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박스 안에는 책이 들어있었다
누군가 보낸 것이었다. 단단한 하드커버로 만들어진 회색 표지에는 홀로 서 있는 여인의 뒷모습과 길게 늘어진 그녀의 그림자가 덩그렇게 그려져 있었다. 등을 돌린 채 텅 빈 공간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여인은 아마도 김지영, '82년생 김지영'일 것이다. 그것이 책의 제목이었다.
편집위원회를 떠나는 MJ에게 밥 한 끼를 먹이고 싶었다. 육아와 일을 병행하느라 동동거리던 모습이 눈에 밟혔고, 까탈스럽게 이런저런 트집을 잡았던 것도 맘에 걸렸다. 하얀 얼굴에 반달 같은 눈웃음이 곱게 걸리던 그녀의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싶기도 했다. 만나자고 연락을 하니 그녀는 아이를 데리고 나와도 되냐고 물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만남은 유모차를 사이에 두고 아주 어수선하게 이루어졌다. 아이에게 음식을 떠먹이고 안아주고 어르는 중간중간 화제는 여러 번 말을 갈아탔고 그 중 어느 하나 진중하게 이어지지 못했지만 우리는 꽤 오랫동안 수다를 떨었다. 그녀가 얼핏 최근에 <82년생 김지영>이란 책을 인상 깊게 읽었다고 말했던 것 같다. 마치 자신의 이야기 같더라고. 그러나 그 말 역시 다른 화제들처럼 소란 속에 묻혀버렸다.
<82년생 김지영>은 평범한 여자다
가볍게 잃기 시작한 책은 쉽게 손에서 놓아지지 않았다. 작은 책의 무게가 손목을 시큰하게 했다. 책장마다, 지난 세월 삶의 매듭 속에 서 있는 내 안의 김지영과 마주쳤다. 나보다 열 살은 훌쩍 어린 주인공 김지영의 삶이 정확히 나의 지난날과 포개지며 오늘의 나로 이어졌다. 그녀가 느꼈을 외로움과 수치와 좌절과 분노가, 세상에 수많은 김지영들의 슬픔에 더해져 차가운 포말이 되어 가슴에 부서졌다. 변화하는 것은 없다. 변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 뒤에 콘크리트처럼 견고한 체제와 부조리가 존재할 뿐. 여성은 찬양과 혐오 사이를 롤러코스터처럼 오르내리며 원을 그리며 돌고 있다. 이 소설은 김지영이란 가상 인물에 대한 삶의 보고서이자,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여성들의 다큐멘터리이다.
육아 우울증, 그것은 아무나 걸린다
임신 후 나는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낯선 도시에서 임신을 하고 아이들을 낳아 기르며 가사와 육아에만 집중하던 시기였다. 하루 세, 네 시간 쪽잠을 자며 두 살 터울의 아이 둘을 혼자 돌봤다. 아토피가 심한 아이들을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물걸레질을 했고 면기저귀를 삶아서 썼다. 남편의 불규칙한 출퇴근 시간에 맞춰 오밤중에도 밥을 지었고 계절마다 커튼을 갈고 가구 배치를 다시 했다. 좀 유별나다 할 정도로 알뜰살뜰 살림을 하고 가족을 돌봤다. 오직 '엄마'와 '아내'만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내 존재를 증명하는 길이 그때, 그것밖에 없었다.
세월이 많이 흐른 뒤에야 나는 당시의 내가 아주 많이 아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변에 누구도, 심지어 나 자신조차도 내 상태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닭장 속에 갇힌 것 같아 숨이 막히면 하루에도 몇 번씩 베란다로 뛰어나가 창문 사이로 머리를 내놓았다. 앞 동 건물의 벽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으면 그냥 커튼을 내려버렸다. 어린 아이 둘을 안고 나갈 곳도 없었고 찾아오는 이도 없었다. 하루 몇 시간 얼굴을 보는 남편은 늘 자는 모습이었다. 24시간이 모자라 쪼개 썼던 나의 일과는 결혼과 함께 무중력 상태에 빠져버렸다. 가사와 육아와 가사와 육아와 가사로 이어지는, 앞뒤를 구분할 수 없는 밑도 끝도 없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다행히도 나는 글쓰기 과정을 통해 조금씩 치유되었다. 내 일상을 글로 기록하고 이를 다른 여성들과 나누고 소통하는 과정을 통해 깊고 어두운 절망에서 차츰 벗어날 수 있었다. 그 때가 큰 아이가 유치원에 입학한 후였으니 나는 아주 오랜 시간 혼자 앓았던 것이다.
