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0일 대통령 취임식 연설에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동분서주 하겠다'면서 '워싱턴, 베이징, 도쿄, 평양을 가겠으며 사드문제의 해결을 위해 미국 및 중국과 진지하겠다고 협상하겠다'고 말했다. 언론들은 문 대통령의 주요국 방문에 대해 미-중-일 순서가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보도들을 보면 무엇인가 빠진 것이 눈에 띈다. 러시아가 빠져 있는 것이다. 말로는 4강 외교라고 하면서 말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보수 정권이나 진보 정권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한반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러시아는 과연 한국의 외교에서 빠져도 되는 나라일까?
지난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강력한 대북 제재 결의안 통과를 위한 지지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우리 정부나 언론은 미국과 중국만 수없이 거론하였고 러시아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었다. 한국 정부나 한국인들은 중국과 러시아의 관계가 마치 미국과 일본과의 관계와 비슷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또한 러시아는 글로벌 파워가 아니라 유럽 국가의 하나 정도로 생각하거나 아니면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시아와는 무관한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러시아는 유엔 안보리 5개 상임이사국의 하나이며 한반도 정세뿐만 아니라 남북통일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라시아 대륙의 강대국이다. 러시아를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시각을 보면 마치 한국이 미국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 아닌가 느껴진다. 소련이 붕괴하면서 소속 공화국들의 독립으로 국세가 다소 약화된 것은 사실이며 미국이 그런 러시아에 대해 예전같이 대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국이 미국을 따라한다면 국가안보나 국가이익의 관점에서 위험천만한 일이다. 러시아는 한국 정도의 나라가 가볍게 볼 그런 나라가 아니다. 동시에 러시아는 남북통일 과정에서 우리의 우군으로 활용할 수도 있는 유용한 존재이다. 특히 북한 정권이 갑작스럽게 붕괴하는 경우 예상되는 중국의 북한에 대한 군사적 개입 가능성을 억제할 수 있는 세력으로서 러시아의 가치는 매우 높다.
하지만 1990년 수교 이래 초반 몇 년을 빼고는 한국 외교는 러시아를 경시하여 왔다. 김영삼 정부 당시 북핵 문제를 해결을 위한 당사국 회담(남북한, 미국, 중국)에서 러시아를 배제하였던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 뒤로도 한국 정부의 이러한 외교행태는 이어져왔다. 그 뒤 러시아가 포함된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은 자신의 핵심적인 이익 때문에 북한에 대해 제재나 압박을 가하는 데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끊임없이 중국에 대해서 매달리는 경향을 보여 왔다. 이로 인해 1990년대 옐친 정부 당시 한국 우선이었던 러시아의 한반도정책은 2000년대 이후에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남북한에 대한 등거리 외교로 바뀌었다. 푸틴 대통령 등장 이후 이러한 경향이 뚜렷해졌으며 아직도 러시아의 이러한 대한반도 외교 기조는 유지되고 있다. 이런 러시아에 대해 한국은 불만을 갖고 있으나 반면에 러시아에 대한 배려에는 신경 쓰고 있지 않다. 한마디로 말해서 북방외교를 적극 추진했던 노태우 대통령 시절의 '모스크바를 통해 평양으로 간다'는 외교적 구호는 사라졌다.
