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열도 횡단
9월 13일. 10시 45분 중국선양공항을 이륙한 NH 926편 아나항공은 오후 2시 50분 일본 나리타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대합실 문을 나서자 피켓을 들고 서 있던 이케다 상이 먼저 우리를 알아봤다. A4 용지에 마중을 잘못 기재한 듯 ‘마증’이란 표기가 재미있다.
“안녕하세요?”
“오하요 고자이마스.”
서로 상대국 말로 인사를 나눴다. 공항 대합실에서 한·중·일 국기와 현수막을 펴 들고 기념사진을 찍고, 횡단보도 건너 주차장에 대기해 놓았던 승합차에 짐을 실었다.
“저기요, 도쿄 디즈니랜드 보이시죠? 저 멀리 보이는 건 스카이 타워고요.”
이케다 상이 운전하며 손을 가리켰다.
“아, 멋지네요.”
“최 선생님, 호텔 가는 길에 저희 집에 잠깐 들르시겠습니까?”
“네. 그러시죠.”
아무래도 뭔가 집에 급한 용무가 있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일본 전통 가옥들이 가득 들어선 도심에 도착했다. 담장 옆 작은 주차장에 파킹을 하고 나와 보니 카페를 운영하는 아담한 이케다 상의 집이었다.
허름해 보이는 쪽문을 열고 들어가자 겉보기와는 아주 딴판이었다. 작은 정원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들어가는 길은 예쁜 꽃들과 예술 소품들이 나란히 자리 잡았고, 이곳 카페의 음식 메뉴를 빈티지 풍기는 낡은 목판에 분필로 기재해 놓았다.
안내를 받아 다다미 깔린 방 안에 들어서니 한쪽 방바닥을 한 단 높여 예쁜 장식물을 올려놓은 ‘도코노마’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방 가운데 식탁 위엔 초밥과 사시미, 채소 튀김, 정종 한 병이 차려져 있었다.
“별로 차린 건 없지만 맛있게 드세요.”
이케다 상의 부인과 딸이 들어와 공손하게 인사를 한다.
“네, 감사합니다. 허참, 이거 예상치 못한 과분한…….”
초밥은 추니가 제일 좋아하는 메뉴다. 간장에 겨자를 듬뿍 넣어 금세 한 접시를 비웠다. 그동안 중국에서 좁쌀죽을 주식으로 먹다가 맛난 초밥을 보니 눈이 뒤집힐 지경이다.
“카페는 저의 아내가 운영하고 있고요, 주로 이웃 사람들이 밤에 조용히 술 한잔하는 곳입니다.”
“아, 그렇군요. 정말 예쁘고 아름다운 공간입니다.”
일본 첫날 전혀 예상치 못했던 깜짝 대접을 받았다.
오후 6시. 이케다 상은 도쿄 히가시 이케부쿠로 프린스 호텔에 도착해 무거운 짐을 방까지 들어다줬다.
“이케다 상, 초면에 너무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아닙니다. 다음에 일본에 오시면 또 뵐게요.”
“이담에 한국에 오실 기회가 있으시면 꼭 연락 주십시오. 그리고 이건 작은 성의입니다.”
미리 준비한 봉투를 꺼내자 손사래를 치며 극구 사양한다. 차 문을 열고 억지로라도 주려다 실패했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암튼 이케다 상에게 정말 고맙다.
호텔 방에서 짐을 풀고 있는데 도쿄에 살고 있는 후배가 찾아와 가까운 신주쿠에서 축제가 열리고 있으니 함께 구경하자고 한다.
시내 한복판의 오쿠보 거리를 저녁 7~9시까지 교통 통제한 채 많은 사람들이 한바탕 먹고 마시고 전통 춤을 추고 있었다.
거리 축제를 마치고 호텔까지 잠깐 이동했는데 택시비가 2천 엔(이만 원)이었다. 추니가 깜짝 놀란다. 중국에서는 오백 원이면 될 텐데….
다음 날, 지하철 일일이용권 1인당 육천 원짜리를 끊었다. 이케부쿠로역에서 긴자역으로 가는 지하철 이정표에는 일본어, 한글, 영어, 중국어가 병기되어 있었다.
긴자역 2번 출구로 나오자 거리가 온통 쇼핑센터로 가득 찼다. 추니는 윈도우를 가볍게 지나치다가 점점 매장 안으로 들어가는 횟수가 많아졌다.
