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새벽 4시. 승합차에 자전거를 싣고 치악산 기슭을 내려와 영동고속도로를 달려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하자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엄마, 올해 생신은 같이 못하겠네요?” 애들이 환송을 나왔다.
“그렇구나. 너희 둘이서 촛불 켜고 멀리서라도 축하해 줄래?”
“아빠, 추석날엔 어디쯤 있을 거야?”
“음…. 일본 나고야쯤 될걸.”
“너희들 다음 주에 휴가라고 했지? 차 몰고 피곤하게 운전하지 마라. 깊은 물속에도 들어가지 마라. 밤늦게 돌아다니지 말고. 알았지?” 엄마의 당부 사항이 길다.
유난히 출국장 입구가 좁고 짧아 손 흔들던 애들의 모습이 금방 보이지 않았다.
인천국제공항을 9시 15분에 이륙해 세 시간 만에 중국 셴양공항에 도착했다. 우리나라보다 한 시간 늦은 11시 15분. 공항 대합실에서 피켓을 들고 기다리던 픽업 차량 운전기사를 만나 시안 시내로 향했다.
왕복 8차선을 가로지른 빨간색 초대형 간판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육교 위 전통 가옥 모양의 홍보 전광판을 몇 개 통과해 한 시간 걸려 유경국제 대주점에 도착했다.
순조로운 출발을 위해 첫 3일간은 국내 여행사를 통해 미리 예약을 해 놓았다. 중국에서는 숙박업소를 ‘대주점’, ‘주점’, ‘반점’, ‘빈관’ 등으로 부른다.
자전거 박스를 대주점 캐리어에 싣고 승강기를 이용해 507호실에 들어가 곧바로 자전거 조립에 들어갔다. 튜브에 공기를 주입하고, 핸들을 바로 조이고, 짐받이를 설치하고, 체인에 기름을 쳤다.
짐을 일일이 재분류해 이동하며 자주 꺼내는 물건들은 가방 위쪽에 넣었다. 방 안 가득 풀어 놓은 짐을 보고 청소하시는 분이 들어왔다가 놀라실까 걱정된다.
오후에 동북아 대장정의 첫 페달을 밟게 될 고루 광장을 찾아 나섰다. 찜통더위 속에 숨이 콱콱 막혀 조금 걷다가는 연신 그늘에서 멈췄다. 시안 경찰서 바로 옆에 위치한 이 광장은 오백 평 정도의 공원에 이동식 화분이 군데군데 자리 잡고 있었다.
‘고루’는 1384년 명나라 태조 때 시간을 알리기 위해 큰북을 달아 놓은 누각인데 북을 쳐서 저녁에 성문이 닫히는 시간부터 한밤중까지 시간을 알렸다고 한다.
고루 광장 바로 옆 ‘회족거리’에 들어섰다. 중국의 대표적인 야시장으로 이름난 회족(이슬람)거리 골목은 이미 양고기 굽는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잘게 썰어 말린 과일, 전병, 엿, 두부 등 다양한 음식들이 즐비했다.
역시 시안은 3천 년 역사 도시이자 비단길의 관문답게 동서양의 문화가 다채롭게 형성되어 있었다.
다음 날. 생필품도 살 겸 시안 중심가에 들어서자 곧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상점마다 출입구에 고성능 스피커를 세워 놓고 음악을 크게 틀어 놓거나 종업원이 마이크를 잡고 상품을 소개하고 있었다. 옆집 소음을 제어하기 위해 상점마다 볼륨을 최대한 높인 것 같았다.
섭씨 39도. 모든 상점이 현관 출입문을 활짝 열고 에어컨 바람을 바깥으로 내보내 손님들에게 냉방 서비스를 하고 있었다.
거세게 불어 나온 냉풍과 뜨거운 바깥공기가 만나 휘감기며 피부에 닿는 자극이 불쾌했다.
차량들은 쉴 새 없이 경적을 울려대며 조금이라도 먼저 가려고 뒤섞여 아슬아슬했다. 가만히 살펴보니 경적을 울릴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차량들이 한 뼘 틈새로 끼어들어 경적을 울리는 것은 서로의 안전을 지키려는 의무인 듯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호등과 상관없이 대로를 건너다니고, 갑작스럽게 달려오는 역주행 차량들은 당당해 보였다.
차도 옆으로는 자전거뿐만 아니라 보행자와 오토바이, 삼륜차도 같이 달릴 수 있는 도로가 별도로 나 있었다.
너무 더워 숨이 막힐 지경이라는 게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가만히 있어도 흘러내린 땀이 턱 아래서 뚝뚝 떨어졌다. 정신이 혼미했다. 한마디로 북새통이다.
우린 길거리에서 생수 500ml 네 병을 천 육백 원에 사 그 자리에서 모두 마셔 버렸다.
대주점 안내데스크에 부탁해 택시를 불러 30분 거리에 있는 대자은사에 도착했다. 대자은사는 당 태종 때 황태자가 어머니 문덕황후를 공양하기 위해서 세운 사찰이라고 하는데 그 경내에 대안탑이 있었다.
경내를 입장하는 데 1인당 50위안(1만 원)을 내고, 대안탑을 오르는데 추가로 1인당 30위안(6천 원)을 지불했다.
이 대안탑은 당나라 때 천축을 다녀온 현장이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을 보관하기 위해 흙으로 만든 7층 전탑으로, 각층 전시관에는 콩알 크기의 하얀 사리가 조명 빛에 반짝였다. 64m 높이의 탑 위에 오르니 시안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대안탑을 중심으로 큰 대로가 사방으로 끝이 안보일 정도로 뻥뻥 뚫려 있었다.