남북한을 가로지르는 휴전선이 단순히 남한과 북한의 분단선인가? 냉전 당시 양대 세력의 경계선이기도 하기 때문에 우리 민족이 지금도 분단의 고통을 겪고 있고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소련의 붕괴로 냉전이 공식적으로는 끝났다고 하지만 한반도에서는 계속되고 있다. 한반도의 분단이 우리 민족의 의사에 반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에 유감스럽게도 역설적으로 남북한 통일도 주변 4강의 협조 내지는 묵인이 없으면 이루어지기 어렵다. 중국만이 아니라 러시아의 협조를 확보하지 못하면 평화는 물론 통일은 생각하기 어렵다. 1989년 12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이어서 1990년 10월 동서독이 통일되는 과정에서 당시 소련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동의가 결정적이었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한편 한국이 남북관계를 주도하지 못하고 미국의 대북 정책에 끌려 다닌다면 평화는 확보할 수 있을지 몰라도 통일은 예상할 수 없다. 미국이 한반도의 통일을 반대하거나 방해하지는 않겠지만 전략적인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한반도의 통일을 지원할 이유도 없다. 이러한 것은 최근 트럼프-시진핑 회담의 분위기에서도 읽을 수 있지 않은가? 사드 배치가 한국의 주권적 결정이라고 하지만 미국이 동의하지 않았다면 가능하였을까?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은 시진핑과 만난 자리에서 중국이 동맹국인 한국에게 치사한 제재를 가하고 있는 것에 대해 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한국이 알아서 할 일이라는 것일까? 1970년대 초 닉슨-저우언라이 회담에서도 '우리 양국이 한반도에서 한민족 때문에 서로 다툴 필요가 없다'라고 하였다고 하지 않는가? 여기에서 미국이나 중국을 비난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나라는 자기 이익에 봉사하려고 하지 남의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자명한 얘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선량한 외세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한국인들은 자주 망각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북한에 대한 이해관계에 있어서 한국과 미국이 완전히 동일한 입장은 아니며 단지 많은 부분이 겹칠 뿐이다. 한국은 약자의 입장에서 한반도를 둘러싼 게임에서 가능하면 모든 패를 활용하는 것이 현명한데, 최근 그 누가 강요하지 않았는데도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스스로에게 강요하는 듯한 분위기이다. 전에 모 외교부 고위당국자는 '양쪽에서 러브콜을 받고 있으니 좋지 않으냐'라는 식의 발언을 한 적도 있는데, 한심한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이제 러시아에 대해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점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당장 사드 배치 문제를 둘러싼 논란을 보자. 대국답지 못하게 한국에 대해 여러 가지 미시적인 제재 조치로 적대 감정을 여과 없이 표출하고 있는 중국과는 달리 러시아는 문제의 본질에 상응하게 외교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러시아의 처신은 당연한 것일까? 아우성치는 중국을 더 챙기는 것이 정상인가? 문재인 대통령의 지시로 중국에 사드 대표단을 보냈다고 한다. 원론적으로 중국과 대화를 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한국에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중국에 그런 대표단을 보내는 것은 역설적으로 사드 배치에 대한 중국의 항의와 제재 조치를 정당화시켜주는 측면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사드 배치에 대해 중국이나 러시아나 마찬가지로 반대하는 것은 같지만 온도 차이가 있지 않은가? 물론 중국은 자신의 핵심부가 한반도에 인접해있는 데 반해 러시아의 경우는 핵심부가 한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이러한 온도차는 사드 배치와 관련하여 활용하기에 따라서는 한국의 외교에는 의미 있는 틈새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이미 오래 전에 예견된 일이지만 최근에야 중국의 경제보복 조치를 보고서 대안 시장을 거론하면서 중국 시장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 러시아가 한국의 주요한 대안 시장의 하나가 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고 본다. 일각에서는 러시아는 땅은 매우 넓지만 인구가 상대적으로 적아서 시장이 크지 않으므로 큰 의미가 없다고 본다. 전적으로 부인하기는 어려운 얘기이다. 하지만 흔히 자산운용과 관련 포트폴리오 구성에도 소위 위험 분산이 중요하듯이 바로 옆에 있는 향후 잠재력이 상당한 러시아 시장에 대한 적극적인 진출을 도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더욱이 박근혜 정부에서 제창하였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가 있지 않은가? 유라시아 대륙의 북방이야말로 인류에 남아있는 거대한 잠재력을 가진 마지막 미개척지인데 21세기 한국 아니 우리 민족의 번영과 활로 개척을 위해 그 곳 말고 어디를 기웃거리겠다는 것인가? 한국 기업들이 근시안적으로 단기적인 이익만을 추구하는 관행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한국은 유라시아 진출에 있어 중국과의 경쟁에서 틀림없이 패배하고 말 것이다. 이미 중국은 소위 '일대일로'로 대변되는 육상과 해상 실크로드의 부활을 통한 중화 중흥을 위해 투자를 과감하게 진행하면서 이미 저 멀리 한국을 앞서가고 있다.
