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좀 그만 괴롭히십시오."
25일 대선후보 TV토론에서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가 거의 울 듯 한 표정으로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에게 말했다. 안철수 후보의 발언은 내가 대선후보자 간 토론을 본 이래 가장 충격적인 대사 중 하나였다. 그는 어쩌다 저런 놀라운 발언을 하게 된 것일까?
그간 안 후보는 성공만 하고 살았다. 그는 학벌이 신분인 대한민국에서 서울대 의대를 졸업했다. 그 후에도 벤처기업가(자본가 혹은 오너의 다른 이름이다), 서울대 교수, 당 대표 등을 섭렵했다. 심지어 대선 지지율 1위도 해봤다. 안 후보는 학벌과 돈과 문화자본과 현실권력의 정점을 두루 경험한 대한민국에서 극히 예외적인, 어쩌면 유일한, 사람이다.
그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싫은 소릴 얼마나 들었을까?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 제대로 된 꾸중이나 지적을 얼마나 받았을까? 동등한 입장에서 토론을 얼마나 했으며, 비판을 얼마나 받아봤을까?
대등한 입장에서 토론해 보지 않은 사람이 어찌 토론을 견딜 수 있으며, 비판 받아 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비판을 참겠는가? 안철수 후보는 자신에 대한 평가나 비판 모두를 비난과 음해와 모함으로 인식하는 것 같다. 그러다보니 '나를 괴롭히지 말라' 같은 대선후보로선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발언을 한 것이 아닐까?
직업 정치인은 비판과 모욕, 심지어 비난과 모함과 음해를 일상적으로 겪는 사람이다. 그게 직업으로서의 정치의 비루한 면이자, 경쟁과 선택을 작동 원리로 하는 선출제의 속성이기도 하다. 나는 안철수 후보가 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안쓰럽다.
안 후보의 말만 문제가 아니다. 나는 안 후보가 입버릇처럼 사용하는 "국민이 이긴다", "대한민국은 진보의 나라도, 보수의 나라도 아니다" 같은 말들을 들으면 그가 정치의 본질에 대해 완전히 몰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하는 의문이 든다.
정치란 사회에 편재하는 모순과 대립, 균열을 정확히 포착하고 이를 비폭력적 방식으로 해소하는 예술이다. 한 사회에는 늘 갈등과 모순과 균열이 존재한다. 갈등과 모순과 균열이 없는 사회는 존재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직업 정치인 그 중에서도 대통령 중심제 국가의 대통령은 그 누구보다 사회에 존재하는 균열과 갈등, 모순을 정확히 직시하고 이의 해결을 위해 자원을 동원하고 배분해야 할 권한과 책임이 있다.
예컨대 한국사회의 최대 현안인 양극화 해소를 위해선 대규모 증세가 필수적이며, 증세로 인한 부담은 부자와 재벌 등 기득권 계층에게, 수혜는 경제사회적 약자들에게 각각 돌아갈 것이다. 어떤 정책을 채택하느냐에 따라 필연적으로 손해를 보는 사람과 편익을 누리는 사람이 각각 생기는 것이다. 조세, 재정, 금융, 산업, 노동 등 모든 부문의 정책이 그러하다.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혜택이 돌아가는 정책이란 찾기 어렵다.
대통령이 지지자만의 대통령이 되라는 말이 아니다. 대통령은 어쩔 수 없이 시대정신과 공동체의 가치에 따라 찬반과 호오가 첨예하게 갈릴 수 밖에 없는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는 자리라는 말이다. '국민'이나 '진보와 보수를 넘어'같은 선거용 레토릭으로는 세상에 쌓인 문제 중 어떤 것도 풀 수 없다.
나는 안철수 후보가 직업정치인으로 대업을 이루기 위해선 정치의 본질을 적확하게 이해하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비판과 비난, 조롱과 모함이 뒤범벅된 정치의 언어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철수가 정치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정치의 언어를 경멸한다면 정치인 안철수의 미래는 어두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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