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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적 시장질서와 경제민주화, 직장민주화
1930년대 대공황 시기에 미국의 루즈벨트 정부와 스웨덴의 한손-비그포르스 정부는 한편에서는 재정지출 확대와 함께 세계 역사상 최초로 민주적인 '복지국가로의 전환'을 이루어냈고 또한 동시에, 산별노조 및 산별 단체교섭의 법제화와 기업 이사회에 노동이사제 도입 등 '경제민주화'에 나섰다. 이러한 노사관계 민주화를 경제민주주의라고 불렀다. 경제민주화를 '직장 민주화'로 이해한 것이다.
이에 반해 안철수 후보는 경제민주화를 다르게 이해한다. 그는 '정부의 역할은 혁신적 기업가들이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경쟁을 할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고 그 판에서 반칙 행위를 엄격히 처벌하는 공정한 심판자 역할을 수행하는 데에 그쳐야 한다'고 하면서, 경쟁적 시장질서 확립의 주무부처인 공정거래위원회의 역할을 대폭 강화시키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정책을 '경제민주화'라고 칭한다. 아담 스미스의 '야경국가론' 즉 국가는 '공정한 심판자 역할에 국한되어야 한다'는 '작은 정부' 사상이다.
'경제민주주의'에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먼저, 경제민주화를 노사관계의 민주화 즉 '직장민주화'로 이해하는 패러다임이 있다. 실제 1920년대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내려오는 유럽과 미국 등 세계보편적인 경제민주주의 패러다임이며, 필자인 나 역시 경제민주화를 이런 입장에서 찬성한다. 이에 반해 경제민주화를 경쟁적 시장질서의 회복으로 보는 해석이 있다. 현재 안철수 진영의 경제민주화 프레임이 이러하다. 물론 여타 후보들 역시 대부분 경제민주화를 공정한 경쟁적 시장질서 확립의 프리즘으로 이해하면서 그것에 대해 찬성 또는 반대한다.
재정의 케인스, 투자+금융의 케인스
케인스는 사회복지와 최저임금제, 노동조합, 부자증세, 그리고 사회투자(공공투자) 및 재정지출 확대를 통한 소비확대(유효수요 창출)를 요구했다. 이것이 오늘날 문재인 후보의 '소득(소비) 주도 성장론'으로 표현된다. 매우 올바른 해법이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므로 보완되어야 할 점이 있다. 케인스는 '실물투자의 성장' 또한 원했다. 케인스는 막대한 화폐자본(금융자본)이 투기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막고 그 대신 그것이 생산적 분야로 흘러들어 일자리 창출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으며, 이를 위해서는 은행과 자본시장(증권시장)에 대한 철저한 규제·통제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재정의 케인스'는 잘 알려져 있는데 반하여, '투자+금융의 케인스'는 충분히 알려져 있지 않다. 케인스는 1930년대의 대공황이 발생한 근본 원인의 하나가 생산적 투자가 아닌 금융투기에 의존하는 자본주의 즉 기생충적인 자본주의(rentier capitalism)에 있다고 보았다. 케인스는 화폐자본(금융자본)에 뿌리 깊게 내재한 투기적 속성(그 일부인 유동성 선호)을 강력하게 통제하여야 한다고 보았고, 이를 위해서는 '투자의 사회화'가 필요하며, 필요하다면 정부가 금융시장을 일정하게 국유화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 케인스는 정부가 예금 이자율 및 대출이자율을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도록 규제하고, 동시에 은행 영업이 부동산 투기 및 증권시장 투기로 흐르지 않도록 강하게 규제하여야 한다고 요구했다. 더구나 단기적 일확천금을 노리는 투자자들의 무대인 주식 및 채권 시장에 규제의 족쇄를 물려서 유가증권시장(자본시장)이 진실로 건전한 생산적 투자자 역할을 하도록 전환시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렇듯 케인스는 화폐자본(은행 및 자본시장)에 대해 한편으로는 국유화, 다른 한편으론 투기적 성향에 대한 엄격한 정부규제를 통해, 화폐자본(금융투자자와 금융기관)이 투기와 약탈적 수익의 주체가 아니라 생산적 투자, 실물투자의 주체로 전환되기를 요구했다. 국유화된 화폐자본이란 오늘날 한국경제의 경우 산업은행, 기업은행, 그리고 ㈜한국벤처투자 같은 정책적 융자·투자 금융기관에 해당된다. (차기 대통령 정부는 필요하다면 중소기업 및 강소기업에 민간과 함께 공동으로 투자하는 공공투자기관을 설립할 수도 있다). 케인스는 공공투자를 통한 생산적 투자 지원 정책과 함께, 민간의 시장에서 일어나는 생산적 투자의 증가가 소득 및 소비의 증가로 이어지는 투자의 선순환 즉 투자승수 효과로 이어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현재까지 발표된 대선 후보들의 경제정책에는 투기적인 화폐자본(금융산업)에 대한 케인스의 해법이 빠져 있다. 여전히 주주민주주의(shareholders democracy)를 경제민주주의라고 부르면서, 사모펀드 및 헤지펀드의 역할과 권리를 더욱 강화하고, 또한 일반 주식투자자(소수주주)의 권한과 역할 역시 강화하는 내용의 상법 개정을 약속하고 있다. 또한 산업은행 등 국책은행은 관치금융이므로 그 역할을 축소하거나 또는 민영화하여 아예 국책은행을 폐기해야 한다는 정책전문가들도 많다. 민주당 및 국민의당 정치인들의 다수가 여전히 미국 월스트리트(Wall Street)을 모델로 하는 금융시장구조 재편 및 기업지배구조 재편을 요구하면서 월스트리트 자본주의의 일환인 주주자본주의(shareholder capitalism)를 주주민주주의로, 경제민주주의라고 부른다. 재벌개혁의 유일무이한 대안은 주주자본주의라고 말한다.
