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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학문과 예술을 꽃피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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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조선후기 학문과 예술을 꽃피우다

2017년 4월 고을학교는 <안산고을>

4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 제42강은 기호남인(畿湖南人)의 근거지로서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실학자 이익(李瀷)이 둥지를 틀었고 사제지간인 강세황(姜世晃)과 김홍도(金弘道)의 예술이 탄생한 경기도 안산고을을 찾아갑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국내 최대 인공습지인 안산갈대습지ⓒ안산시

고을학교 제42강은 2017년 4월 23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8시 서울을 출발합니다.(정시에 출발합니다. 오전 7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쌍계사-안산읍성 및 관아지/안산객사-청문당/경성당-성호기념관/성호묘-점심식사 겸 뒤풀이--단원미술관-최용신기념관/최용신묘/샘골교회-안산갈대습지-별망성지-안탄대묘-잿머리성황당-서울의 순입니다.

▲<안산고을> 답사 안내도 Ⓒ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42강 답사지인 <안산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한남정맥이 부려놓은 마을

안산(安山)은 안성 칠현산(七賢山)에서 금북정맥(錦北正脈)과 갈라져 나온 한남정맥(漢南正脈)이 군포 어름에 솟아있는 수리산(修理山 475m)에서 서쪽으로 해안가에 부려놓은 저산성 구릉지에 둥지를 튼 고을로, 주변에는 수리산(475m)과 수암봉(395m)을 비롯하여 마산(246m), 칠보산(239m), 광덕산(209m), 황금산(167.7m), 노적봉(143m), 나봉산(135m), 큰산(106m) 등 대표적인 산봉우리가 10개 정도 있습니다.

안산의 물줄기는 반월천, 안산천, 화정천, 신길천 등이 있으며 이들은 모두 수리산의 수암봉과 그곳에서 이어지는 산줄기에서 발원하여 시화호로 흘러들어 가는데, 물줄기 이름에 모두 작은 물줄기를 뜻하는 천(川)을 사용한 것은 산줄기가 낮아서 물줄기 또한 작을 수밖에 없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안산의 평야는 대부분 산지와 산지 사이에 있는 침식평야(浸蝕平野)와 하천의 범람으로 생긴 퇴적평야(堆積平野)가 대부분이며 그 면적도 협소하였으나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 고잔벌이 간척되어 농경지가 되었으며, 해안선을 따라 계속해서 간척평야(干拓平野)가 더욱 늘어났습니다.

안산 지역은 원래 백제 땅이었으나 475년(장수왕 63) 고구려의 영토가 되면서 장항구현(獐項口縣)이라 하였고, 이때 서해안 방어를 위한 군사기지로 목내산성과 성곡산성이 축조되었습니다. 553년(진흥왕 14)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여 신라 영토가 된 뒤 757년(경덕왕 16) 장구군(獐口郡)이라 하였고 이때 남양의 당은군과 함께 초지동의 별망성을 중심으로 중국 교역이 성황을 이루었고 이러한 군사적, 경제적 입지를 바탕으로 신라 말기에는 안산김씨의 시조인 김긍필(金兢弼) 같은 친 신라계의 세력이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고려 건국 후 940년(고려 태조 23) 안산현(安山縣)으로 개칭되었고, 995년(성종 14) 관내도에 예속되었으며 1018년(현종 9) 지방제도 개편 때 양광도남경유수(楊廣道南京留守) 소속 수주(水州. 지금의 수원)의 속현이 되었으나 변함없이 대외교역의 중심지로서 잿머리[城頭] 포구에는 중국 상인들의 마을인 당인촌(唐人村)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김긍필의 아들 김은부(金殷傅)가 현종의 장인이 되면서 덕종, 정종, 문종의 외향(外鄕)이 되어 1308년(충렬왕 34) 안산군(安山郡)으로 승격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향교가 설치되었고 편리한 교통과 활발한 교역으로 물산이 풍부하여 잦은 외적의 침탈을 받았습니다. 고려 말에는 남양만(南陽灣)을 통하여 침입하는 왜구들을 방어하는 요충지의 역할을 했으며 1390년(공양왕 2) 경기도가 좌도와 우도로 나누어지면서 경기좌도에 예속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1413년(태종 13) 경기좌도와 우도를 경기도로 통합하고 8도제를 실시하여 군수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여 안산군 서남쪽 30리 되는 곳에는 초지량영(草地梁營)을 두었는데, 1656년(효종 7)에 이곳 초지진(草芝鎭)을 강화도로 옮기면서 종래 안산의 초지진을 1초지, 강화를 2초지라고 부를 만큼 서해안의 중요한 요새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조선 초기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 때, 안산 주민들은 이숙번(李叔蕃)의 세력 기반이 되어 난을 진압하고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는 데 기여하기도 하였으며 이 시기에 갯벌의 개간이 활발히 이루어져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었습니다.