손님들이 가득 찬 가방 상점을 지나다가 중국 관광객들이 저마다 가슴 높이 되는 큰 여행용 가방을 한 개씩 밀고 나오는 걸 보고 놀랐다.
금강산도 식후경. 우동 가게 안에 설치된 자판기에 5백 엔짜리 동전을 넣고 티켓을 가져가니 우동 한 그릇과 김밥 두 조각을 쟁반에 담아줬다.
식당 벽면 한 뼘 넓이의 선반 위에 음식을 올려놓고 선 채로 후루룩 마셨다.
9월 15일 오전. 일본 횡단에 앞서 철지난 여름옷과 고장 난 카메라를 한국으로 부치려고 토시마 우체국을 찾아갔다.
크기에 따라 천 원에서 사천 원에 판매하는 박스 한 개를 구입해 부칠 내용물의 명세표를 적었다. 비용은 항공편으로 오만 원을 지불했다.
우체국 은행에 들러 현금자동입출금기(ATM)에 신용카드를 넣으니 연속해서 ‘error’ 표시가 떴다. 은행 창구의 권유로 미쓰비시 은행에 찾아갔으나 그곳에서도 역시 인출되지 않아 난감했다.
“길 건너 세븐일레븐 ATM을 이용해 보세요. 혹시 될지 몰라요.”
은행 소파에 앉아 걱정을 하고 있는데 여직원이 오더니 일러준다. 큰 은행도 안 되는데 편의점 은행에서 될까 생각했는데 다행히 인출이 됐다.
9월 16일. 국도 1호선을 따라 요코하마로 핸들을 돌렸다. 일본은 자전거를 차로 간주해 좌측통행이라서 자전거 백미러를 핸들 오른쪽으로 옮겨 달았다.
도쿄 시내는 의외로 교통량이 많지 않았고, 과속하거나 무리하게 추월하는 차량들도 볼 수가 없었다.
교통 선진국답게 정지선을 확실히 지키는 모습이었고, 모든 차량에서 경적 장치를 떼어낸 듯 경적 소리는 한 번도 들리지 않았다.
오후 5시. 호텔 예약 앱을 이용해 원래 가격 보다 50%를 할인해 준다는 요코하마 헤이와 호텔을 예약하고 찾아가 보니 인터넷에 게시된 금액은 세금과 아침 식사가 포함되지 않았고, 또 싱글 조건이라며 할인 가격 오만 칠천 원이 아닌 십만 사백 원을 내라고 한다.
“뭐시라? 세금 안 내고 숙박하는 사람 있어요?”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걸 꾹 참고 비가 거세지고 있어 그냥 쉬기로 했다.
자전거 두 대를 방 안으로 갖고 들어갈 수 없다고 해서 호텔 1층 출입문 옆 비상계단에 열쇠를 채워 보관했다.
여행 한 달 보름 만에 처음으로 자전거와 따로 잤다. 비 내리는 휘황찬란한 요코하마항 선술집에서 밤이 깊었다.
9월 17일. 아침 뉴스에 아소산 화산 분출이 시작돼 반경 2km 경계령이 내려졌다. 다행히 우리의 루트와는 다른 곳이다.
요코하마의 아침은 비가 내리고, TV 일기예보를 보니 태풍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호텔 현관에서 우비를 꺼내 입었다.
호텔을 나와 태평양 연안을 따라 히로시마까지 연결되는 국도 1호선을 찾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요코하마에서 고속도로 톨게이트까지 가는 길은 차량들이 엄청 많았고, 갓길이 따로 없어 가장자리 흰색 선을 밟고 달리느라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비바람이 강해 안경에 빗물이 붙어 앞이 제대로 안 보였다. 고가 다리를 건너갈 때는 거센 바람에 넘어질 것 같아 자전거에서 내려 끌고 갔다. 편의점은 패밀리마트, 세븐일레븐, 케이마트가 대부분이었는데 다행스럽게도 4~5km 간격으로 눈에 띄었다. 특히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어 큰 걱정을 덜었다.
오이소 해변의 자전거 길을 달릴 때는 파도 부서지는 소리가 너무 커서 무서웠다. 하루 종일 이렇게 멈추지 않고 내리는 비는 처음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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