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 별세한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은 유신정권 시절 권력의 막후에서 악역을 마다하지 않았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충성스런 심복으로 기억된다.
18년 장기집권의 길을 연 3선 개헌과 10월 유신 선포, 김대중 납치사건 등 박정희 정권 때 저질러진 대표적 공작정치의 배후에 늘 그가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인연을 맺은 것은 61년 5.16 군사쿠데타였다. 5.16 주체세력은 미국의 지지를 끌어내는 것이 급선무였는데, 이를 위해 당시 미중앙정보국(CIA)과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이 전 부장을 영입했던 것.
미 군정청이 운영한 군사영어학교를 나와 육군 정보국 차장과 주미대사관 무관을 거친 그는 국방부 정보부대을 지내면서 CIA의 연락책을 했고, 이를 계기로 그는 4.19 후 소장으로 예편하면서 총리 중앙정보위원회의 연구실장을 맡았다.
5.16 직후 부패 혐의로 체포됐지만 친미 정보통이란 경력 때문에 권력의 정점에 다가서게 된다. 당시 권력 2인자였던 김종필 전 총리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영자신문을 발행하던 대한공론 사장 자리를 그에게 맡긴 것.
이어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으로 발탁된 이 전 부장은 군부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끌어내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쿠데타 주역들을 따돌리고 박 전 대통령의 신임을 독차지하게 된다.
이를 두고, 군사 쿠데타세력을 `용공'으로 의심했던 미국의 오해를 벗고 국가발전을 모색하기 위해 박 전 대통령이 대표적인 친미파였던 이 전 부장의 역할을 적극 `활용'했던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군부의 대변인이 된 그의 앞길은 말 그대로 탄탄대로였다. 63년 박 최고회의 의장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39세 나이에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발탁돼 6년간 재임했고, 3선 개헌 파동으로 물러난 뒤 잠시 일본 대사를 거쳐 70년 중앙정보부장에 기용됐다.
신민당 김대중 후보와 맞붙었던 71년 대선을 치러내고 남북관계 개선과 장기집권의 틀을 만들어내기 위해 이 전 부장같은 정보력과 판단력을 두루 갖춘 인물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박 전 대통령의 전폭적인 신뢰에 이 전 부장은 충성심으로 답했다. 주일대사 시절 스시를 좋아했던 박 전 대통령을 위해 청와대 오찬에 맞춰 항공편을 통해 스시를 보낸 것이나, 대북 밀사로 떠날 때 허리춤에 독극물을 휴대한 것은 그의 충성심을 잘 드러내는 일화다.
정재철 한나라당 상임고문은 회고록 `아름다운 유산'에서 "이후락 부장은 만일의 불상사가 일어날 경우를 대비해 목숨까지 내놓을 각오를 하고 있었을 정도로 박 대통령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한 분이셨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나친 권력욕과 과잉 충성은 화를 자초했다. 73년 `윤필용 설화 사건' 직후인 김대중 납치사건을 주도한 죄로 실각한 것.
윤필용 사건은 당시 윤 수도경비사령관이 술자리에서 이 부장에게 "박 대통령이 노쇠했으니 물러나시게 하고 후계자는 이후락 형님이 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 쿠데타 모의로 비화돼 그를 정점으로 하던 군내 하나회 인맥이 대거 숙청당한 사건이다.
공교롭게도 그해 8월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를 두고 이 부장이 박 전 대통령의 신임을 잃을 수 있다는 위기감에서 저지른 것이라는 분석이 유력하게 제기돼왔다.
하지만 이 부장은 5공 신군부에 의해 부정축재자로 몰려 정계를 떠난 후에도 역사적 사건의 실체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특히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7년 박 전 대통령이 김대중 납치사건을 묵시적으로 승인했다는 과거사위의 발표로 인해 박 전 대통령의 명예가 실추됐는데도 죽기 전까지 침묵으로 일관함으로써 두 사람의 관계를 단순한 주군과 신하로 보긴 어렵다는 해석에 무게가 실릴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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