이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산업자본(생산적 투자자)의 역할을 줄이고 금융자본(비생산적 투자자)의 역할을 강화하자는 해법이다. 화폐자본(금융시장)의 투기성과 기생충적 성격을 억제하고, 그 대신 화폐자본의 생산적 투자자 역할을 강화하여야 비로소 자본주의의 건전한 문명적 역할이 만개한다고 본 케인스의 관점과는 반대되는 입장이다.
케인스와 산업구조조정
대우조선해양 구조조정의 예를 들어 이야기해보자. 9년째 계속되는 세계 대불황의 여파로 세계의 선박수요가 감소하면서 대우조선이 직격탄을 맞았다. 하지만 최근 세계경제는 조금씩 회복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고 선박수요 역시 조만간 살아날 것이라고 조선업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다. 그래서 산업은행 등 국책은행들이 대우조선 부채의 출자 전환 등을 통해 적극적인 조선업 구제에 나섰다. 그래야만 대규모 파산과 대규모 실직자 발생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케인스라면 어땠을까? 그는 당연히 대우조선 등 조선 산업에 대한 국책은행의 적극적 개입조치에 찬성했을 것이다. 국책은행의 경제적 역할을 더욱 강화하자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우조선이 발행한 채권을 보유한 자본시장 투자자들은 대우조선 회생에 완강하게 반대해 왔다. 대표적으로, 대우조선 회사채 4천억을 보유한 국민연금의 자산운용자들이 그러한 태도를 취했다. 이들은 대우조선해양의 회생가능성에 대해서는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2년짜리 계약직인 국민연금 자산운용 펀드매니저들의 관점에서, '대우조선이 2년 이후 생존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말은 자신들의 실적과 연봉에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당수의 진보적 경제전문가들도 국민연금 펀드매니저 편을 들고 있다. 이들 역시 '산업은행은 관치금융이고 국책은행의 기능은 축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단기수익에 더욱 관심이 많은 자본시장 투자자의 입장을 옹호하여왔다. 케인스의 해법과 정반대되며, 오히려 전형적인 시장 자유주의 즉 하이에크의 해법이다.
중소벤처기업 투자도 마찬가지이다. 지금과 같은 대불황의 시장 불확실성의 환경에서 자본시장과 은행은 단기수익의 관점에 서서 중소벤처기업 및 잠재적 강소기업의 성장을 위한 투자와 여신에 소극적이다. 만약 케인스라면 이 경우 어떻게 대처하였을까? 극심한 불확실성에 따른 과도한 투자 리스크를 정부가 나누어 분담하여야 상업적 투자가 구현되므로, 정부로 하여금 공공투자공사 같은 기관을 설립하여 공공과 민간이 공동의 리스크 분담 투자에 나서자고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도 산업은행과 ㈜한국벤처투자, 성장사다리펀드 같은 공공적 정책금융기관의 생산적 투자자 역할이 더욱 중요해진다. 다시 말해서, 안철수 후보가 중시하는 '중소벤처기업의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도 '투자+금융의 케인스'가 절실한 것이다.
'소득주도 + 투자주도'의 두 바퀴 경제성장론
흔히 케인스의 불황 탈출 해법을 유효수요 창출로 이해한다. 그런데 유효수요 창출을 위한 국가정책에는 소비 확대(내수시장 확대 및 그것을 뒷받침할 개인소득 확대)와 이것을 위한 소득불평등 타파(부자 및 대기업 증세와 사회복지 확대, 최저임금 인상 및 노동권 강화) 정책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러한 조치들이 매우 절실히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실물투자의 확대도 중요하다. 더구나 케인스가 자신의 <일반이론>에서 가장 중시한 것이 생산적 실물투자 확대였다.
한국경제는 현재 '자본 과잉' 상태에 있다. 시중에는 수천조 원의 규모로 떠돌아다니는 유동자본이 있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는 좋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수백만 명의 청년구직자들이 있다. 한편에서는 자본이 과잉이고 다른 한편에는 구직자들이 과잉 상태이다. 기업의 여유자금(사내유보금)과 은행의 여유자금(운용자산), 그리고 사모펀드·헤지펀드에 몰리는 화폐자본 등의 대부분이 생산적 실물투자 확대의 용도로 활용되지 않는 상태에 있다.