▲실학의 산실 청문당ⓒ안산시

연성(蓮城)은 안산의 별호

안산은 조선시대에 연성(蓮城)이라고도 흔히 불렸습니다. 이는 세조 9년(1463) 문신이며 농학자인 강희맹(姜希孟)이 진헌부사(進獻副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연꽃 씨를 가지고 와서 안산의 관곡지(官谷池)에 시험 재배하면서 널리 퍼지게 되어 그 뒤부터 안산의 별호를 연성(蓮城)이라 했습니다.

이후 1400년(정종 2)에 안산김씨인 김정경(金定卿)이 ‘박포의 난’을 평정하고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올라 연성군(蓮城君)에 봉군되었던 점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연성으로 불린 것으로 보이며 17세기 초 김류(金瑬), 장유((張維)가 정계에서 물러나 인조반정(仁祖反正)의 거사를 꾀한 곳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지역적 정서가 18세기 이후 실학과 문화예술을 꽃피우는 원동력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성호(星湖) 이익(李瀷)은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풍을 내세워 많은 실학자들을 양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언어, 지리, 역사, 경학, 예학 등의 분야에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안정복(安鼎福), 신경준(申景濬), 윤동규(尹東奎), 정상기(鄭尙驥), 신후담(愼後聃)과 정약용(丁若鏞), 이벽(李蘗), 이기양(李基讓) 등이 이익의 실학사상을 이어받았습니다.

또한 정제두(鄭齊斗)의 양명학(陽明學)과 유중림(柳重臨)의 의학(醫學)도 이곳에서 뿌리를 내렸고 이익의 아들 이맹휴와 조카 이용휴는 ‘안산15학사’의 일원이 되어 이들과 함께 안산문화의 부흥시대를 열었습니다.

1895년(고종 32) 인천부(仁川府)에 속하였다가 다음 해에 도제(道制)가 부활하자 다시 경기도에 속하게 되었고 1994년 12월에 화성군 반월면 일부와 옹진군 대부면 전체가 편입되었으며, 1995년 4월에는 시흥시 화정동 일부와 장상동, 장하동, 수암동이 편입되어 오늘날의 안산시가 되었습니다.

안산은 주변의 산들이 높이가 낮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산성이 있었던 이유는 안산 일대가 중국과의 무역을 위한 교통의 요지이자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인접하여 접전을 치른 곳으로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발굴조사에 의하면 해안가를 따라 성곡산성-목내산성-별망성이, 내륙에는 성태산성-테미산성이 있었으나 지금은 거의 소실되었으며, 별망성 일부가 복원되었습니다.

당항성(黨項城)은 구봉산(九峰山) 기슭에 남아 있는 성으로 달리 당성(黨城)이라고도 부르는데, 처음에는 백제의 영토였으나 5세기 후반 고구려에 편입되면서 당성군이 되었고 이후 진흥왕 대에는 신라에 편입돼 당항성으로 불리며 외교,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경덕왕 대에는 당은군이 됐다가 신라 하대 흥덕왕 대에는 당성진이 되어 군사적 거점으로서 역할을 계속하였습니다.

신라는 삼국통일을 위해 당의 힘을 빌리려 했으나 한반도 동남부에 위치하여 중국으로 향하는 육로는 고구려에 의해, 해로는 백제에 의해 막혀있는 형세여서 신라는 당과의 통로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서해안의 항구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신라는 나제동맹을 깨뜨리고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하류와 당항성과 평택을 포함하는 경기남부 지역을 차지하여 중국과의 교류는 대부분 서해안 항구를 이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항성(또는 당은포)을 비롯해 충남 당진의 대진(大津), 전북 옥구의 진포(鎭浦), 전북 부안의 희안(喜安), 전남 나주의 회진(會津) 등이 당시 서해 연안의 주요 항구였습니다.

신라는 이 중 당항성과 회진을 당나라와의 주요 교통로로 사용했습니다. 9세기 당에 건너가 동방대보살이라는 명성을 얻기도 했던 낭혜화상(朗慧和尙)도 당항성에서 배를 타고 중국을 다녀왔고 문무왕 8년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 신라에 들어온 유인궤(劉仁軌)가 이끄는 당나라 수군도 산동반도에서 출발해 당항성으로 들어왔습니다.