그녀들만의 전쟁
김지영, 그녀 안에 그녀는 괴멸되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정신과 의사의 진료기록 속에나 존재하게 된다. 의사는 그녀를 '육아 우울증'이라는 간단한 병명으로 진단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녀가 "당장의 고통과 부당함을 호소하지도 않고, 어린 시절의 상처를 되새기지도 않는다"며 의아해 한다. 의사는 그녀가 자신의 목소리를 버리고 그녀 주변에 억압받는 여성들에게 빙의하여 그녀들의 입을 통해 이야기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그녀에 대한 자신의 진단이 성급했음을 깨닫고 자신이 "미처 생각지 못하는 세상이 있다"고 짐작할 뿐이다.
의사의 말처럼, 이 세계에는 두 개의 세상이 공존한다. 여성과 남성은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지만 판이한 질서가 지배하는 서로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다. 전통적인 남아선호사상은 여전히 존재하며 그로 인해 수많은 여아살해가 일어났고 그 결과는 성비불균형으로 나타나고 있다. 어린 여성은 성장과정을 통해 누적된 차별과 반복되는 좌절을 경험하며 여성혐오의 사회를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결혼 제도에 진입하고 가사와 육아 문제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이 사회의 가부장성과 폭력성을 마주한다. 수없는 인지부조화를 겪으며 여성은 인간으로서의 정체성과 자존감마저 잃어버린다.
김지영이 그러했듯, 이 사회에 많은 김지영들이 목소리를 잃고 살고 있다. 수없이 말했으나 듣는 이가 없었고, 혹여 들었다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여성의 문제 앞에 국가는 없었다. 여성의 고용, 출산, 육아 문제를 외면한 채 저출산의 책임을 여성 개인에게 전가하는 부조리한 체제가 있을 뿐이다. 여성이 겪는 이 전쟁을 여성들만의 문제로, 우울증이란 병리현상만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이는 이데올로기의 문제이고, 사회 체제의 문제이며, 정치적 해법이 필요한 국가의 문제이다.
사적인 것의 공적 말하기, 여기서부터 시작하자
개인의 경험을 공유하는 것은 중요하다. 여성들 스스로 자신이 겪은 차별과 폭력의 일상을 말하는 것은 공공영역에서 배제된 여성의 문제를 햇볕 아래 드러내어 공론화한다. 또한 사적 경험의 공유를 통해 고립된 여성들 간의 소통과 연대를 이루고 가부장제 사회의 권력에 대응할 수 있는 정치적 힘을 기를 수 있다. 무엇보다 이러한 말하기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맞닥뜨린 문제를 객관화하고 비판적으로 성찰함으로써 잃어버린 자존감을 회복하고 일그러진 정체성을 복원할 수 있다. 82년생 김지영이 처한 가장 큰 위기는 그녀가 마주한 가부장제의 세상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버린 데에 있다. 그녀가 타인의 입을 빌어 문제를 말하는 이상, 그녀의 상처는 완치되기 힘들다. 침묵은 더 깊고 어두운 침묵을 이끌고, 상처는 안으로 파고들 뿐이다.
김지영은 어떻게 다시 말하기를 시작해야 할까? 다행히도 이 시대의 미디어 환경이 사회 변혁의 가능성을 열고 있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은 남녀 모두에게 미디어에 대한 접근을 용이하게 해주었다. 우리는 이제 글쓰기뿐 아니라, 팟캐스트로 라디오 방송을 할 수 있고, 스마트폰으로 영화를 만들 수도 있으며, SNS를 통해 정치 세력화를 꾀할 수도 있다. 미디어는 여성의 경험을 공유하고, 공감하고, 소통하는 과정으로서, 또 그러한 공간으로서, 새로운 대안적 가치를 갖는다. 이미 많은 여성들이 미디어를 통해 소통의 통로를 만들어가며 여성 공동체를 형성하고 여성의제를 담론화 하고 있다.(하단 참고) 이제 김지영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과 여성 연대에 대한 신뢰, 그리고 변화를 실현할 용기이다. 이 사회에서 배제된 김지영들이, 각 가정에 고립된 김지영들이, 사적영역으로 유폐된 김지영들이, 함께 손잡을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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