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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오드리 헵번 유전자를 찾는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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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오드리 헵번 유전자를 찾는 까닭?

[안종주의 안전사회]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의 유전자 변화 연구

<로마의 휴일>, <티파니에서 아침을>하면 떠오르는 배우가 있다. 오드리 헵번이다. 20세기를 풍미한 이 세기의 여배우는 자그마한 얼굴에 큼지막한 눈, 오뚝한 콧날을 지닌 이목구비로 영화팬뿐 아니라 전 세계인의 눈길을 오랫동안 사로잡았다. 고인이 된 지 오래 되었지만 아직도 그의 모습을 잊지 않고 있는 이들이 지구상에 많다.

'안전사회'는 영화나 영화배우 이야기를 다루는 코너는 아니기에 역사적 인물이 된 그를 이 칼럼에서 소환한 것은 여배우 오드리 헵번이 아니라 과학, 더 엄밀하게는 유전학의 소재가 된 그를 소개하기 위해서다. 헵번은 네덜란드 출신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이른바 '네덜란드 대기근'으로 알려진 사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이다. 그는 뭇 남성들의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가냘픈 체구를 지녔다. 이는 대기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44년 11월에 시작돼 1945년 늦봄까지 이어진 네덜란드 대기근 시기에 굶어 죽은 네덜란드인은 2만 명이나 됐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고난의 시기를 풀과 튤립 구근으로 버텼다. 헵번을 포함한 이들은 하루 적정 열량의 30%에 불과한 음식으로 목숨을 이어갔다. 당시 헵번은 16살이었다. 마른 몸집과 나쁜 건강을 비롯해 그 후유증은 평생 그를 따라 다녔다.

2차 대전 때 대기근 겪은 네덜란드인들, 과학자의 사랑을 받다

네덜란드 대기근을 겪은 집단은 당시를 떠올리기도 싫은 악몽으로 여긴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이 역사적 사건의 생존자를 매우 훌륭한 연구집단으로 대접한다. 매우 짧은 시기에 영양실조를 경험한 대규모 집단을 찾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2차 대전 뒤 네덜란드는 선진국이 되어 훌륭하고 꼼꼼한 보건 관리와 기록 관리를 하고 있는 국가라는 사실이 연구자들을 기쁘게 했다.

이 집단을 연구한 결과 몇 가지 새롭고도 놀라운 사실들이 드러났다. 작게 태어난 아기는 평생 동안 몸집이 작았다. 비만율도 일반 인구 집단보다 매우 낮았다. 이들은 40여 년 동안 원하는 음식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었지만 살이 찌지 않았다. 요즘 비만으로 고생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정말 부러워할 대상들이다.

놀라운 것은 임신 초기에만 영양실조를 겪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아기들은 외려 비만율이 평균보다 높았다. 다른 건강 문제가 생기는 비율도 더 높았다.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태아가 자라는 동안 겪었던 어떤 일이 수십 년 후까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임신한 집단에서 일어난 어떤 일이 자식뿐만 아니라 그 자식의 자식, 즉 손자(녀)에게까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오늘날 후성(後性)유전이라고 부르며 이를 연구하는 학문을 후성유전학(epigenetics)라고 부른다. 후성유전학은 최근 생물학에서 혁명을 일으키는 새로운 분야이다. 유전적으로 동일한 개체, 다시 말해 쌍둥이를 과학적으로 엄밀하게 분석했는데 똑같지 않다면 이는 후성유전학이 작용한 결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유전자는 같은데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 다르다면, 즉 유전형은 같은데 표현형이 아주 다르게 나타난다면 후성유전이 작용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참고로 후성유전학의 개념과 최신 성과는 네사 캐리가 2011년 저술해 2015년 한글로 번역된 <유전자는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원제 The Epigenetics Revolution)>에서 잘 설명하고 있음).

유전자 염기에 메틸화가 일어나면 놀라운 변화 생겨

과학자들은 유전자란 대본이 있음에도 최종 연극의 내용이 아주 다르게 나타나는 데는 그 어떤 메커니즘이 분명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 세포에 들어 있는 유전자, 곧 DNA는 다른 것이 전혀 섞이지 않은 분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디엔에이를 이루고 있는 네 가지 염기(ATGC) 가운데 시토신(C)에 메틸기와 같은 작은 화학적 기(基, group)가 들러붙을 수 있고 그렇게 되면 그 유전자 부위는 완전히 다른 기능을 보인다.