▲실학(實學)의 대가 성호(星湖) 이익(李瀷)ⓒ안산시

당항성에 서린 사연

당시 중국 역사서인 <신당서(新唐書)>에 당에서 신라 수도까지 가는 방법을 기록하고 있는데, 중국 등주(登州)를 출발해 요동반도 서남단을 거쳐 서해안을 따라 남하해 당항성에 상륙한 후 거기서부터 육로를 따라 700리를 가면 신라의 수도가 나온다고 했습니다.

신라의 수도 경주까지 가는 육로는 여러 길이 있지만 평택을 지나는 경로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평택-안성-충주-상주로 이어지는 길은 충주를 지나서는 큰 산맥을 넘지 않기 때문에 이동에 있어 다른 길에 비해 상대적으로 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당과의 교류를 위해 이 길을 지났을 것으로 보입니다.

목내산성(木內山城)은 목내동을 중심으로 주위의 산 능선을 따라 쌓은 성으로 현재는 성벽의 흔적을 찾을 수 없고, 능선의 절단면에 성벽으로 보이는 2m 높이의 토축(土築)만이 남아 있습니다. 삼국시대의 토기편과 통일신라시대의 인화문 토기편,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와편과 토기, 자기, 청동 유물 등 각 시대의 유물로 미루어 보아 오래전부터 목내산성 안에 마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마을의 남쪽은 능안마을[陵內村]이고 북쪽은 성안마을[城內村]로, 능안마을은 15세기 중엽 이곳에 소릉(문종의 비 현덕왕후의 능)이 조성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보이며 성안마을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거주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성태산성(城台山城)은 신라가 한강 하류까지 세력을 넓히던 6세기 중반에서 후반에 걸쳐 축조되어 통일신라 때까지 사용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성태산(城台山 160.7m) 정상부를 에워싼 전형적인 테뫼식 산성으로, 길이는 372m이며, 성벽은 높이가 6.5m 이상, 폭은 4.5m 정도로 추정되며 산비탈을 ‘L자’형으로 파낸 뒤 성벽을 쌓고 뒷채움석을 채워 넣는 방식으로 축조된 내탁식(內托式) 공법을 사용하였습니다.

안산 지역은 신라 진흥왕(眞興王) 이후 중요한 대외무역 기지일 가능성이 높은 곳이기에 성태산성은 신라가 이 지역까지 세력을 넓히는 과정에서 안산 일대의 해안 방어를 위하여 축성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정상에서는 안산 일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고, 서해의 해안선과 수원(水原)으로 이어지는 육로를 동시에 관망할 수 있는 천혜의 지형적 요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성곡산성(城谷山城)은 해봉산(海峯山 48m)에 축조된 산성으로 정확한 성의 규모와 구조는 알 수 없으나 정상부에 흙으로 쌓은 성의 흔적이 조금 남아 있으며 해봉산 정상부와 주변 지역에서 발견된 다수의 토기편과 기와편의 상당수가 삼국시대의 것이었으며 산 정상부에 평탄한 대지가 있고 경순왕을 모시는 성황당이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성두산에 둘레가 약 200칸(360m 정도)인 흙으로 쌓은 보루(堡壘)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했으며 구전(口傳)에 의하면 고구려 장항구현의 폐지(廢址)라고 한다”라고 적고 있어 해봉산 일대에 성이 있었음은 확실하며, 고구려 장항구현의 치소(治所)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별망성(別望城)은 남양만(南陽灣)으로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 위해 조선 전기에 축조된 석성으로 야산의 능선을 연결하여 석축을 쌓고 성벽을 해안까지 연접시켜 선박의 출입이 가능하도록 한 해안 평산성(平山城)입니다. 육상 전투까지 대비하여 배후의 산 능선까지 연결하여 비교적 큰 규모로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데, 평지에는 군영지(軍營地) 터가 남아 있으며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1656년(효종 7)에 이곳의 초지진을 강화도로 옮겨 이곳을 1초지, 강화도의 것을 2초지라 하였다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문종 조에는 이곳에 수군만호영(水軍萬戶營)이 있었으나 갯벌에 밀려나가 선박의 출입이 어려워지자 사곶(沙串, 永宗浦營)으로 옮겼다가 문종 때에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능인 소릉(昭陵)이 가까운 목내동에 있고, 바다가 다시 깊어져 선박의 출입이 가능해지자 다시 안산 지역에 영(營)을 둔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 안에서 청자 및 도자기 조각들이 출토되었으며, 전설에 의하면 이곳은 당나라 사신의 왕래가 있었던 곳으로 우리나라의 영접사(손님을 마중하고 배웅하는 사람)가 있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으로 성벽의 대부분이 파괴되었다가 1988년에 길이 225m, 높이 1.45m, 상부 폭 2.4m, 하부 폭 10m 정도로 복원하였습니다.