현재 한국경제가 직면한 상황과 비슷한 1930년대 대불황의 시장 환경에서 기업가들은 엄청난 시장 불확실성에 직면하여 실물투자를 꺼렸다. 이에 케인스는 정부가 공공투자를 확대하고 또한 동시에 금융시장·자본시장의 투기성을 규제하는 '투자의 사회화'에 나서야 비로소 화폐자본의 생산적 실물투자 확대가 달성된다고 주장했다. 만약 은행과 자본시장이 '스스로' (즉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의 작동) 생산적 투자를 확대하지 않는다면, 정부가 나서서 채찍을 휘두르고 당근을 제공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루즈벨트-케인스의 해법, '더불어 성장'의 해법
'소득(소비) 주도 성장론'은 작동하는데 비해 '투자 주도 성장론'이라는 또 다른 바퀴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 국민경제의 불균형이 초래된다. '재정의 케인스'만 채택하고 '투자+금융의 케인스'는 채택하지 않는 경우, 금융시장(자본시장)과 대기업 및 중소벤처기업에서 생산적 실물투자의 확대는 요원한 일이 되어 버린다.
문재인 후보의 현재 경제공약이 구현될 경우 소득주도 성장론이 실현된다. 사회복지 강화와 최저임금 인상, 노동권 강화로 일정한 임금인상이 가능할 것이며, 소득분배 개선 효과와 함께 삶의 질 개선과 소비(내수)의 활성화가 일정하게 가능할 것이다. 물론 이것만으로도 큰 역사적 성과를 이루어 낼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그것에 더해, 만약 생산적 실물투자 증가를 위한 '투자와 금융의 케인스' 정책이 보완된다면, 대단한 역사적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케인스의 관점에서 시장 경제의 선순환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긍정성, 즉 '자본의 문명적 기능'에 해당하는 '생산적 실물투자'였다. 자본투자의 문명적 역할을 살리면서 동시에 그것의 부정적-기생적 역할을 억제하려면, 부동산 등 자산시장의 투기성을 확실하게 규제하여야 하며, 또한 기업지배구조 및 금융시장구조를, 그리고 국민연금 등 공적 연기금의 지배구조 및 자산운용 구조(국민연금의 의결권 참여 전략의 방향을) 기업의 R&D투자와 인적자본 투자, 설비투자가 확대되는 방향으로 설계하여야 한다. 대기업 및 재벌그룹의 경우, 그 기업지배구조에서 투명성과 민주성을 확대하면서(노동이사제 및 독립적 감사위원제 도입), 동시에 대기업의 R&D투자와 설비투자, 인적자본 투자가 확대하는 쪽으로 인센티브 구조를 설계해야 한다. 국민연금의 유가증권 투자의 경우 투자기업에 있어 단기적 재무수익 증가에 머무르지 말고 장기적인 실물투자 및 일자리 투자 증가의 방향으로 경영진이 움직이도록 국민연금의 운용구조를 제도화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국민연금이 국공립 보육 및 의료시설과 공공임대주택에 대한 사회투자에 나서도록 제도화해야 한다. 그래야만 공공적 복지+문화 서비스의 확장에 필수적인 공공투자(사회투자)의 증가와 함께 양질의 일자리가 확실하게 증가하며, 그래야만 실질임금 증가와 노동시간 단축이 별다른 국민경제적 부담 없이 가능해진다. 또한 그래야만 '직장민주화'를 핵심 과제로 하는 경제민주화가 원활하게 달성된다.
한마디로 말해서, '자본의 투기성이 강화되는 경제민주화'가 아니라, '자본의 문명적 투자자 역할이 강화되는 경제민주화'여야 한다. 그래야 그 결과 보다 많은 좋은 일자리가 창출되는 '일자리 창출형의 경제민주화'로 나아갈 수 있다. 엄청난 유휴자본과 유휴인력(실직자, 구직자) 등의 유휴 자산이 서로 결합하여 최대한 생산적으로 재활용되는 방향의 경제정책을 이제부터 설계하여야 한다. '자본의 낭비'에 해당하는 부동산투기와 기업에 대한 투기적 공격, 그리고 투기적인 자본시장 투자자들의 권리 강화가 아니라, 그것을 최대한 억제하는 경제정책을 펼쳐야 한다. 그 대신 '자본의 생산적 활용'에 해당하는 실물투자 및 일자리 창출 투자를 격려하고 촉진하는 방향으로 기업지배구조와 금융시장의 규제를 민주적으로 전환하여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2008년 말 미국발 금융위기로 세계자본주의가 9년째 장기불황과 불확실성에 처하여 여전히 마땅한 수익을 내는 투자처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과잉 금융자본'의 상태를 종식하고 한국경제를 '더불어(포용적) 성장의 주역'으로 전환될 수 있게 하는 해법, 즉 민주주의의 정신에 부합하는 경제해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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