즉 러시아는 중국에 대신하는 대안 시장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유라시아 진출에 있어서 핵심적인 파트너라는 점을 인식하여야 한다. 2015-2016년에 걸쳐 러시아가 주도하는 유라시아 경제연합과 한국은 자유무역협정 체결 타당성에 대한 공동연구를 마치고 정부간 협상을 개시하기로 작년 가을 원칙적인 합의를 보았다. 하지만 아직까지 협상이 개시되지 못하고 교착상태에 빠져있다. 유라시아 경제연합과의 자유무역협정은 소위 한국의 '경제영토'를 획기적으로 확대시킬 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한민족의 생활영역(lebensraum)을 넓히는 데도 기여할 것이다.
그간 러시아는 한국에 대해 여러 가지 남-북-러 삼각협력을 제의한 바 있다. 한반도 종단 철도와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연결, 북한 경유 가스관 건설을 통한 러시아산 천연가스 공급, 남북한과 러시아간 전력망 연계 등이다. 그러나 한국 측은 이러한 제안들에 대해 국내 정치적 목적을 위한 활용에는 적극적이었으나 실제 사업 추진에는 매우 소극적이었다. 남-북-러 경제협력에는 애초부터 북한 변수가 있었다. 그런데 한국은 처음에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다가 결국에는 북한 변수를 이유로 논의 자체를 중단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러한 메가 프로젝트들의 근본 취지는 경제협력을 뛰어넘어 남북 화해와 협력에 미치는 긍정적이고 불가역적인 효과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즉 경제적 이익과 함께 남북관계 개선이라는 외교적 실익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적극적으로 상황을 타개하려 하기보다는 북한의 어떤 도발이 있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논의 자체를 중단하였다. 이러한 양상은 진보 정권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박근혜 정부가 제창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와 관련하여 그간 의미 있는 움직임은 나진-하산 복합물류 프로젝트뿐이었다. 그러나 이마저 한국은 수년간 협상을 끌어오다가 2016년 러시아에 참여 포기를 통보하고 말았다.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시험 발사와 관련한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 대상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대북 제재를 '솔선수범'한다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말았다.
러시아가 전략적으로 중요시하는 극동 러시아개발 협력도 비슷한 양상이었다. 이명박 정부 당시에는 한국기업들의 진출을 지원하기 위한 정부내 조직까지 마련된 적이 있었으나 흐지부지되었다. 물론 일부 경제계 인사들이 지적하듯이 극동 러시아 지역은 지금 당장 매력적인 시장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국 기업들과 상인들은 공격적으로 투자를 하고 있으며 미래에 대비하고 있다. 아마도 극동 러시아 시장은 2~3년내 수확을 거둘 수 있기보다는 '키워서 잡아먹는' 시장일 것이다. 2015년말 한국 정부 주도로 극동 러시아지역 항만 시설 확충과 우리 기업의 진출 방안'에 대한 용역보고서가 나온 바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한국 측에서 이렇다 할 구체적인 움직임은 없다. 극동 러시아 지역의 개발과 관련하여 필수적이고 중요한 이슈가 물류의 개선이고 물류를 장악하는 쪽이 교역에서도 우위에 설 것이라고 하는데, 한국 정부는 전략적 사고를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또한 극동 러시아에서 남북한과 러시아가 공동의 사업을 통해 3자가 모두 윈-윈 할 수 있는 방도가 있다. 개성공단 모델을 극동 러시아에 적용하는 것이다. 즉 극동 러시아판 개성공단을 도처에 만들어 운영하면 한국 기업은 특히 러시아 시장에서 소비재 생산과 판매에 있어서 경쟁력을 얻게 되고 러시아로서는 자국 내에서 일반 소비재의 다량 생산이 가능해짐으로써 향후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제조업 기반을 확충해 나갈 수 있다. 