왜구에 대비한 안산읍성

안산읍성(安山邑城)은 해안으로 침입하던 왜구에 대비하기 위하여 축조하였습니다. 안산읍성 바로 뒤편의 수리산(修理山)이 험한 산세여서 따로 산성을 축조하지 않아도 피란이 가능하였으리라 짐작되고 축조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조사 결과 고려 후기에 축성된 것으로 보이며, 처음에는 단원구 목내동에 있었으나 소릉의 영조(營造)로 1441년 현재의 읍성 부근으로 옮겨가고, 1669년(현종 10)에 당시 자리에서 동남쪽 약 50m 지점인 상록구 수암동 지금의 위치로 옮겼습니다.

안산읍성은 옛 안산군의 진산인 수암봉(秀巖峰)에서 서쪽으로 길게 뻗은 소금절골과 작은골 사이의 자연지형의 능선을 이용하여 평지를 감싸도록 쌓은 전형적인 평산성(平山城)입니다. 장방형의 모서리가 약간 둥글게 처리된 말각사각형(抹角四角形) 형태이고 전체 둘레는 772.2m, 내부면적은 36,000㎡로 성의 서북쪽과 동북쪽 상단에는 장대지(將臺地)가 있어 넓은 평야를 한눈에 관망할 수 있고 특히 배후에 해발 395m인 수암봉을 의지하고 있어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새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축조 방법은 성벽의 내면과 외면을 쌓아 올리는 공법을 사용하였고, 성벽 일부는 외면만을 석축하고 안쪽은 흙과 잡석으로 쌓아 올렸으며 주요 방어 지역인 서쪽은 2중으로 성벽을 쌓았는데 성벽의 높이는 2~3m, 폭은 상부가 3m, 하단부가 7m 정도이며, 보존 상태는 다른 유적지에 비하여 양호한 편입니다.

안산관아(安山官衙)의 전체적인 규모는 당시의 관원들 수를 살펴봄으로써 간접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는데, 안산에는 음서(蔭敍) 출신의 종4품관 군수가 있었고, 그 휘하에 좌수 1명, 별감 2명, 군관 8명, 아전 22명, 통인 8명, 사령 12명, 관노 8명, 관비 5명, 객사직 1명, 향교직 1명, 옥감고 1명 등 모두 70명이 상주하였으며 그 외에도 정조의 수원 원행(遠行) 때, 호위에 필요한 병력과 자체의 병력을 합하여 800여 명의 인력동원이 가능하였다고 합니다.

기록에 따르면 1669년 이전의 안산관아는 현재의 서쪽에 있었으며 현재 남아있는 초석으로 건물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데, 옥사는 관아의 남서쪽에 있었고, 창고는 56칸에 달하는 큰 건물로 관아의 남쪽에 있었으나 훼철되어 장대석과 와편만이 곳곳에 산재해 있습니다. 안산객사는 관아의 동편에 있었고 지금은 경작지로 변해 있어 그 규모를 정확히 알 수 없으며 관아의 정문인 평근루(平近樓) 또한 이미 훼철되었습니다.

관아를 이곳으로 옮기게 된 것은 이곳의 땅이 밝고 시원해서인데, 이곳은 풍수지리적으로 성인군자가 배출된다는 비봉혈(飛鳳穴)로, 이러한 곳은 예로부터 읍 터로 정해지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지세가 비봉을 닮았다고 하더라도 봉황이 날아가면 읍이 멸망하기 때문에 봉황이 좋아하는 대나무를 심어 봉황이 영구히 머물게 하였다는데, 그런 연유인지 안산관아 터 지대석 바로 밑에 대나무가 자라고 있습니다.

안산향교(安山鄕校)는 건립 시기와 원래의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문종(文宗)의 탄생지라 하여 안산이 군으로 승격된 1308년(충렬왕 34) 직후 건립된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의 위치에 건립된 것은 1569년(선조 2)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임진왜란 때 전국의 대다수 향교가 불타 없어지는 상황에서도 안산향교는 온전히 보존되었으나, 1944년 일제의 1군 1향교 정책에 따라 시흥향교와 함께 과천향교에 통폐합되었으며, 향교 건물은 1957년 철거되었는데, 자재 일부가 상록구 수암동의 노인회관 건축자재로 사용되었습니다.

