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애미, 애비도 몰라보는 X"
이런 욕을 30년을 들었다고 합니다. 호주제 폐지 운동, 군가산점제 폐지 운동, 반성폭력 운동, 가정 폭력 근절 운동, 반성매매 운동, 여성 노동 운동, 성평등 복지 운동, 여성 장애인 운동, 이주 여성 운동, 여성 정치 세력화 등 지난 30여년간 여성운동을 함께 해 온 이들은 언제나 커다란 저항에 맞서 싸워야만 했습니다.
호주제 폐지(2005년)는 반세기에 걸친 싸움이었으며, 군가산점제 폐지(1999년)는 38년, 가정폭력방지법이 제정(1997년)되기까지는 15년이 걸렸습니다. '유교적 가부장제'가 '유구한 전통'으로 칭송돼 온 한국 사회에서 여성운동을 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지난한 일입니다.
지난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수많은 젊은 여성들이 거리에 나와 "나는 이렇게 살아남았다"고 증언했으며, 이들의 목소리는 격렬한 '여성혐오'에 맞부딪혔습니다. 한국 사회의 많은 여성들은 신체폭력, 언어폭력, 각종 편견, 차별과 배제가 그물망처럼 드리워진 일상 속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입니다. 여성운동이 지난 30년 뿐 아니라 앞으로의 30년을 고민해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1987년 창립한 한국여성단체연합(공동대표 : 백미순, 김영순, 최은순)이 5일 <한국여성단체연합 30년의 역사> 책을 내고 북콘서트 '어메이징 허스토리-여성운동 30년'을 가졌습니다. 각 운동을 대표하는 21명의 집필진이 1년 8개월의 작업을 통해 완성한 책입니다. 북콘서트에서는 책에는 담지 못한 30년 운동의 뒷이야기들을 운동을 이끌어온 활동가들을 통해 직접 들었습니다.
"서울시 앞에서 보수단체들이 집회를 하면 '박원순, 이 년 나오라'고 윽박을 지른다"는 너스레로 축사를 시작한 박원순 서울시장은 "여성운동이 없었다면 우리 사회가 이만큼 평등한 사회가 됐을까 생각한다"며 "해도해도 끝이 없는 게 인권과 평등 세상을 위한 노력이다. 열심히 여러분 곁에서 돕겠다"고 했습니다.
이숙진 여성부 차관은 "이제 30년의 역사를 바탕으로 실질적인 성평등 사회를 위한 더 힘차고 젊은 새 역사를 써나가야 할 것"이라며 "어메이징 허스토리를 만들어오신 수많은 분들께 존경을 전한다"고 축사를 했습니다.
여성연합의 영원한 홍보대사로 불리는 배우 권해효 씨는 "2002년 딸을 낳고 홍보대사를 맡아 2년 동안 전국의 대학을 다니면서 호주제 폐지 운동에 대한 얘기를 했다"며 "당시 보험회사 광고를 찍었는데 광고주가 나 때문에 욕을 먹는 일도 있었다. 호주제가 2005년 2월 헌법 불일치 결정이 나고 3월 국회 본회의에서 폐지가 통과됐을 때, 정말 뜨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고 당시 경험을 말했습니다.
87년 6월항쟁 당시 전경들에게 꽃을 달아주며 여성운동이 비폭력 평화 시위를 주도했던 기억(왕인순 서울여성노동자회 이사장), 호주제 폐지 운동을 하면서 보수 유림들이 시위 현장을 찾아와 욕설을 하는 등 반발하던 일(남인순 국회의원), 매 맞아 죽은 여성들의 위령제를 지낸 일(정춘숙 국회의원), '아내폭력 추방운동'이 '가정폭력 추방운동'으로 본질이 바뀌는 용어로 정착이 된 일에 대한 아쉬움(박인혜 성공회대 연구교수), 1997년 IMF 당시 여성 노동자들이 가장 우선적으로 해고되면서 여성 실업자들을 지원하는 활동(정문자 전 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 등이 얘기됐습니다. 가정폭력방지법, 성매매방지법 등 여성관련 법안을 만드는데 노고를 아끼지 않은 이찬진 변호사에 대한 감사의 말(정미례 성매매문제해결을위한 전국연대)과 박수가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미경 성폭력상담소 소장은 13년간 의붓아버지에게 성폭력을 당하다 결국 그 아버지를 살해한 김보은-김진관 사건(1992년)에 대한 일화를 들려주기도 했습니다.
"김진관 씨의 아버지가 구속 중인 김보은 씨의 면회를 가고 싶다고 해서 구치소에 모시고 갔다. 어떻게 보면 내 아들을 범죄에 끌어들였다며 원망할 수도 있는 보은 씨를 만나 이 아버지께서 '13년 동안 너무 고생이 많았다. 밖에서 많은 분들이 너희를 도와주니 용기를 내라. 밥 잘 먹고 건강히 있으라'는 말을 하시더라. 그 아버님의 목소리와 표정은 저에게 반성폭력 운동의 하나의 표상이 됐다. 지금도 해이해졌을 때 꺼내보는 내 마음의 보석상자다."
이주 여성, 장애인 여성, 한부모 가정, 미혼모, 성소수자 등 앞으로 30년 여성운동이 더 이해와 감수성을 높여야 하는 과제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또 "돈이 없어 집(봉천동)에서부터 사무실(충정로)까지 걸어서 출퇴근해야 했던 활동가들의 급여 문제" 등 조직과 재정에 대한 현실적인 문제도 지적됐습니다. 나이, 학력, 계층, 지역 등 여성들 간의 차이에서 오는 인식의 격차는 한국 페미니즘 역시 피해갈 수 없는 숙제이기도 합니다.
이날 자매애, 공감, 연대에 기반한 '어메이징 허스토리'를 들으며 지나온 30년, 그리고 앞으로 30년을 떠올릴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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