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을 생각하고 "이웃하는 존재"들과 공존하는 삶
설악산 오색케이블 사업이 다시 '인용'되어 사업이 재개된다는 씁쓸한 소식이 들려온다. TV를 보니, 대규모 재개발 아파트 공사로 근처 초등학생들이 통학로도 막히고 날리는 먼지에 병원을 찾는 어린 학생들이 많다는 뉴스가 나온다.
엊그제 내가 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하면서 길가의 회화나무 가로수들이 몇 그루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서울시에 민원을 냈다. 이전에도 가게를 하는 사람들이 가로수가 간판을 가려 장사가 안 된다며 가로수를 죽이는 경우가 있었다. 민원을 넘겨받은 구청에서도 고의로 죽인 것으로 의심이 되어 죽은 가로수의 시료를 채취해 증거가 나오면 수사의뢰하겠다는 답변이 왔다.
내가 사는 동네에서 하루가 멀다 않고 리모델링이니 빌라 신축 공사가 이어진다. 자욱한 먼지에 소음에 대형공사차량이 수시로 좁은 골목길을 다녀 위험하고 시끄럽다. 자기의 편의와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들의 권리와 환경을 파괴하는 것은 최대한 자제되어야 할 테지만, 그치지 않는다. 자동차가 신분 과시의 상징으로 된 지는 이미 오래다. 그러나 자동차는 배기가스와 냉난방 가동으로 인하여 미세먼지 형성의 주요 오염원이고 타이어 마모로 인한 미세먼지 역시 문제다.
남에 대한 배려, 그것이 한 사회의 시민의식 수준을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가 되어야 할 일이다.
우리 모두 잠시 머물다 가는 '나그네'일 뿐이다
중국 당나라의 시인 이백은 "夫天地者(부천지자)는 萬物之逆旅(만물지역여)요, 光陰者(광음자)는 百代之過客(백대지과객)"라 읊었다. 무릇 천지라는 것은 만물이 잠시 머무는 여관이요, 세월이라는 것은 장구한 시간 속에 그저 잠깐 왔다가는 나그네일 뿐이라는 뜻이다.
나는 거창하게 환경운동을 해본 적도 없다. 다만 내가 이 지구에 손님으로 잠시 와서 머물면서 최대한 오염시키지 않고 조용하게 떠날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스마트폰도 없으며, 집에 전기밥솥도 전자레인지도 없다. 종편 거부운동을 하지 않지만 시청은 하지 않는다. 왜냐면 TV를 창문에 안테나를 설치해 보기 때문에 종편 시청이 아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음주운전 걱정도 없다. 자동차운전면허증이 없다.
좀 속도를 늦춰 천천히 공존의 길로 가자
이제 우리도 "빨리 빨리'의 속도에서 벗어나 좀 천천히 살아가는 법을 배울 일이다. '천천히'는 '川川'으로부터 비롯된 말로 추정된다. 즉, 유유히 흘러가는 냇가의 물처럼 느긋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한나라 양웅(揚雄)의 <太玄·難>에 "大車川川, 上輆於山, 下觸於川."라는 문구가 있다. 즉, "커다란 마차는 천천(川川)하여, 위로는 산에 거리끼고, 아래로는 내에 닿는다"라는 뜻이다. 즉, "천천(川川)이라는 말은 '무겁고 느릿느릿한 모습'을 의미한다. 냇가의 흘러가는 물은 여유롭고 유유히 굽이굽이 흘러 내려간다. 결코 앞뒤를 다투는 일 없이 차례차례 함께 더불어 흐르고, 그러면서도 쉬지 않고 내려간다.
그저 앞만 보고 빨리 달리는 '속도의 삶', 이것은 대개 파괴와 공허한 과시와 허영 그리고 결국 질병과 자기 파멸을 낳는다. 이제 눈을 들어 천천히 주변 경치도 구경하고 다른 사람과 환경도 배려하면서 이웃의 사람과 동물과 벌레 그리고 풀잎까지 함께 공존하는 삶의 방식을 생각할 때다.
우리는 아직 박정희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주변 곳곳에서 행해지고 있는 '파괴'와 '오염' 행위는 자제되어야 한다. 공장도 별로 없는 전북지방이 전국에서 가장 미세먼지 오염이 심한 곳으로 나타났다. 바로 새만금 개발 때문이다. 탐욕이 빚어낸 비극이다.
우리는 아직 박정희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 개발만능주의와 성장지상주의의 신화는 우리 주변에 여전히 강력하다. 민주주의에 대한 박정희의 파괴는 그나마 잘 부각되어 있어 모두가 그 폐단을 인식하고 있지만, 박정희가 남긴 또 하나의 중요한 폐단인 개발주의와 성장주의는 극복하기보다 오히려 갈수록 더욱 숭앙되어 확대되고 있는 형국이다.
이제 우리 스스로의 공동체와 후손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지구를 위하여 "개발 중심의 사고방식"을 멈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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