실학의 산실 청문당(淸聞堂)

청문당(淸聞堂)은 조선 중기의 사대부 전통가옥으로 진주유씨 16세손 유시회(柳時會)가 처음 건립하였습니다. 유시회는 원래 충북 괴산에 살다가 조카 유적(柳頔)이 선조의 아홉 번째 부마로 정해진 후 유적의 아버지 유시행(柳時行)이 사망하자 사위가 한양에서 괴산까지 무려 300리 이상을 왕복할 것을 걱정하여 100리 안쪽에 묘 터를 잡으라는 선조의 명에 따라 안산시 상록구 부곡동 새 터에 묘를 정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진주유씨는 넓은 사패지(賜牌地)와 안산 바닷가의 어염권을 기반으로 안산에 세거하여 왔습니다.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여 조선 후기에는 기호남인(畿湖南人) 3대 가문의 하나로 손꼽혔고 청문당은 조선 후기 정치권력으로부터 소외된 남인 문사들의 교류 장소이며 더 나아가 실학의 산실이었고 특히 만권루(萬卷樓)는 조선 4대 서고의 하나로 기호남인들의 학문적인 기반이 되었습니다.

청문당은 선조가 내린 사패지에 진주유씨의 16대 손인 유시회(柳時會)가 지었다고 합니다. 유시회는 선조의 부마가 된 어린 조카 적(頔)과 함께 이곳에 자리 잡았는데 조선 후기 정치권력으로부터 소외된 기호남인(畿湖南人) 문사들의 교류장소로, 더 나아가 실학의 산실이 되었으며, 이곳에서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과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의 그림이 탄생하였고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의 민족사학이 성장하였으며 많은 학자와 예술가들의 둥지가 되었습니다.

특히 20세손 유경종(柳慶種)은 시문에 능하였고 의학에 조예가 깊어 유의(儒醫)로 칭송을 받았는데 그는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문하로 매부인 강세황(姜世晃)과 지기인 안정복(安鼎福)과 함께 어울렸으며 말년에는 이곳을 중심으로 오천시사(午川詩社)가 결성되어 각지의 많은 문인과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강세황은 8세에 시를 짓고 13, 14세에 쓴 글씨를 얻어다 병풍을 만든 사람이 있을 정도로 일찍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나 가난으로 32세 때 안산(安山)으로 이주하여 이곳에서 처가인 진주유씨 집안으로부터 물질적, 정신적 도움을 받으며 그의 예술세계를 형성해 갔으며 일찍부터 안산에 세거하고 있던 이현환(李玄煥), 이광한(李匡煥) 등 이익(李瀷) 집안의 남인 지식인들과 교유하면서 시와 서화에 전념하였습니다.

61세가 되던 해 영조의 배려로 처음 벼슬길에 올랐고 64세에 기로과(耆老科)에, 66세에는 문신 정시에 수석 합격하였으며 관직은 영릉참봉(英陵參奉), 사포별제(司圃別提), 병조참의,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등을 두루 거치고 71세 때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감으로써 할아버지 강백년(姜柏年), 아버지 강현(姜鋧)에 이어 이른바 삼세기영지가(三世耆英之家)의 영예를 얻게 되었습니다.

강세황은 18세기 대표 문인화가로 시서화(詩書畵)의 삼절(三絶)로 칭송받는 한편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南宗文人畵風)의 정착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진경산수(眞景山水)의 발전에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양화풍을 수용하고 참신한 소재를 채택했고 채색에서도 새로운 시도를 추구하였으며 조선의 문예부흥기로 불리는 영, 정조시대 화단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는 '예원(藝苑)의 총수'가 되었습니다. 처남 유경종(柳慶種), 친구 허필(許佖), 이수봉(李壽鳳)과 절친했으며 이익(李瀷), 심사정(沈師正), 강희언(姜熙彦) 등 여러 사람들과 교유하였고 그에게서 그림을 배운 제자로는 김홍도(金弘道)와 신위(申緯)가 있습니다.

강세황과 김홍도

특히 강세황과 김홍도는 나이도 서른 살쯤 차이가 나고 신분도 달랐지만 사제지간으로, 직장 동료로, 나아가서 친구로, 40년 세월을 함께하며 조선 후기 미술사에 큰 업적을 남겼는데 그들의 인연이 시작된 곳이 안산인데,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는 두 사람이 함께 그린 것으로 강세황이 소나무를, 김홍도가 호랑이를 그렸다고 합니다.