8월 3일 아침. 대주점 프런트에 보증금 영수증을 제시했다. 중국은 숙박업소에 체크인 할 때 숙박료 이외에 ‘야진’이라는 보증금을 예치해야 한단다.
장기간 투숙하는 것도 아닌데 무슨 보증금이 필요할까? 중국 사람들은 의심이 많다고 하더니 정말 그런가 보다. 어찌됐든 보증금 500위안(10만 원)을 되돌려 받았다.
가방 여섯 개를 자전거에 각자 나눠 싣고 대주점 현관을 나서는데 추니의 자전거 뒷바퀴에서 드르륵 드르륵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이게 무슨 소리지? 어디서 나는 걸까?”
현관 안쪽 구석에서 짐을 모두 내리고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이봐요.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밖에 나가서 하세요.” 덩치 큰 종업원이 다가와서 주의를 준다.
“밖은 너무 더워서요. 잠깐이면 될 것 같은데요.”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무조건 나가라며 더 큰 제스처를 취했다. 우린 할 수 없이 회전문을 나와 현관 바깥 왼쪽 공터 그늘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이봐요.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여기는 주차하는 곳입니다.”
“아, 미안해요, 그럼 어디서….”
“저쪽 반대편에 가서 하세요.”
다시 짐을 들고 반대편으로 옮겼다. 알고 보니 무게로 주저앉은 짐받이에 바퀴가 돌면서 닿는 소리였다.
우선 고무 밧줄로 소리 나는 쪽의 가방을 둘둘 감아 반대편 쪽으로 힘껏 당겨 매서 일단 응급조치를 마쳤다. 그나저나 앞으로가 걱정이었다.
10시 30분. 고루 광장에 도착해 삼각대를 세우고 가져간 현수막을 펴 들었다. 하나둘씩 사람들이 모여들고 궁금하다는 듯이 웅성거린다. 우린 모인 사람들에게 우리의 여행 소개서를 한 장씩 나눠줬다.
추니는 가져간 풍선을 몇 개 불고 나더니 머리가 띵 어지럽단다. 풍선을 받아 든 아이들이 신나서 좋아하니 부모들도 덩달아 즐거운 표정이다.
정오. 시안 고루 광장에서 자전거 동북아 대장정의 첫 페달링을 시작했다. 핸들에 나란히 꽂은 한·중·일 국기를 바람에 펄럭이며 108번 국도를 따라 도심을 서서히 빠져나와 동쪽으로 향했다.
뒤따르는 추니가 백미러에 들어왔다. ‘역주행 차들을 조심하자’며 몇 번이고 서로에게 일렀다. ‘빵빵’ 계속되는 경적은 우리를 향해 누른 건지 다른 차량을 향해 누른 건지 알 수 없지만 점차 무감각해지기 시작했다.
오후 3시. 샤오핑디안춘을 지나다가 자전거로 보름 동안 툰황까지 간다는 대학생 두 명을 만났다. 행색을 보고 피차 먼 길 떠난다는 걸 쉽게 알아차렸다.
“이 뜻이 뭐예요?” 우리는 그들이 펴든 현수막의 의미를 물어봤다.
“together(함께)라는 뜻입니다. 소수민족에 대한 배려를 의미하죠. 그런데 그 건 무슨 뜻입니까?”
“이거요. 올해 광복 70주년을 기념해 동북아 3국을 횡단하는 거예요.”
“여기, 연락처입니다. 중국 여행하시다가 궁금하신 거 있으면 연락 주십시오. 그리고 ‘위쳇(WeChat)’하고 계신가요?”
“아뇨.”
학생들은 내 스마트폰에 위쳇 앱(어플리케이션)을 다운로드해 주고 그들의 전화번호를 입력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빵 두 개를 줬고 우리는 그 학생들에게 2018평창동계올림픽 기념 배지를 줬다.
절그럭 절그럭!
린퉁을 10km 정도 앞두고 자전거 기어를 변속시키자 체인에서 나는 소리였다. 체인은 두세 단씩 제 맘대로 기어를 오르내리더니 점점 작동이 잘 되지 않았다.
길가에서 간단한 응급조치를 했는데 계속 말썽을 피워 고개를 오를 때는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야 했다.
“쯔어후진요지씽츼어수이마?” 중국어 회화 6개월 배운 실력을 발휘하여 지나는 이에게 자전거 수리점이 근처에 있는지를 물었다.
“…메이요, 메이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는 건지, 자전거 수리점이 없다는 건지 모르겠다.
8월 4일. 린퉁 애금해 주점 방에서 기어 변속기의 조임 장치를 풀었다 조이기를 반복하며 꼼꼼히 살펴봤지만 좀처럼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다음 도시에서 전문 수리점을 찾아봐야겠다.
자전거를 주점에 맡겨 두고 진시황제의 병마용갱 유적지를 가려고 택시를 탔다. ‘진시황병마용박물관’ 입구에는 이미 많은 관광객들이 우산을 들고 줄을 서 있었다. 입장료는 1인당 150위안(3만 원)으로 꽤 비싼 편이었다.
박물관에 들어서자 장엄한 광경이 펼쳐졌다. 진흙으로 빚어 만든 갑옷 입은 병사들이 지하에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자세히 표정을 보니 얼굴 크기와 표정은 물론 머리 모양과 손동작까지도 제각각이었고 살아 움직이는 듯 리얼했다. 병사들의 키 높이가 170~180은 족히 넘게 보이는 걸 보면 실제보다 조금 더 크게 만들어진 것 같았다.
시안 동북쪽 37km 지점에 위치한 이곳 병마용갱은 1974년 들판에서 우물을 파던 농부들이 발견했다고 한다.
이는 황제를 호위하던 병사들로 진시황제가 죽기 전에 미리 지하에 묻어 둔 것이었는데 7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10년 넘게 공사를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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