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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을 빼야 할 때는 빼는 것도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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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을 빼야 할 때는 빼는 것도 용기"

김민웅의 세상읽기 <163>

기원전 5세기 중엽, 중근동 지역 전체를 제패한 제왕 다리우스의 아들 크세르크세스가 이끈 페르시아의 대군은 그리스를 함락시키는 데 성공하지 못합니다. 이른바 역사에 기록된 "페르시아 전쟁의 결말"이었습니다.

이는 당시 대제국의 위상을 지니고 있었던 페르시아로서는 일대 치욕이었지만 그리스로서는 문명의 독자성을 유지하는 데 있어 이루 말 할 수 없이 중요한 고비였습니다.

하지만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역사가 우리에게 전하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의 쟁투는 그리스의 대통합을 그리스 북부의 마케도니아 출신 알렉산더에게 넘기게 되는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페르시아 전쟁이 있은 지 100년 뒤인 기원전 333년은 그때까지의 그리스와 중근동 지역의 판도를 완전히 뒤집는 역전이 벌어지는 기점이 되었습니다.

알렉산더는 오늘날의 터키인 당시 소아시아 지역과 지금의 팔레스타인인 페니키아는 물론이고, 이집트 제국을 점령하고 지중해 연안에 자신의 이름을 본 뜬 도시 알렉산드리아를 세워 문명의 새로운 융합이 이루어지는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그로서는 군사적 정복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새로운 문명의 역사를 여는 것에 더 큰 관심을 쏟았던 것입니다.

그런 알렉산더의 문명적 호기심과 왕성한 야망은 따라서 이집트 제국에서 멈출 수 없었습니다. 유프라테스 강을 넘어 티그리스 강을 끼고 다시 바빌론과 페르시아의 시원인 박트리아, 그리고 인더스 강 상류의 인도 접경까지 갔던 그에게 펼쳐진 고대 페르시아 문명은 일대 충격이었습니다. 이 원정의 과정은 그에게 문명의 다양성과 독자성에 대한 깊은 이해를 그로 하여금 갖도록 합니다.

한번 갔던 길로 다시 되돌아 갈 수 없다고 고집한 알렉산더는 진로를 달리 잡아 인더스 강 하류를 거쳐 페르시아 만 접경지대를 돌아 바빌론으로 귀대합니다. 동방원정 10년 만에 돌아온 바빌론에서 알렉산더는 서른둘의 나이로 사망하지만, 그리스 북부의 작은 나라 마케도니아 출신의 젊은 제왕은 문명사의 판도를 완전히 바꾸는 경이로운 결과를 성취합니다.

그것은 어느 특정 문명이 일방적으로 주도권을 갖는 방식이 아니라 그리스 문명과 페르시아 문명의 융합이었고, 이로써 동과 서를 오가는 새로운 문명의 통로가 건설됩니다.

그 뒤 "실크 로드"라고 하는 고대 문명사의 교류도 따지고 보면 이렇게 기원전의 그 치열했던 역사에 그 오랜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기원전 1세기 중엽 중국의 장건이 서역 교류에 나서는 대장정도 이러한 기초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오늘날 미국의 중동정책은 이러한 문명의 새로운 융합과 창조와는 전혀 거꾸로 가는 진로를 택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정복 전쟁이었지만 알렉산더의 문명사적 인식보다 훨씬 후퇴한 모습입니다.

재판정에서 보였던 사담 후세인의 격노는 다리우스의 후예를 떠올리게 한 장면이기조차 했습니다.

6자 회담의 중심에 서 있는 한반도는 이러한 문명의 새로운 발원지로 자신의 위상을 세워나갈 수 있을까요? 평화를 통한 문명의 건설, 그걸 위해서라도 침략전쟁에서는 이제 발을 빼는 선택이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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