의 발견> 1970)으로써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된다.
'국경에 가까운 여성의 역사'로부터 넘는 '경계'
모리사키 사상의 진수는 생활 집단의 시간성이 낳은 공동의 환상을 상대화하여 국가의 지배권력에 의해 저해되는 세밀화된 피해자적 만남을 거부하여 서로가 투쟁의식을 공유하는 관계를 주체적으로 확립하면서 이질적인 것과 접촉하는 것이다. 그것은 국가의식과의 대결 없이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없다(<민중이 지닌 이질적인 집단과의 접촉 사상> 1970).
이러한 이질적인 것과의 접촉을 실천한 이들이 가네코 후미코와 같은 '국경에 가까운 여성'들이었다. 후미코만이 아니라 목포 공생원에서 수많은 고아들을 키워낸 윤학자(다우치 치즈코), 서울에서 이발소를 경영하며 고아들을 돌본 모치즈키 가즈의 일생도 영화(<사랑의 묵시록> 1995, <이 땅에도 저 별빛을> 1965)나 연극(극단 美演<엄마>2015)으로 만들어져 우리는 알고 있다. 또한 우리가 도외시했던 '재조일본인여성'이나 '재한일본인여성', 그리고 재일동포 등 "국경에 가까운 여성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양 민족의 한계 타파의 기능을 수행하는 매개자의 사상"을 찾아낼 수 있을지 모른다(<방한 스케치에 붙여> 1970).
식민자로서 조선에서 나고 자란 '원죄'를 짊어지고 그 고뇌를 사상적 기반으로 삼아 '경계'를 넘는 연대의 사상을 펼친 모리사키 가즈에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모리사키의 '향수'에 대해 이제 우리가 답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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