김홍도는 중인 신분으로 이른 나이에 도화서(圖畵署)의 화원이 돼 20대 초반에 궁중 화원으로 명성을 날렸습니다. 29세에 영조의 어진(御眞)과 왕세자(정조)의 초상을 그렸는데 이에 대한 포상으로 사포서(司圃署) 감목관이 됐으며 두 달 후 강세황이 같은 곳으로 발령을 받아 두 사람은 함께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김홍도는 30대에는 생동감 넘치는 풍속화로도 이름을 날렸고 40대에는 정조의 명으로 금강산에 가 그곳의 명승지를 그려왔고, 정조의 어진을 그려 중인(中人)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직책인 충청도 연풍현감을 지냈으며 안산 앞바다의 풍경을 그린 <어살(漁箭)>, <매해파행도(賣蟹婆行圖)>, <균와아집도(筠窩雅集圖)> 등의 작품을 남겼는데 이런 연유로 안산에는 그의 호를 행정구역명으로 정해 ‘단원구’가 생겨났습니다.

청문당의 배치는 앞마당에 면하여 ‘ㄷ’자형 사랑채가 우뚝 서 있고, 그 뒤로 ‘ㄱ’자의 안채와 ‘ㅡ’자형 아래채가 안마당을 둘러싸고 있어 전체적으로는 트인 ‘ㅁ’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안채는 안방, 대청, 건넌방 순으로 배열되어 있고 안방 남쪽으로 부엌이 날개처럼 달려 있으며 대청 앞에는 툇마루를 두었습니다.

사랑채는 서쪽으로부터 광, 일꾼 방, 대문간, 사랑방, 서고가 차례로 배열되어 있고 안채 동북쪽에 있는 사당은 청문당의 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고 뒤뜰에는 화계(花階)가 조성되어 있으며 집 앞에는 오래된 연지(蓮池)가 있습니다.

경성당(竟成堂)은 진주유씨 22세손 유중서(柳重序)가 둘째 아들 유방이 살림을 낼 때 지은 집으로 원래 정재골에 있는 진주 유씨 18세손 유명천(柳明天), 유명현(柳命賢) 형제가 공부하던 서실인데 후에 유원성(柳遠聲)이 차명하여 당호로 썼다고 합니다.

경성당은 1850년경 건립된 가옥으로 안채는 약 200여 년 전, 사랑채는 약 170여 년 전에 지어졌으며 아래채는 약 25년 전 철거되고 그 자리에서 동쪽으로 조금 물러난 자리에 시멘트 건물 한 채를 세웠으며 사랑채는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안채 또한 약 25년 전에 철거하고 서울에 있던 한옥을 이건하였습니다.

원래는 사랑채 동남쪽에 잿간, 뒷간, 헛간으로 구성된 헛간채가 따로 있었고, 노비들이 기거하던 행랑채도 있었으며 사랑채 마당 남쪽에 넓은 연못이 있었으나 사랑채 누마루 곁에 있는 우물물이 줄어들어 급수가 어려워지는 바람에 40여 년 전 밭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안산은 한양에서 가까운 지리적 특성으로 왕족들의 묘역과 실학의 대가 성호 이익 선생의 묘도 있으며 충신, 효자, 열녀의 정문(旌門)이 많습니다.

현덕왕후(顯德王后)는 1441년(세종 23) 7월 단종(端宗)을 낳은 다음 날 세상을 떠나 안산에 안장되었는데 이후 문종(文宗)이 왕위에 오른 후 현덕왕후로 추봉하고, 능을 소릉(昭陵)이라 하였습니다. 세조(世祖)가 왕위를 찬탈한 뒤, 결국 조카인 단종을 죽이자 현덕왕후는 세조의 꿈속에 나타나 그 잔악함을 꾸짖었는데, 이에 대한 보복으로 세조는 소릉을 파헤쳐 없애버렸으나 1513년(중종 8) 왕명으로 현덕왕후의 시신을 찾음으로써, 현덕왕후는 문종과 함께 동구릉에 있는 현릉(顯陵)에 합장되었습니다.

검소와 겸손의 삶, 안탄대(安坦大)

안탄대(安坦大)는 중종의 빙장(聘丈)이며 선조의 진외증조부(陳外曾祖父)인데 딸인 창빈안씨(昌賓安氏)는 1507년(중종 2)에 중종의 후궁으로 들어가 2남 1녀를 출산하였으니 장남은 영양군이고 차남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이 되며 딸은 정신옹주입니다.

