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탄가루 휘날리며
9월 5일. 루룽현을 떠나 친황다오로 가는 길은 고개가 많고, 대형 화물 트럭들이 쉴 새 없이 오가고, 온갖 잡동사니가 도로 위에 널려 있어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게다가 석탄을 실은 차량들이 덮개를 제대로 덮지 않아 가루가 바람에 휘날리며 우리를 하루 종일 괴롭혔다.
눈이 몹시 따가워 잠깐씩이라도 꾸욱 감았다가 뜨기를 반복했지만 눈물이 계속해서 줄줄 흘러내렸다. 눈동자를 돌리면 서걱서걱하는 자극이 느껴지는 게 연탄 가루가 눈 속에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잠시 도로변에 쉬면서 얼굴 가린 버프를 내리는 순간 우린 서로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버프와 안경 사이에 시커먼 석탄가루가 마치 다크서클처럼 소복하게 쌓여 있었고 두 눈은 마치 토끼 눈처럼 빨갛게 충혈돼 있었다.
친황다오에 들어서자 도시가 마치 유럽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자아냈다. 허베이성 동북부에 위치한 이 도시는 시황제가 이곳을 순시한 고사에서 생긴 지명이란다.
역사책에서 배웠던 발해만, 즉 보하이만(渤海灣)과 접해 있었는데 중국 북부 연안의 주요한 항로 역할을 하는 도시라고 한다.
발해는 역사학자들 간에 의견 차이는 있지만, 우리나라 대조영이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이 지난 뒤인 698년에 건국한 나라로서 926년까지 한반도 북부와 만주, 연해주에 존속하던 고대 국가라고 배웠던 곳이었다.
아직 갈 길이 먼데 연일 장거리를 달렸더니 허벅지가 높은 산꼭대기를 갑자기 뛰어 올라온 것처럼 뻐근하다.
‘늘 2% 부족한 듯 멈추자, 멀리 가려거든 천천히 가자.’라는 다짐을 요 며칠 동안 위반했다. 몸을 추스르고자 친황다오시의 여의산해 반점에 여장을 풀었다.
다음 날 아침. 숙소에서 1km 거리에 ‘죽음의 바다’라고 불리는 발해만에 나갔다. 저만치 대형 선박들과 컨테이너 작업장들이 보이고, 일부 구간은 철망으로 일반인들의 출입을 제한하고 있었다.
추니는 들어가지 말라는 철망을 뚫고 들어갔다가 결국 경찰의 저지를 받고 다시 쫓겨 나오느라 쩔쩔맸다.
발해만의 일부 구간은 해수욕장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오염으로 죽은 바다에서 왜 해수욕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실 발해만은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어족의 창고로서 한 해 3만 톤의 고기가 잡혔다고 하는데 이젠 겨우 3천 톤에 불과하다고 하니 오염의 심각성을 알만도 하다.
물의 색깔은 어떨까? 푸른색도 아니고 붉은색도 아니고 황색과 회색의 중간색으로 보였다.
발해만 연안은 높은 빌딩들로 에워싸여 있어 마치 부산의 해운대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제 그만 숙소에 들어가 쉬고 싶은데 추니는 자리를 뜨지 않고 난간에 앉아 먼 바다만 내다보고 있다.
추니는 바다를 좋아한다. 서산 갯마을이 고향이라서 해물을 좋아한다. 반면, 나는 산을 좋아한다. 원주 치악산 기슭에서 자라 산나물을 좋아한다.
35년 전, 우리는 10월 3일 탁구장에서 처음 만나 50일 뒤인 11월 22일 예식을 올렸다. 신혼여행으로 설악산 울산바위를 올라가느라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
결혼 전 짧은 만남 동안 평생 반려자가 될 만한 사람임을 얼마나 파악할 수 있었을까.
그렇게 위험해 보였던 결혼은 차츰 살아가면서 서로의 습성들을 알게 해 주었다. 추니가 후회를 많이 했겠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을 게다.
“해 저물어요. 들어갑시다.”
“…….”
추니는 여전히 아무 말 없이 먼 바다만 쳐다보고 있다가 불쑥 말을 꺼냈다.
“그런데 ‘젼이(딸의 애칭)’는 요즘 무슨 일 때문에 야근을 한데요?”
애들 걱정에 빠져 있었던 모양이다.
“야근 할 때도 있지. 젊었을 때 열심히 일해야지 뭐.”
“집 화분에 물이 다 말라 버렸을 텐데.”
“물 잔뜩 주고 왔으니 괜찮겠지, 뭐.”
저녁노을에 붉은 꼬리를 길게 단 비행기가 동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아마 한국으로 가고 있을 거야.”
갑자기 집에 가고 싶은 생각이 치밀어 올랐다. 애들도 보고, 치악산 자락도 걷고, 탁구도 치고, 음악 동아리 친구들과 연주도 하고, 식초 듬뿍 넣은 파 무침과 삼겹살에 소주 한잔 마시고 싶다.
“방에 들어갈 때 포도 한 송이 사갈까?” 추니가 우울해 보인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