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대결이 지역갈등을 압도하는 모양새다. 최근 실시되는 거의 모든 대선 여론조사에서 지역별 격차는 줄어드는 대신 세대별로 지지하는 대통령 후보는 크게 엇갈리고 있다. 이와 같은 세대 간 인식차이는 비단 대통령 후보 선택에 국한되지 않는다. 한국사회의 주요 이슈들에 있어서 세대 간, 특히 50대를 기준으로 위아래 세대 간 갈등의 골이 깊다는 진단은 이제 익숙하다.
'2040 탈핵, 5060 찬핵'이 아니라 탈핵시대의 개막?
지난 4월 20일 탈핵에너지전환 시민사회 로드맵 연구팀의 의뢰로 리서치DNA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전국의 19세 이상 유권자 1044명을 대상으로 한 ARS 무선전화여론조사 결과(표본오차 95±3.0%, 응답률 2.7%)를 보면, 2040세대는 탈핵에 적극적인 데 반해 5060세대는 탈핵에 소극적이고 원전 확대를 지지하는 듯 하다.
구체적으로 "핵발전소 건설 정책이 앞으로 어떻게 되길 바라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2040세대는 45% 가량이 현재 진행 중인 신규 핵발전소 건설 공사를 중단할 뿐만 아니라 가동 중인 핵발전소까지 줄여야한다고 응답했다. 답변의 범위를 현재 건설 중인 것을 제외한 추가 건설 중단으로 넓히면 70% 이상의 응답자가 추가 건설 계획에 반대했다. 2040세대 중에서 정부의 현재 계획에 따라 또는 그 이상으로 핵발전소를 늘려야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20~25%에 그쳤다. 반면 60세 이상에서는 현재 계획대로 추진하거나 계획보다 더 많이 핵발전소를 건설해야한다는 응답자가 60% 이상이었다. 신규 핵발전소 건설을 중단하고 가동 중인 설비까지 축소해야한다고 응답한 사람은 8.6%에 불과했다. 50대에서도 현재 계획 이상으로 핵발전소를 더 지어야한다는 의견이 40%를 넘겼다. 2040 탈핵, 5060 찬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세대 간 인식의 격차는 큰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표면적인 세대 간 대립구도보다 더 눈여겨볼 것은 탈핵을 지지하는 5060세대의 비율이 아닐까한다. 50대의 47.7%가 핵발전소의 추가 건설 계획에 반대 의사를 밝혔고, 60대 이상도 3명 중 1명 꼴로 추가적인 핵발전소의 건설이 필요없다고 응답했다. 노후 핵발전소의 수명연장에 대한 결과도 눈길을 끈다. "노후 핵발전소의 수명연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50대는 53.6%, 60대 이상은 67.2%가 수명연장 대신 폐쇄하는 쪽을 선택했다. 나아가 50대의 36.7%, 60대 이상의 20.7%는 설계수명이 만료되기 전이라도 조기 폐쇄를 검토하거나 추진할 수 있다고 응답했다. 압축적 경제성장을 경험한 5060세대 중 적지 않은 이들이 탈핵에 관심을 갖고 탈핵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탈핵 시대의 개막을 읽어내는 것은 희망섞인 기대에 불과한 것일까?
압축적 성장시대의 에너지원 전환과 핵발전
5060세대는 이른바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가 섞여있지만 젊은 시절 압축적 성장을 경험했다는 점에 있어서 큰 차이가 없다. 에너지 분야로 한정해보면, 이들만큼 급격한 에너지원의 전환을 경험한 세대를 찾아보기도 힘들다. 아마도 5060세대의 대다수는 신탄(나무)으로 아궁이의 불을 지피고 호롱불이나 남포등으로 긴긴 밤을 밝히는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커가는 과정에서 혹은 아이를 한창 키울 때쯤부터 연탄 보일러를 사용하기 시작했을게다. 반짝이는 백열전구가 집안을 환하게 밝히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훌쩍 자란 아이가 낯설게 느껴지듯 연탄 보일러와 백열전구가 낯설어졌다. 연탄 보일러는 가스나 석유 보일러로 대체되고 백열전구가 반짝이던 자리에는 형광등이 끼워졌다. 아마 최근에는 전기난방기구나 LED전등을 쓰는 동년배가 제법될 것이다.
