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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 궁녀…그들은 진정 백제의 여자들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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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 궁녀…그들은 진정 백제의 여자들이었을까"

[화제의 책] 김현아의 <그녀들에 대한 오래된 농담 혹은 거짓말>

"꽃이 지듯 애잔하고 슬프게 그녀들이 죽었다는 건 누구의 상상일까. 흔히 백제를 기억하거나 불러낼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거대한 복수의 여자들. 벼랑에서 떨어질 때도 꽃잎처럼 사뿐 추락했다는, 알 수 없는 몸을 가진 여자들은 진정 백제의 여자들이었을까."

꽃이 떨어지듯 삼천 궁녀가 강으로 뛰어내려 죽었다는 바위, 낙화암. 그러나 이 바위에서 누군가가 죽었다면 낙화암 같은 서정적인 이름이 아니라 오히려 '피바위' 같은 살벌한 이름이 더 현실적일 것이다.

그 때, 그들은 과연 그곳에 있었을까? 혹 그들에게 덧씌워진 이름은, 역사가 만들어낸 허구의 이미지이거나 어느 한 쪽의 시선으로 치밀하게 조작된 농담이 아니었을까?

<그녀들에 대한 오래된 농담 혹은 거짓말>(김현아 지음, 호미 펴냄)은 이 땅에서 살다간 여성들의 자취가 남은 공간을 '여성의 시선'으로 응시해, 역사의 왜곡된 이미지 속에 묻힌 그들의 삶과 목소리, 욕망을 불러내는 역사 기행 에세이다.

이데올로기의 치열한 전쟁터, 여성의 몸

▲ <그녀들에 대한 오래된 농담 혹은 거짓말>(김현아 지음, 호미 펴냄). ⓒ프레시안
때로 여성의 몸이 갖는 이미지는 이중적이다. 역사는 여성의 몸을 '민족', '순결', 혹은 '희생'의 상징으로 그리기도 하고, 반대로 '타락'의 상징으로 표현한다. 그렇기에, 여성의 몸은 당사자의 의지와 상관없이 치열한 '이데올로기의 전쟁터'가 된다.

김현아는 "삼천 궁녀는 역사가 여성의 몸을 어떻게 이용하는지를 보여주는 한 예"라고 지적한다. 그들은 백제의 절망을 표현하는 데 가장 '순결한 몸'이면서, 한편으론 최고 권력자를 눈멀게 해 조국을 무너지게 한 '타락한 몸'이라는 것이다. 이 이중의 이미지가 겹쳐지면서 만들어진 그들의 몸은, 우리 사회의 애국 이데올로기를 지탱하는 상징으로 대물림된다.

'의기(義妓)' 논개. 조선시대 기생은 사농공상 네 계급 바깥에 있는 가장 비천한 존재였다. 그 비천한 여성 중 한 여자를 호명하는 새로운 말이 생겨났으니, 바로 적장의 몸을 끌어안고 강으로 뛰어든 '의기(義妓)'가 바로 그것.

김현아는 비천한 기생 논개가 '민족의 딸'로 호명되면서 어떻게 가부장적 질서에 편입되는지, 훗날 역사는 어떻게 논개를 최경희 장군이 사랑한 첩으로서 비장한 로맨스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격상하는지 보여준다. 그는 논개가 '애국의 상징'으로 호명될 때, "사실과 무관하게, 그녀는 끝내 한 남성의 딸이 되거나 아내가 되어야 했다"라고 지적한다.

가부장적 민족주의에 대한 뼈아픈 통찰

먼 옛날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저자는 수요일마다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이른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한국 사회의 자기기만을 날카롭게 꼬집는다.

일본군 '위안부'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은 그들의 삶을 '소녀'와 '할머니'로만 재현한다. 그리고 그 재현 방식 속에는 파렴치한 일본군과 무책임한 일본 정부, 불쌍하고 가엾은 소녀, 연약한 할머니라는 '타자'만이 존재한다.

그렇듯 '위안부 할머니'를 그리는 드라마에서 사람들은 소녀 시절 그들이 겪었던 경험에 대해 분노하고, 늙고 병든 그들에 대해 연민하는 '관객'이 된다. 그러나 소녀와 할머니 사이에 존재하는 오십여 년의 세월, 그들의 생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처럼 드러나지 않는 그 시간들은 사실 한국인과 부대끼며 산 세월이다.

정조를 빼앗긴 '가문의 수치'로, 혹은 '갈보'로 불렸던 그 세월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언제부터 우리 사회는 일본군 '위안부'를, 미군에 의해 죽은 기지촌 여성 윤금이를 '민족의 수치'에서 '민족의 딸'로 격상했을까. 거기엔, 여성의 몸을 민족 감정의 치열한 전쟁터로 재현하고자하는 가부장적 민족주의가 숨어있지 않았을까.

삼천 궁녀와 논개를 넘어,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농담, 혹은 거짓말'은 그래서 더 잔혹하다.

오래된 농담 속에 치밀하게 숨어있는, 거짓말

"여자들의 이름을 부르는 건 때론 어려운 일이야. 계백의 부인만 하더라도 이름이 없어. 천삼백이 넘는 세월 동안 그저 '계백의 부인'이라고만 불러야 했으니까. 자연스럽고 익숙한 것들을 의심하는 눈, 서술자가 불편해하는 문장에서, 의도적으로 숨기려는 문장에서 여자들의 이야기는 찾아지는 것 같아. 오래된 농담 속에 치밀하게 숨어 있는 거짓말을 드러내는 건 풀밭에서 초록색 실을 찾는 일이지"

김현아는 역사 혹은 설화에 등장하는 상당수 여성들의 이야기가 '남성적 시선'으로 조직되어 있음을 드러내고, 시대와 불화하거나 역사가 만들어낸 허구의 이미지로 존재했던 그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오늘에 되살린다.

지난해 출간된 <그곳에 가면 그 여자가 있다>의 속편인 이 책은 역사 속 여성들은 물론, 최초의 여성 판소리꾼 진채선, <토지>와 <혼불>로 각각 한국 문학의 거목이 된 여성 작가 박경리와 최명희 등 현대의 여성 예술가들의 자취를 찾아 전국을 누빈 기록이다.

여성의 시선으로 풀어내는 21세기 '대동女지도'. 마치 다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어쩌면 하나도 모르는, 오랫동안 의심없이 이어졌지만 섬세하게 따져보면 기이하고 우스운 이야기들. 저자의 여행지를 따라가면서 그 이야기들의 새로운 면면을 듣는 것만으로도 흥미롭다. 김현아의 후속 작업이 벌써부터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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