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오후 상도동 자택에서 소식을 접한 김 전 대통령은 "아쉽고도 안타깝다"면서 "나라의 거목이 쓰러졌다고 생각한다"며 애도의 뜻을 표했다.
이후 세브란스 병원을 찾은 김 전 대통령은 회한에 찬 표정으로 빈소로 들어섰다. 두 사람은 1963년 6대 국회에서 만나 영호남을 대표하는 소장 정치인으로 주목받으며 인연을 맺었다.
▲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은 김영삼 전 대통령. ⓒ프레시안 |
하지만 1970년 대선후보 경선에서 DJ는 2차 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판세를 뒤집으며 정치적 역전에 성공했다.
이후 박정희 정권의 독재 강도가 높아질수록 두 사람의 협력관계도 돈독해졌다.
하지만 1980년 서울의 봄, 1987년 직선제 쟁취 등 외부의 압력이 낮아질 땐 외려 갈등과 경쟁이 치열해지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1987년 첫 직선 대통령의 명예는 노태우 예비역 육군대장이 차지했다.
1992년 대선 맞대결에선 김영삼 전 대통령이 거대 민자당을 등에 업고 낙승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눈물을 흘리면 영국으로 떠났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은 일년 반 만에 귀국해 정계 복귀를 선언하며 야당 총재로 다시 섰다. 두 사람의 갈등이 가장 고조됐던 시기였다.
하지만 대선 시기 김영삼 전 대통령은 당시 김태정 검찰총장에게 'DJ 비자금 의혹 수사 중단'을 지시하면서 우호적 분위기가 형성, 두 사람의 갈등은 종결되는듯 했다. 그러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집권한 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 씨에 대한 사면이 늦어지자 YS는 다시 '투사'로 돌변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무반응에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일방적 맹공은 10여 년 동안 이어졌다.
이같은 애증의 세월이 40여 년이 지나 김영삼 전 대통령은 지난 10일 세브란스 병원을 전격 방문해 "이제는 그럴 때도 됐다"면서 화해를 선언했다. 그리고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한 뒤 첫 조문객으로 만나 기나긴 특수 관계의 종지부를 찍었다. 빈소를 찾은 김 전 대통령은 "안타깝고 아쉽다. 예전에 큰 변혁을 같이 이끈 동지이자 경쟁자였다"고 말했다.
그는 "평생을 같이 해왔다. 40여년 동안 싸움과 화해를 반복해 왔다. 너무 많은 일들이 기억난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생전에 "내가 죽으면 김(영삼) 전 대통령이 제일 슬퍼할 것이고 김 전 대통령이 죽으면 내가 그럴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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