이를 축구에 비유해보자. 포르투갈의 루이스 피구는 평소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는 세계적 선수다. 한데 월드컵 축구경기에서 대한민국의 송종국이란 찰거머리 수비수가 딱 달라붙어 다니자 전혀 다른 경기 모습을 보여주었다. 자신의 능력을 거의 펼치지 못해 슛도 한번 변변하게 못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공 자체도 잘 잡아보지 못했다. 완전히 다른 모습의 피구가 돼버렸다.

후성유전학은 환경이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어릴 때 혹은 어른이 되어서도 끔직한 일을 경험한 사람들은 뇌 속에 이를 오랫동안 기억하면서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는다. 우리도 기근이나 강력한 유해물질에 노출되면 유전자 염기서열이 바뀌지는 않더라도 염기에 특정 기가 달라붙으면서 새로운 패턴의 유전자 발현이 일어나고 그 패턴은 오랜 세월 그대로 남는다.

과학자들은 후성유전의 증거를 생쥐 등을 대상으로 한 동물실험을 통해 정신분열병, 류머티즘성관절염, 암, 만성통증 등 다양한 질병과 흡연, 알코올 중독 등에서 찾아냈다. 최근에는 네덜란드 대기근을 겪은 생존자들을 대상으로 DNA 메틸화(-CH3) 패턴(이는 후성유전을 일으키는 대표적 패턴임)을 조사한 결과 대사에 관여하는 핵심 유전자들에서 이런 변화가 일어났음을 찾아냈다.

서울대 성주헌 교수,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의 유전자 변화 연구 시작

우리 과학자들도 최근 후성유전 연구를 벌이고 있다. 서울대 보건대학원 성주헌 교수팀은 정부기관으로부터 연구비를 지원받아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에게서 독성물질인 가습기살균제 성분 가운데 대표적이며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낸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에 장기간 다량 노출된 피해자의 디엔에이(DNA)에 메틸화 패턴이 생겼는지 여부를 살펴보는 연구를 시작했다.

성 교수는 가습기살균제 성분이 우리 몸속에 들어오면 이를 중화 내지는 대사하기 위한 메커니즘이 작동할 가능성이 있고 이 때 대사에 관여하는 특정 유전자 부위에 후성유전 변형, 즉 메틸화가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어떤 부위에 그런 패턴이 일어났는지를 찾으려 하고 있다.

이 연구는 그 성과에 따라 피해자 찾기와 가습기살균제 사용(노출) 여부를 가리는데 중요한 잣대 구실을 할 수 있다.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했다며 피해신고를 해온 사람이나 가족 가운데 가습기살균제를 구매한 영수증을 보관하고 있지 않거나 구입한 마트 등에서 그 기록을 받아 제출하지 못하는 이들이 꽤 많다.

살균제 구매 증빙 없는 신고자들, 후성유전학에 마지막 기대

가습기살균제가 처음 시장에 나온 때가 1994년이어서 워낙 오랜 세월이 지나 가습기살균제 참사의 실체가 드러났다. 여기에다 그 뒤에도 오랫동안 정부의 안일함 때문에 뒤늦게 피해신고를 한 사람들 가운데 사용 증명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해 애태우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만약 가습기살균제 성분이 노출자의 몸 디엔에이(DNA)에 비노출자와는 달리 디엔에이(DNA) 메틸화라는 흔적을 남겼다면 이는 거의 영구적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구매기록을 제시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유전자 검사를 통해 실제 사용을 증명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첨단과학기술은 이미 확고하게 구매 증명 기록을 가지고 있는 신고자들에게는 사용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또한 후성유전이 가습기살균제 피해 신고자들에게 적용된다 하더라도 이를 실제 피해 질병과 바로 연결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도 짚어야 할 것이다. 가습기살균제를 구매해 사용하고도 이를 증명할 길이 없어 고민하고 화가 잔뜩 나 있는 이들에게 오드리 헵번 유전자가 구원의 손길을 내밀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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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주 박사는 <한겨레> 보건복지 전문기자를 지냈으며,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8년부터 <프레시안>에 '안종주의 위험 사회' '안종주의 건강 사회' '안종주의 위험과 소통' 연재 칼럼을 써왔다. 석면, 가습기 살균제, 메르스 등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각종 보건 및 환경 보건 위험에 관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시민들과 소통하며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석면, 침묵의 살인자> <위험 증폭 사회> 등 다수가 있으며, 최근 코로나19 사태를 맞이해 <코로나 전쟁, 인간과 인간의 싸움> <코로나19와 감염병 보도 비평>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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