압축적 성장 시대를 거치며 에너지원의 급속한 변화를 경험했던 이들에게 핵발전소는 어떤 이미지였을까? 아직까지 시민들이 고도 성장기의 에너지원 변화를 어떻게 체험하고, 어떤 의미를 부여했는지에 대한 생활문화사적 연구가 없어서 정확하게 알 길은 없다. 다만 신문기사나 광고 등을 통해 대략 짐작할 따름인데, 종종 언급되는 것처럼, 핵발전은 "제3의 불"로서 천연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가 전기를 값싸고 풍족하게 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처럼 여겨졌다. 제한송전으로부터 벗어나 전기를 마음껏 소비할 수 있는 사회, "에너토피아(Enertopia)"로 가는 길은 핵발전소에서 시작된다는 믿음도 사회 속에 뿌리를 내렸다. 1980년대 후반 핵발전 설비과잉을 계기로 정부가 수차례의 전기요금 인하를 통해 값싼 전기소비사회로의 전환을 이끌면서 믿음은 현실이 되는 듯 했다.
5060세대들은 "핵발전이 없다면" 또는 "핵발전 덕분에"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숱하게 들으며 값싼 전기소비사회로의 전환을 몸소 체험했을 터다. 그럴진데, 5060세대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신규 핵발전소 건설 중단에 동조하고 노후 핵발전소의 수명연장 중단에 동의하다니! 여론조사 결과는 세대 간 인식 차이를 보여주는 동시에 공고했던 핵발전의 위상이 밑바닥에서부터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것이 아닐까?
압축적 전환의 상징이 필요하다
가는 세월을 막을 수 없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 시시때때로 정비를 하고 때로는 부품을 교체하기도 하지만 기계와 설비도 세월의 무게를 온전히 이겨낼 수 없다. 그래서 압축적 성장은 시간이 흐르면 압축적 노후화로 이어진다. 5060세대가 일상에서 "발전"을 체험할 수 있게 해주었던 사회기반시설들이 서서히 노후화되고 교체 시기가 도래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즉 압축적인 성장을 뒷받침하며 발전설비, 상하수도 시설 등이 빠르게 늘어난 만큼 한꺼번에 교체해야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단적으로 현재 가동 중인 25기의 핵발전소 중 2029년까지 설계수명이 만료되는 게 12개이다. 압축적 에너지원 전환의 상징과도 같은 핵발전소가 곧 가동을 멈춰야할 때가 된 것이다. 이에 비춰보면, 탈핵여론의 확산되는 것은 압축적 노후화를 앞두고 압축적 성장의 상징이 서서히 해체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징후라 할 수 있다.
한국사회가 고령사회로 진입하는 2017년, 공교롭게도 첫 번째 핵발전소인 고리 1호기의 폐로가 예정되어있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압축적 성장의 시대가 저물고 압축적 노후화의 시대가 시작되는 상징적인 사건일지도 모르겠다. 2040세대에서 탈핵지지가 높은 것만큼 5060세대에서 탈핵여론이 싹트고 있는 것이 흥미로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압축적 노후화의 과정에서 이들은 다시 한번 급격한 에너지원의 변화를 경험하게 될까? 그 답은 압축적 노후화가 어느 시점에 압축적 전환으로 변화하느냐에 달려있다. 청사진은 없지만 출발점은 분명하다.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는 전환의 실험들을 압축적 성장의 상징을 대체하는 압축적 전환의 상징으로 만들어내는 것. 탈핵 공약을 내세우고 있는 대통령 후보들이 고민해야할 지점도 바로 여기다. 다시 말해 2017년을 탈핵의 출발점으로 기억할만한 상징적이면서도 분명한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 압축적 전환 시대로의 진입을 알리는 조치가 필요하다. 세대갈등을 해소할 사회통합적 시도만큼 세대를 아울러 전환을 추진해나갈 수 있는 비전이 제시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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