또한 러시아 땅에서 남과 북의 근로자들이 함께 일함으로써 화해와 협력의 분위기를 조성하여 통일의 기반을 다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러시아는 남북한 통일과정에서 유용한 우군이 될 수 있다. 중국은 대북 제재에 소극적이다. 소위 '미 제국주의에 대한 완충지대'로서 북한의 존속을 바라기 때문이다. 중국 측이 동북공정에 의거하여 '한반도의 한강 이북은 과거 중국의 식민지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북한의 급변사태시 중국군이 북한을 장악하고 이를 합리화하는 명분으로 삼겠다는 속셈이 아니겠는가? 또한 2015년 1월 당시 중국 외교부 부부장이었으며 현재 6자회담의 중국측 수석대표인 우다웨이가 '한국이 만주 간도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으면 중국도 고구려가 중국의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겠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이게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중국은 남북한 통일을 바라지 않으며 앞으로도 북한을 존속시키고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계속 행사하겠다는 뜻이 아닐까? 중국의 의도에 대해 최소한으로 말해도 중국과 한국은 한반도에서의 전쟁 재발 방지를 제외하고는 한반도 정세와 남북통일에 관해서 공통분모가 없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편 러시아는 입장이 전혀 다르다. 러시아 정부의 정책 우선순위의 하나가 극동 러시아지역의 개발이다. 그러나 중국이나 일본과의 협력에 대해서는 속마음이 편하지 않다. 중-러, 일-러 간에는 영토를 둘러싼 구원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러시아는 한국과의 경제협력을 선호하는 편이다.
현재 러시아는 중국과 매우 긴밀한 관계인 것처럼 보인다. 특히 냉전 이후 미국의 일방주의에 대항하는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러시아와 중국의 원만하고 가까운 관계는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며, 냉전시절 소련과 중국은 같은 사회주의 국가이면서도 갈등관계에 있었으며 심지어는 만주 지역 북쪽 아무르강 유역 국경지대에서 무력 충돌도 있었다. 1970년대 미국은 소련에 대해 군사적 위협을 느끼는 중국을 포용함으로써 소련을 견제하기까지 하였었다. 그러한 갈등의 기저에는 19세기 후반 청나라 영토였던 아무르 강 이북 지역과 연해주를 러시아에 빼았겼던 역사적 사실이 도사리고 있다. 중국은 그 지역을 회복하여야 할 자신들의 영토라고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중국은 외견상 미국의 일방주의에 대항한다는 차원에서 러시아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나 내심으로는 '실지수복(失地收復)'의 의지를 다지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러시아와 중국의 관계는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
냉전 시절 극동러시아 지역은 군사적인 목적을 위해 폐쇄된 지역이었다. 현재는 개방되었으나 사회간접자본 투자가 아직 충분하지 않아서 경제적으로 낙후되어 있으며 대규모 투자를 필요로 한다. 러시아 전체 영토의 30%에 이르는 땅에 인구는 700만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 바로 이웃한 중국의 만주 지역은 인구가 이미 1억이 넘었으며 활발한 경제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극동 러시아 지역의 주민들은 소비재의 상당부분을 주로 중국에 의존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획기적인 조치가 없다면 이러한 추세는 심화될 것이다. 나아가 이 지역이 러시아 핵심부인 우랄산맥의 서쪽지역과 경제적으로 분리될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중국인들의 합법 및 비합법 이주도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즉 러시아는 중국의 '평화적 잠식' 위협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역설적으로 군사적 위협보다도 '평화적 잠식'이 더 우려되는 것이다.