그래서 선조는 덕흥대원군의 아들이며 선조 이후 역대 16대 왕은 창빈안씨의 혈손이 된 안탄대 선생의 외손으로 계승되었는데 안탄대 선생은 생존 시 종7품인 적순부위(무관의 종7품)를 지냈고 부귀영화를 사양하고 검소와 겸손으로써 생애를 마쳤으며 사후에 우의정으로 추서되었습니다.

안탄대 선생은 집안이 몹시 가난한데도 자기분수에 맞지 않는 일에는 결코 눈을 돌리는 일이 없었으며, 성품이 매우 순하고 부드러워서 다른 사람과 다투는 일이 없었는데 딸이 빈(嬪)이 된 다음부터는 몸가짐을 더욱 조심하고 근신하였다고 합니다. 그의 묘비문(墓碑文)에 따르면 효종(孝宗) 때 왕명으로 비문을 지으면서도 안산안씨만 밝히고 그의 선조와 가계를 밝히지 않았으니 그의 자나 호를 알 길이 없고 출생일과 사망일조차도 전하지 않고 있습니다.

취몽헌 오태주(吳泰周) 묘역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서예가인 오태주와 그의 부인 명안공주(明安公主)를 모신 합장묘의 유택으로, 오태주는 현종의 셋째 딸인 명안공주와 혼인하여 해창위(海昌尉)에 봉해졌고, 명덕대부(明德大夫)의 위계를 받았으며 이어 광덕대부(光德大夫)에 올랐고, 오위도총부 도총관, 조지서(造紙署)와 귀후서(歸厚署)의 제조(提調) 등을 지냈습니다.

명안공주는 현종의 셋째 딸로 어머니는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이며 숙종의 누이입니다. 7세에 ‘명안(明安)’이란 작위에 봉해졌고, 1679년(숙종 5) 오태주(吳泰周)에게 출가했으나 병으로 23세에 일찍 죽자 숙종이 조회를 폐하고 부의(賻儀)와 장수(葬需)를 보내고 관사(官司)에 명하여 제물을 준비토록 하여 의례를 갖추어 애도를 표했다고 합니다.

명안공주의 비문은 오태주가 짓고 써서 1688년(숙종 14)에 세웠으며, 오태주의 비문은 김창흡(金昌翕)이 짓고, 1720년(숙종 46)에 명안공주와 같은 묘비에 오태주의 유필을 모아 집자하여 새겼습니다. 어제치제문비(御製致祭文碑)는 숙종이 명안공주의 죽음을 슬퍼하여 지은 제문과 오태주가 죽었을 때 지은 제문을 새긴 비석으로, 전면에 1716년 숙종이 내관 장세상(張世相)을 보내 오태주를 애도한 글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1681년 여관(女官)을 보내 명안공주를 애도한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오정각(五旌閣)은 1456년(세조 2)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하였던 이조판서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와 아들 김현석(金玄錫)의 충신정문(忠臣旌門)과 탄옹공(炭翁公) 김충주(金忠柱), 아들 김경남(金景南), 손자 김약전(金約前)의 효자정문(孝子旌門)을 모신 곳입니다. 1851년 경기도 안산의 유생들과 김녕김씨 후손들이 세덕사(世德詞)를 세워 김충주의 효(孝)를 추모하였는데 그 후 1870년(고종 7) 김문기 부자 충신과 김충주의 3대에 걸친 효자에게 왕명으로 정려(旌閭)가 내려져 세덕사에 오정각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고송정지(枯松亭址)는 1827년(순조 27) 김처일(金處一)이 그의 9대 조인 김충주(金忠柱)를 위해 지은 고송정(枯松亭)이 있던 곳으로, 김충주는 할아버지 김문기(金文起)와 아버지 김현석이 단종 복위운동에 참여했다가 죽음을 당하자 밤중에 도성을 도망하여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가 현재의 단원구 화정동에 숨어살면서 평생 고기와 술을 먹지 않고 베옷에 평민들이 쓰던 모자를 쓰고 다녔다고 합니다.

‘숯 굽는 노인’으로 산 탄옹공(炭翁公) 김충주

단종에 대한 충성이 약해질 때마다 단종의 묘가 있는 영월을 바라보면서 통곡하였으며,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비명에 숨진 것을 애통하게 여겨 흘린 눈물에 소나무가 말라죽었다고 하는데 초가를 짓고 숯을 구워 파는 것을 업으로 삼으며 스스로를 ‘숯 굽는 노인’이라는 뜻의 탄옹(炭翁)이라서 고송정지를 탄옹고지(炭翁古址)라고도 합니다.

