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 지면에서 홍상수 감독 영화를 몇 번 다루었기에 이번에는 지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별 다른 개봉작이 눈에 띠지 않아 홍상수의 21번째 작품 <그 후>를 선택하게 되었다. 또 내 책을 두 권이나 내 준 '강 출판사'가 영화의 주요 무대라는 소문에 내가 아는 공간을 어떻게 촬영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홍상수 영화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너무나 친숙한 공간이 낯설게 등장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그 후>처럼 흑백영화인 <오! 수정>(2000)에 나오는 광화문이나 <강원도의 힘>의 설악산, <생활의 발견>의 경주 고분은 난생 처음 보는 공간 같았다.
<그 후>는 출판사 사장 봉완(권해효)이 아내 해주로부터 바람을 피웠는지 추궁을 받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시종일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던 봉완은 새벽 4시 30분에 집을 나선다. 예고편에 나오는 장면이다. 그가 아파트를 빠져나갈 때, '아빠'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목소리로 짐작해 보면 아내가 남편을 부르는 것으로, 칸 영화제 예고편의 영어자막에는 'Honey!'로 번역되어 있다. 한국 사회에서 남편을 아빠라고 부르는 경우가 아주 특별하지는 않지만, '여보' 또는 '봉완씨' 대신 '아빠'라고 할 때, 마치 딸이 부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아마도 그래서 그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을 것이다. 그가 목소리의 원인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빠'라는 소리는 일종의 환청인 것 같다. '아빠'라는 환청이 잡아 끔에도 불구하고, 그는 집으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그가 지하철역에 도착하기까지 내연녀 창숙(김새벽)과의 에피소드가 기억의 편린처럼 등장한다. 따라서 집에서 지하철역까지 가는 길은 사실은 출근길이지만, 마치 내연녀에게로 향하는 길 같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놓여야 어울릴 것 같은 이 장면에는 집을 떠나고 싶은 그의 염원이 담겨있다. 봉완이 달리기를 하다 멈추고는 엉엉 우는 장면과 함께, 삶의 비애가 담긴 인상 깊은 장면이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그 후' 봉완이 창숙과 살기 위해 집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데 아빠라는 소리에 걸음을 멈췄던 것처럼, 그는 "아내가 딸에게 파란 코트를 입혀서 새벽에 창숙과 사는 집에 들이닥쳤을 때,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집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딸을 보자마자 나는 내 인생을 포기하기로 했다"고 덧붙인다. 이 영화의 중간쯤, 창숙이 둘 사이를 아내에게 밝히지 못하는 봉완에게 "비겁하다"고 비난을 퍼부을 때, 봉완은 창숙에게 휴대전화의 '딸 사진'을 보여주려고 한다. 여기에 출판사 직원 아름(아버지가 아름답다고 해서 지어준 이름이라고 한다)이 '아버지가 집을 떠났고, 엄마와 이혼했고, 혼자 살다 외롭게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 설정이 더해진다.
홍상수는 <씨네21>(2017/07/06)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에서는 영화 외적인 부분들이 더 부각되기도 해서 고충이 있을 것 같다"는 질문에 "하나의 영화와 그 영화를 만든 사람을 연결해보는 것이 그 영화를 보는 데 도움이 되는지에 대해 제 경험으로는 부정적입니다. 사람도 영화도 이미 쉬운 게 아니고, 거기다 그 둘의 연결점을 창조적으로 발견하는 것, 그래서 그냥 둘을 각자로 놔두는 것보다 나은 어떤 시각을 얻는다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처럼 보입니다"라고 답했다. 이 말에 백분 동의하면서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영화에서 한 번도 실제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처음과 끝을 장악하고 있는 딸의 존재를 주목하게 된다. 그래서 이 영화가 홍상수가 자신의 이해를 구하기 위해 딸에게 보내는 편지 혹은 변명 같다는 생각을 해봤다.
내 기억이 맞다면, 홍상수 영화의 주인공이 자식 때문에 연애를 멈춘 적은 없는 것 같다. 또 주인공의 아내가 이런 식으로 등장한 적도 없는 것 같다(아울러 인물들의 이름도 낯설다). 남편의 외도를 알아챈 해주는 창숙을 만나려고 출판사로 찾아온다. 그녀는 아름을 창숙으로 오해하고 그녀의 뺨을 때린다(아름과 창숙은 어딘가 비슷해 보이는 구석이 있다). 봉완은 해주와 아름을 한 자리에 앉혀놓고 해명을 하며 오해를 풀려고 한다(장면1). 이 장면은 정말 아이러니한데, 아름을 연기하는 배우가 김민희이기 때문에 오해가 아닐 수도 있게 된다. 그 장면을 연기하게 한 홍상수, 그 연기를 해낸 김민희,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아름은 봉완의 아내도 애인도 아닌, 처음 출판사에 출근한 직원일 뿐인데, 여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한다. 다시 말해서 삼각관계를 다룬 이야기에서 그녀는 등장하지 않아도 되는 인물이다. 이런 예외적인 설정이 홍상수 영화의 묘미이기도 하다. 해주가 질투의 화신으로서, 창숙이 유부남을 사랑해 괴로워하는 내연녀로서, 삼각관계 멜로드라마의 진부한 전형 같은 역할을 하는데 비해, 아름은 홍상수 영화의 여주인공다운 면모를 드러낸다. 뿐만 아니라 해주가 아름에게 사과는 커녕 끝까지 의심하는 장면이나 창숙이 아름을 이용해 자신의 존재를 해주에게 숨기려고 하는 장면 등을 통해, 두 여성은 은근히 부정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그래서 두 여자 모두 봉완 같은 홍상수의 남자주인공들이 찾아 헤매는 진짜 짝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반면 아름은 자신의 신념과 견해를 피력하면서, 봉완과 대화를 나누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들의 대화를 통해, 아름은 확신에 찬 강한 면모를 드러낸다. 그녀는 출판사에 하루 출근하고 나중에 잠깐 들렀을 뿐인데, 봉완이 겪을 일들을 다 알게 된다. 그녀는 또 모든 등장인물들 가운데 우리가 신상명세를 가장 잘 아는 인물이기도 하다.
모든 사건이 벌어진 '그 날' 이후, 아름이 문학상을 받은 봉완을 축하하기 위해 출판사를 찾아온다. 이상하게도 봉완은 아름과 그 날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떠나가는 그녀에게 책을 선물한다. 위의 인터뷰에 따르면, 홍상수는 "원래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이라는 책을 생각했는데 촬영장소인 출판사에는 그 책은 없고 <그 후>가 있어서 이 장면에서 쓰게 되었다"고 말한다. 지난 3월에 개봉한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유부남 감독 상원은 사랑에 빠졌던 여배우 영희에게 안톤 체호프의 단편 <사랑에 관하여>가 삽입된 책을 선물한다. 그는 책의 한 구절을 읽어주면서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려고 한다. <그 후>에서 봉완이 원래 주려고 했던 책은 <마음>이었다. 플롯에는 전혀 드러나지 않고 있으나 영화의 마음은 아름/김민희을 향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그녀가 눈 오는 날 밤 택시를 타고 가는 장면에서(장면2), 그녀가 출판사를 떠나가는 눈 쌓인 길의 장면에서(장면3), 마음이 드러나 보이는 것 같다. 김형구 촬영 감독의 솜씨가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그 마음이 없었다면 그토록 아름답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므로 김민희가 출연하면서 홍상수 영화에 미감이 점점 더 부가되는 것 같다고 주장하고 싶다. <그 후>는 한국영화에서는 너무나 드물게 만날 수 있는 너무나 아름다운 흑백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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