러시아는 일본과도 그리 편한 관계가 아니다. 러시아가 극동 러시아에 대한 일본의 투자를 요청하고 있으나, 일본은 소위 '북방영토' 또는 남쿠릴열도의 영유권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본격적인 투자는 할 수 없다는 게 기본 입장이다. 물론 최근 러시아와 중국 간 밀월에 대해 긴장한 일본이 다소 융통성 있는 자세를 보이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러시아에 대해 '북방영토'의 반환을 집요하게 요구하고 있다. 객관적으로 일본의 주장이 타당한지는 따져보아야겠으나 2차 대전 이전에 일본이 그 섬들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하나 그 섬들의 영유권에는 변동이 여러 번 있었고 2차대전 이후 1952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서 규정하고 있는 일본의 영토 범위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따라서 극동 지역 개발을 위해 러시아로서는 한국이 유용하고도 가장 편안한 협력 파트너이다. 양국 사이에는 정치적 장애물이 없지 않은가? 특히 러시아는 한국의 경제적 활력(economic dynamism)이 극동 러시아지역의 개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런데 인간의 심리상 뭍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그러한 활력이 넘쳐흐르는 데 장애가 된다. 한국은 지리적으로는 그렇지 않지만 2차 대전 이후 분단 이래 '섬' 아닌 '섬'의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즉 통일 한국은 극동 러시아 개발을 위해 한국과 러시아의 협력을 가속화할 수 있는 호재인 것이다. 동시에 러시아가 거대한 영토(한반도의 78배)를 갖고 있고 강대국이긴 하나 적어도 동북아시아에서는 중국에 대해 상대적으로 열세인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러시아 입장에서 변방인 극동러시아 지역의 경제적 군사적 안보를 위해서 강력한 통일한국(strong united Korea)의 출현에 대해 거부감을 가질 이유가 없다. 거시적으로 러시아 입장에서 보면 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호의적인 세력균형이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전제조건이 있다. 즉 통일한국이 지금처럼 과도하게 미국에 치우치는 외교를 펴지 않는다는 조건을 들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2005년 러시아 정치학자 블라디미르 수린(Владимир Сурин) 박사가 코리아 선언(Корейский манифест, Korean manifesto)을 발표한 바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는 앞으로 예상되는 중국의 시대(Pax Chinese)에 대비하여 한국과 러시아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 구원투수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전례가 없는 연합국가 구상을 제시하였다. 위에서 언급한 세부적인 것에 대해서는 사람에 따라 달리 볼 수도 있을 것이나 분명히 객관적인 사실은 남북통일을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서 중국과 러시아가 다르다는 점이다. 즉, 이러한 시각차를 한국이 지나쳐서는 안 된다.
또한 역대 대통령들의 취임 후 4강 방문과 관련하여 지적할 점이 있다. 어떤 순서로 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기 때문에 굳이 언급하지는 않겠으나 취임 이후 최초 방문까지 기간에 대해서 지적하고 한다. 역대 대통령들 대부분의 러시아 방문 시기가 취임 첫 해를 넘기기가 일쑤였다는 점이다. 정상 외교에 있어서 취임 후 첫 공식방문의 시기는 상대방 국가에 주는 상징적 의미가 크므로 언제이냐는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문제이다.
요약하자면 러시아는 사드 배치에 대해서만 아니라 남북통일에 대한 시각에 있어서 중국과 차이를 보이고 있고, 한국 경제가 과도한 중국 의존에서 벗어나는 데 대안시장으로서 유용하며, 특히 한국의 유라시아 대륙 진출을 위한 최대 핵심 파트너이다. 한국은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한-러 관계에 대한 전략적 사고를 해야 할 것이다.
한국이 진정 북핵 문제를 해결하고 남북화해와 협력 나아가 남북통일에 있어서 주도적 역할을 하려면 현재와 같이 스스로를 미국과 중국 사이에 '샌드위치' 신세에 몰아넣기보다는 러시아라는 유용한 외교적 카드를 활용하여야 할 것이다. 두 개의 강대국만 상대하다 보면 그들은 언제든지 쉽게 한국의 이익을 희생하면서 자기들의 이익을 취하기 위해 담합할 가능성이 크나, 2개 이상의 강대국들이 서로 충돌하도록 하면 담합에 대한 우려가 줄어들 것이며 한국 외교의 입지가 지금보다는 커질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문재인 정부에서는 부디 한-러 관계를 재구축함으로써 보다 현명한 4강 외교가 펼쳐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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