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늦은 가을 어느 저녁에 아내가 뜬금없이 "여보, 우리 시골 가서 살까?" 물어보았다. 삽 한 번 제대로 잡아보지 않았던 나로서는 두려움도 많았지만, 도시에서 점점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고 느낄 때 귀농은 새로운 삶의 대안으로 다가왔다.
1~2년은 귀농에 한 모색과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이곳저곳을 알아보다가 2014년에 귀농본부의 '소농학교'에 입학했다. 매주 토요일을 축제처럼 보내면서 막연하지만 시골에서도 재미있게 잘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2014년 가을 어느 날, 귀농 관련 인터넷 사이트를 뒤지며 온갖 정보를 검색하는 취미를 갑자기 갖게 된 아내가 경북 상주에 임대로 집이 나온 게 있는데, 보러 가자고 해서 오게 된 상주. 임대로 나온 집이 와서 보니 아내의 지인이 귀농하며 지은 집으로, 이 지인은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며 제3자에게 매매로 넘긴 집이었다. 이 집을 구입한 사람이 1~2년 임시 거주할 사람을 찾고 있었다. 소농학교를 마치고 처음 예정보다도 1년 일찍 도시생활을 정리하고, 2015년 2월 바람이 몹시 부는 어느 날 상주로 왔다. 상주로 와서 처음 1년은 임대한 집에서 살면서 지역도 익히고 정주할 땅도 알아보는 등 탐색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따박골 자연양계 달걀 사이소
옆집이 소규모 자연양계와 더불어 서너 마리의 한우를 옛 방식으로 키우고, 지역에서 다양한 활동도 하며 살고 있어서 많은 도움을 받으며 시골생활에 빨리 정착할 수 있었다. 또 마을의 또 다른 귀농 선배의 집에서 연산오계라는 재래 닭 돌보는 일을 하면서 약간의 경제적 안정과 닭을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처음 귀농을 생각했을 때에는 무엇에 얽매이는 것이 싫어서 양계나 가축의 사육은 생각지 않았다. 그러다 옆집의 자연양계를 보면서, 또 오계를 돌보는 일을 하면서 자연양계를 시골생활의 한 부분으로 삼기로 하다. 집터와 닭장으로 쓸 터를 마을에 장만하고 집은 건축비가 가장 저렴한 샌드위치 패널을 주재료로 집을 지었다.
더운 늦봄, 초여름 날 몸은 힘들지만 꿈에 부풀어 블록을 사다 울타리 주위를 매고 닭장 둘레를 직접 철망을 쳤다. 팔이 저리고 아파서 밤잠을 설치고 더 심하면 한의원에서 침을 맞아가며 그렇게 닭장을 짓고 고려닭이라 불리는 중추된(5개월가량 키워서 알을 막 낳기 시작하는) 재래 닭을 100여 마리 씩 세 번에 걸쳐 들다. 이제 알만 쑥쑥 잘 낳아주면 된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알 낳는 숫자가 줄어들어 그 많은 닭이 보통 10개 이내, 어떤 날은 알을 두세 개밖에 안 낳는 지경에 이르렀다. 게다가 '카니발리즘'이라 불리는 종족을 공격하는 현상이 나타나 거의 매일 닭이 죽기까지 한다(한 마리를 수십 마리가 떼 지어 공격하여 순식간에 죽는다).
희망은 절망으로 바뀌고, 있는 생명은 지켜야 하니 먹이로 쓰는 싸라기, 깻묵 등은 매일 사러 나가야 했던 지난 몇 개월이 닭을 키우면서 제일 힘들었던 것 같다. 차츰 카니발리즘의 피해도 줄고 알이 안 나오는 것도 적응이 되니 견딜만해 졌다. 그러다 동지를 지나며 조금씩 산란이 늘더니, 이듬해 봄 3월이 되면서 감당 못 할 양의 달걀이 나와서 사람을 당황케 한다. 공산품이 아니니 수량이 일정하지는 않지만 계절에 따른 산란의 격차가 너무 심해서 수급 조절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앞으로 더 연구하고 책을 찾아봐야겠다.
그래가 꼬치가 되겠나?
귀농 첫해 마을 길가에 150평 밭을 빌려서 고추 농사를 지어보기로 하였다.
넓디넓은(?) 밭을 어찌 가나하고 있는데, 마을 어르신이 트랙터로 한 시간여 만에 뚝딱 로터리를 쳐주신다. 옆 동네에서 모종 농사를 하는 귀농 선배에게 고추 모종을 500여 주를 사와서 고추를 심고 마을에서 얻은 볏짚으로 두둑과 이랑을 덮었다.