사세충렬문(四世忠烈門)은 조선시대 장의공(壯毅公) 김여물(金汝岉)과 그 집안의 4대에 걸친 여인들을 기리는 정문(旌門)으로 임진왜란 당시 순국한 김여물과, 병자호란 때 오랑캐에게 욕을 당하느니 죽는 편이 옳다고 여겨 강화도 앞바다에 몸을 던져 순절한 이 집안 여인들을 기리기 위하여 나라에서 건립한 것입니다. 김여물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신립과 함께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군과 싸우다가 강에 투신하여 순국한 인물입니다.

실학(實學)의 대가 성호(星湖) 이익(李瀷)은 1681년(숙종 7) 부친 이하진(李夏鎭)이 경신환국으로 유배 길에 평안도 운산에 와 있을 때 태어났는데 1705년(숙종 31년) 증광문과(增光文科)를 보았으나 낙방하고 이듬해 둘째 형 잠(潛)이 장희빈(張禧嬪)을 두둔하는 상소 때문에 역적으로 몰려 당쟁으로 희생되자 벼슬을 단념한 후 안산 첨성촌(瞻星村. 상록구 일동)에 머물며 일생을 학문에 전념하였는데 그가 평생토록 떠나지 않고 거주하며 학문의 커다란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이곳 지명에서 ‘성(星)’ 자를 따서 그의 호를 지었다고 합니다.

이익 선생은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의 학풍을 계승하여 실학자의 중조(中祖)가 되었으며 그의 학풍은 그후 안정복, 이가환, 이중환, 정약용 등에게 계승되었습니다. 천문, 지리, 의학, 재정, 지방제도, 과거제도, 학제, 병제, 관제 등 현실적인 문제에 비판과 이상 및 사상을 널리 써놓은 <성호사설(星湖僿說)>을 비롯한 <성호문집(星湖文集)>, <이자수어(李子粹語)>, <성호질서(星湖疾書)>, <곽우록(藿憂錄)> 등의 저서를 남겼으며 조정에서는 선생이 돌아가신 후에 학덕을 높이 평가하여 이조판서에 추서하였습니다.

직계 후손이 없어 이익 선생 묘는 방치되었으나, 1967년 5월 성호이익추모회에 의해 묘역이 정비되고 묘비와 향로석, 망주석 등이 새로 세워졌으며 묘역의 석물로는 묘비(墓碑)와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망주석(望柱石)이 있고 묘소 오른쪽에는 사당이 있습니다.

최용신(崔容信)은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 채영신의 실제 인물로 1931년 지금의 상록구 본오동에서 농촌지도교사로 있으면서 농촌계몽운동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하여 순교자적인 활동을 하다가 꽃다운 나이에 유명을 달리 하였습니다.

잿머리[城頭] 성황당(城隍堂)은 고려 성종 대에 내부시랑(內部侍郞) 서희(徐熙)가 송나라 사신으로 가기 전에 장도(壯途)를 비는 제를 지내기 위해 세운 것으로, 이후 매년 정월 보름과 칠월칠석에 칠성맞이 행사를, 시월에는 도당굿을 올리고 있습니다.

성황당지는 약 30여 평이고 성황당의 면적은 15평으로, 당집은 화재로 새로 지었으며 내부에는 홍씨부인 영정, 안씨부인 영정, 관음장군 영정, 대신 영정, 마태장군 영정, 용궁칠성 영정, 성황기 등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안산지역은 지형적으로 해안가이고 평야지대여서 전통사찰이 거의 없습니다.

쌍계사(雙溪寺)는 안산시 유일의 전통사찰로 1689년(숙종 15)에 창건되었고 당시에는 수정암(水井庵)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부근에서 1576년(선조 9)에 만들어진 기와가 발굴된 것으로 보아 1576년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1641년(헌종 7)에 절이 파괴되었다가 1869년(고종 6)에 중창했습니다.

사찰의 건물로는 극락보전과 요사채 2동이 있고, 유물로는 목조아미타불좌상과 현왕탱화, 신중탱화, 독성탱화, 지장탱화 등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밖에 인근에 부도가 남아 있으며, 명문이 적힌 기와조각도 많이 발굴되었습니다.

화림선원(華林禪院)은 계향산 자락에 있는 사찰로 고려시대에 창건되어 중국으로 오가던 사신들이 머물던 곳이라고 전해지는데 본래의 사찰은 소실되고 1972년 용성스님이 대웅전 중수(重修) 당시 장래 미륵불이 출현하는 곳을 화림동산이라 하여 그 뜻을 새기고자 약수암(藥水庵)을 화림선원이라고 바꾸었다고 합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 모자, 선글라스, 식수, 윈드재킷, 우비,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이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 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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