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이 2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마라톤으로 치자면 선수들이 가장 힘들다는 마(魔)의 37킬로미터 지점을 지나고 있다. 대선주자들도 선거유세, 선거방송, 토론회 등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느라 곤죽이 되어가고 있다. 막판으로 치닫는 대선에서 26일 새벽 주한미군이 기습적으로 경북 성주에 사드를 배치하면서 안보와 사드가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어가고 있다.
대선은 우리의 생명과 안전을 가장 잘 지켜줄 후보가 누구인지 잘 가려 한 표를 행사하는 축제이자 엄중한 시간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생명과 안전을 사드만이 지켜주는 것은 아니다. 사드가 배치돼 완벽하게 작동한다 하더라도 결코 우리 국민 전체를 지켜주지는 못한다. 아니 국민의 절반도 제대로 지켜주지 못한다.
북한이 동족을 향해 핵미사일을 포함해 장거리 미사일을 마구 쏘아댈지도 의문이다. 또 만약 한두 발, 수십 발 수준이 아니라 수백 발 수준의 강력한 미사일을 퍼붓는다면 지금 배치하려는 사드는 아무리 귀신같이 요격을 한다 하더라도 사실상 무용지물이다. 이뿐 아니라 사드는 수도권 주민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방어무기이다.
북핵 위협은 잠재적이지만 미세먼지는 현실적 위험
우리의 생명과 안전은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낮은, 잠재적 북한 핵위협보다 당장은 미세먼지나 생활화학물질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 가습기살균제로 상징되는 생활제품 속 화학물질은 이미 많은 생명을 앗아갔다. 적어도 수백 명이 이 때문에 숨진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인명피해신고를 해온 사람만도 1천 건이 넘는다.
미세먼지는 인체발암물질임과 동시에 피부질환, 심장질환, 뇌혈관질환, 호흡기질환 등 생명을 위협하는 실제 위협이다. 미세먼지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맛과 냄새도 없으면서 때론 즉각적으로, 때론 서서히 우리 몸을 망가뜨린다.
환경보건전문가들은 흡연·간접흡연과 함께 미세먼지가 우리 건강과 생명을 짓밟는 최대의 적이 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미세먼지는 현재의 위험이자 미래의 위험이다. 미세먼지 자체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공기 중 미세먼지가 높아지면 시야가 뿌옇게 흐려진다. 한마디로 미세먼지는 국민이 피부로 체감하는 환경보건·안전 위험이다.
'다시 만나는 파란 하늘' vs. '마스크가 필요 없는 봄'
올 들어 미세먼지가 더욱 기승을 부리면서 대선주자들도 앞 다퉈 미세먼지 대책을 주요 공약으로 내놓았다. 문재인, 안철수 등 선두권을 형성하며 달리는 주자들은 생활안전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의 표심을 얻기 위해 그동안 갈고 닦은 미세먼지 대책을 잇달아 내놓았다. 환경운동연합, 녹색연합, 환경정의 등 환경시민단체들도 그동안 자신들이 다듬어놓은 미세먼지 대책을 토대로 각 정당과 정책 협약식을 가졌다.
주요 대선 캠프에서는 '봄꽃도 만나기 싫은 미세먼지' '다시 만나는 파란 하늘' '마스크가 필요 없는 봄' 등 유권자들의 눈길을 끌만한 슬로건을 담아 미세먼지 정책을 알리기에 여념이 없다. 유권자들의 뇌리에 각인될만한 정책 개발뿐만 아니라 이들 정책에 예쁜 포장을 하는데도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정책쇼핑몰이란 신개념을 만들어 대박을 터트린 한 후보 캠프의 정책공약 사이트에는 안전, 교육, 보육, 안보, 여성 등 많은 정책부문 가운데 미세먼지 공약에 대해 26일 현재 20만 명이 넘는 가장 많은 방문객들이 '좋아요!'를 눌러 다른 부문의 2~10배나 되는 것에서도 미세먼지 문제에 대한 국민의 폭발적인 관심을 엿볼 수 있다.