풀들의 기세는 무서워 살짝 덮어진 볏짚을 뚫고 나와 고추 밭은 금방 풀 천지가 되어 갔다. 마을 어르신들이 지나가면서 모두 한마디씩 하신다. "비닐을 왜 안 씌우냐?" , "그래가 꼬치가 되겠냐?" 등. 여름내 우리 부부 그 고추밭에 엎드려 살고 다행히 고추 농사가 생각보다 잘 되었다. 마을 어르신들은 비록 농사짓는 일은 잘 못 해도 하려고 하는 모습을 잘 봐주신 것 같다. 고추건조기가 없어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햇빛을 모아 건조를 할 수 있도록 폐가구나 합판 등을 이용해 만든 햇빛 건조기를 모아 겨우 고추를 말리고 고춧가루를 낼 수 있었다. 그해 고추 농사가 끝나고 "그래도 자네 기술 있네" 하고 마을 어르신이 칭찬을 해 주시니, 왠지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경험이 고추농사에 자신감을 갖게 했다. 올해 마을에 밭을 빌려 고추농사의 양을 늘리기로 하였다. '또 한마디씩 하시겠지?' 하면서….
옛날 곶감 맛 보셨나요?
상주의 표적 농사 가공품 중의 하나가 곶감이다. 아주 많은 양을 기업적으로 하시는 분들도 여럿 있고 웬만한 농가에서도 소규모로 곶감을 건조해서 겨울철 수입원으로 삼는다. 요즘은 '눈으로 먹는다'고 곶감의 모양과 색상을 잘 내고 곰팡이 등을 막기 위하여 거의 모두 곶감을 건조할 때 유황으로 훈증을 한다. 자연에 맡겨 곶감을 건조하면 이런 훈증을 한 곶감보다는 색상과 모양이 많이 빠지지만, 곶감 본래의 맛을 더 잘 낼 수 있고, 건강에도 더 좋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옛날식으로 만들기로 하다. 귀농 첫해 마을 어르신이 사정이 생겨 당신의 감나무밭의 감을 따라고 하셨다. 그 감과 집터로 산 땅의 감나무에서 나온 감을 따서 약 5000여 개의 감을 깎아서 임대한 집의 정자에 매달았다. 그해는 11월에 비가 많이 오고 날이 춥지 않아 대규모 시설이 없는 일반 농가에서 소규모로 곶감을 건조하는 경우에 곶감을 대량으로 폐기하는 일이 생겼다. 귀농해서 적은 양의 곶감을 하는 집에서도 곶감을 하나도 못 건진 경우가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부부는 어떻게든 곶감을 건저 보겠다고 천연발효주정을 구해서 매일 곶감에 뿌려주며(이렇게 하면 곶감에 붙는 곰팡이를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 힘들게 곶감을 만들고 주변의 아는 사람과 연고 관계로 소개받아서 주문을 받았다. 곶감을 내려서 다듬고 포장을 하려고 보니, 도저히 상품으로 남에게 팔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망연자실하다가 가까운 사람부터 전화를 해서 사정을 말하고 주문을 취소해 나갔다. 그래도 어렵게 곶감을 만든 터에 모두 포기를 할 수 없어서 그중에 상태가 좋은 것을 골라 몇몇 분께 보내드리고 조금은 건졌다고 스스로 위안을 삼고 말았지만, 참 서러운 밤이었다.
그래서 집을 짓고 집 옆에 작게 곶감 건조장을 지을 때 가능한 한 곶감을 안정적으로 건조할 수 있도록 신경을 써서 만들었다. '이번엔 제대로 곶감을 만들리라' 하고 감이 익기만을 기다렸는데, 작년 가을은 감나무에 병해가 돌아서 우리 집 감이 수확하기도 전에 다 떨어져 버렸다. 이웃 동네 아는 이장의 소개로 병해를 피한 감나무 밭의 감을 샀다. 전화 한 통에 한걸음에 달려온 다른 면 소재지로 귀농한 생태귀농학교 동기들의 도움을 받아 감을 따고 귀농 선배의 저온창고를 빌려 감을 저장하며 감을 깎아 널 수 있었다. 다행히 지난겨울은 날씨가 썩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습한 날씨는 피할 수 있어 비교적 성공적으로 곶감을 만들 수 있었다. 곶감을 판매한 후, 지금까지 먹어 본 곶감 중에 제일 맛있었다는 어느 분의 문자 한 통이 그간 고생한 보람을 찾게 했다.
이렇게 특별한 책도 없이 시골로 내려와 주변의 환경과 상황에 맞춰가며 삶의 방편을 찾으며 조금씩 정착하고 있다. '돈 못 버는 것 빼고는 다 만족한다'는 처와 책 없이 만족하는 나는 이렇게 귀농 3년 차의 봄을 앞산, 뒷산, 옆 산의 골짜기를 헤매며 고사리를 꺾고 취나물도 뜯으며 닭과 씨름하고 고추밭을 만들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가을이 오면 목이 아프게 감을 따고, 깎고, 걸어서 곶감을 만들겠지.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