의욕과잉이 부른 망신살, 베이징 공기정화탑 서울에 설치 공약
환경단체의 미세먼지 대책을 포함해 이번 대선을 앞두고 나온 미세먼지 대책은 대동소이하다. 집단지성을 발휘해 선보인 대책들이긴 하지만 지금 우리가 피부로 겪고 있는 미세먼지에 대한 우려를 확실하게 누그러뜨릴 묘책은 눈에 띠지 않는다.
이는 한마디로 그 어떤 미세먼지 대책도 심각한 상태에 놓인 우리의 미세먼지 오염 상태를 당장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 마라톤에서도 기록을 내려고 몸 상태를 생각하지 않고 마구 달리다 중도에 포기하고 마는 선수들을 종종 본다. 만약 대선후보들이 미세먼지 문제를 몇 년 안에, 또는 임기 중 완전 해결할 수 있다는 식의 과대포장한 메시지를 내거나 무리한 정책 목표를 세울 경우 십중팔구 실패로 돌아갈 가능성이 짙다.
예를 들어 어느 후보는 올림픽 때 중국 베이징에 세운 미세먼지 저감 탑을 서울과 같은 미세먼지 심각 지역에 다량으로 세우면 미세먼지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고 주요 공약 가운데 하나로 발표했다. 하지만 공약 발표 며칠 뒤 한 신문이 실제로 공기정화탑이 있다고 발표한 베이징 현장으로 특파원을 보내 이를 확인한 결과 베이징에는 이런 시설이 현재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게다가 과거 베이징에 세운 미세먼지 저감탑은 대기오염의 심각성을 중국 국민들에게 일깨우기 위한 일종의 퍼포먼스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크게 망신살을 샀다. 의욕과잉이 불러온 해프닝이었던 셈이다.
미세먼지에 대한 우리 국민의 관심이 커지고, 또 한편으로 미세먼지 문제만 해결해주는 후보가 있다면 묻거나 따지지 않고 무조건 한 표를 주겠다는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미세먼지 문제를 국가재난, 안보 등의 다소 과장된 메시지로 포장해 유권자들에게 다가가려는 시도들도 있다. 미세먼지의 중요성을 시민들에게 각인한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겉만 번지르르하고 실속은 없는 속빈 강정 같은 정책이 되지나 않을까하는 우려도 함께 있다.
미세먼지 대책, 새로운 아이디어보다 실제 시행이 더 중요
지금까지 주요 정당과 환경단체들이 제시한 미세먼지 대책은 △수도권 미세먼지 오염총량제 실시 △미세먼지 규제 기준 세계보건기구(WHO) 수준으로 상향 △신규 석탄화력발전소 금지 및 미세먼지 심각 시 가동 대폭 축소 △미세먼지 측정 강화와 국민에 대한 관련 정보 신속 전달 시스템 구축 △낡은 경유차 조기 퇴출 △미세먼지 심각 시 차량 2부제 시행 △중국과 미세먼지 외교 강화의 일환으로 최고지도자 정례 정상회의 개최 △친환경차 보급 확대 △미세먼지 30% 저감 등이다.
이러한 정책 대부분은 이번 대선을 계기로 새로 나온, 획기적 내용을 담은 것이라기보다 그동안 줄곧 여러 전문가들과 단체들이 주장해온 것이다. 물론 이런 대책을 보완하고 새로운 정책 발굴도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앞서 제시된 정책들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시행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
미세먼지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이러한 정책에 아낌없이 인력과 기술, 예산을 쏟아 부어야 하겠지만 경제·산업계 쪽의 반발과 경제성장 중시 학자들의 반발 내지 반론도 충분히 예상된다. 결국 새로 뽑힐 대통령이 집권세력과 함께 어떤 의지와 로드맵을 가지고 미세먼지 정책을 펴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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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주 박사는 <한겨레> 보건복지 전문기자를 지냈으며,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8년부터 <프레시안>에 '안종주의 위험 사회' '안종주의 건강 사회' '안종주의 위험과 소통' 연재 칼럼을 써왔다. 석면, 가습기 살균제, 메르스 등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각종 보건 및 환경 보건 위험에 관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시민들과 소통하며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석면, 침묵의 살인자> <위험 증폭 사회> 등 다수가 있으며, 최근 코로나19 사태를 맞이해 <코로나 전쟁, 인간과 인간의 싸움> <코로나19와 감염병 보도 비평>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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