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구속은 시작일 뿐, 갈 길이 멀다."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 집회가 25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렸다. 박 대통령 취임 4주년인 이날 집회에서 주로 나온 목소리는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 '특검 수사 연장' 등이었다.
다른 목소리도 있었다. 촛불 집회가 17차에 이르는 동안 줄기차게 나왔던 주장, 바로 '재벌 개혁' 요구다. 재벌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공범이다. 박근혜 정부 비선 실세 최순실 씨를 후원한 대가로, 재벌은 이익을 누렸다. 그러나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인력과 시간의 제약 탓에 삼성을 제외한 재벌에 대해선 사실상 수사를 포기하다시피 했다. '특검 수사 연장'을 외치는 목소리와 재벌 개혁 요구는 이 대목에서 만난다. 특검팀에게 보다 많은 시간을 보장하면, 다른 재벌에 대한 수사도 가능하다.
삼성 비리 수사 역시 한계가 뚜렷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구속했을 뿐, 정작 정경유착 비리를 모의하고 실행한 이들은 손도 대지 못했다. 최지성 삼성 미래전략실장(부회장), 장충기 삼성 미래전략실 차장(사장) 등을 구속 수사하지 않고서는, 삼성 비리 수사가 성과를 낼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장충기 사장은 삼성과 권력의 검은 거래 내역을 꿰고 있는 인물이다. 삼성 미래전략실 해체와 함께, 최 부회장과 장 사장이 퇴진한다는 말이 나온다. 그러나 이는 '꼬리 자르기'일 뿐이라는 게다. 장 사장 퇴진과 함께 삼성이 주도한 정경유착의 역사 역시 어둠에 잠기리라는 우려가 있다.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의 '재벌 구속 특별위원회'(재벌구속특위)는 이 대목을 문제 삼는다. 재벌구속특위는 17차 촛불 집회 하루 전인 지난 24일 '1박 2일 행진'을 시작했다. '새로운 세상, 길을 걷자 박근혜-재벌 총수를 감옥으로 대행진'이다. 재벌구속특위는 24일 오후 서울 강남구 대치동 특검 사무실 앞에서 행진을 시작했다. 이후 광화문 광장에서 하루 밤을 보낸 뒤, 25일 낮에 서울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다시 행진을 했다. 이후 서울 종로구 SK 본사 등을 거쳐 이날 저녁 촛불 집회에 합류했다.
SK 본사 앞에서, 이해조 희망연대 노동조합 SK 브로드밴드 비정규직 지부장이 발언대에 올랐다. 그는 "지난해 9월 SK 브로드밴드 노동자가 비 오는 날 전봇대에서 작업하다가 추락해 사망했다"며 말문을 열었다. 이어 그는 "노동자들이 이렇게 목숨을 바쳐서 번 돈으로,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111억 원의 뇌물을 마련했다. 그걸 박근혜 대통령에게 주고 사면을 받았다"라고 말했다. SK그룹이 미르 재단과 K스포츠 재단에 낸 돈을 합친 액수가 111억 원이다. 이 돈이 최태원 회장 사면을 위한 뇌물이라는 주장이다. SK그룹을 비롯한 재벌이 미르·K스포츠 재단에 낸 돈이 과연 뇌물인지는, 수사를 통해 밝혀야 한다. 이날 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외쳤던 '특검 수사 연장' 구호는, SK 노동자들의 염원이기도 하다. SK 노동자들은 그들이 목숨을 잃어가면서 회사에 벌어다 준 돈이 불법 행위에 쓰였는지에 대해 알 권리가 있다.
재벌구속특위의 행렬은 서울 종로구 GS건설 건물 앞도 지나갔다. 그 때, "전경련을 해체하고 허창수를 구속하라"라는 구호가 터져 나왔다. 허창수 GS그룹 회장은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이다. 전경련은 1961년 이병철 삼성 창업자가 설립할 당시부터 '정경유착'의 축이었다. 재벌이 정치권력을 만나는 창구였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에도 같은 역할을 했고, 결국 최순실 씨가 설립을 주도한 미르·K스포츠 재단 출연금 모금을 주도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지면서 삼성·현대·SK·LG 등 4대 재벌 계열사가 잇따라 탈퇴했다. 그러나 전경련은 지난 24일 정기총회에서 허창수 현 회장을 재선임하기로 했다. 후임자를 찾지 못했다는 이유인데, 사실상 간판을 유지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공범 노릇을 한 데 대한 반성은 없었다.
재벌구속특위의 1박 2일 행진은 촛불 집회 종료와 함께 마무리 됐다. 김태연 재벌구속특위 위원장은 "노동자 목숨을 위협하는 재벌 구조를 해체하고, 재벌 총수를 구속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 재벌의 봉건적인 지배 구조에선, 총수의 전횡을 막기 힘들다. 총수가 저지르는 온갖 비리의 밑천은, 직원들을 쥐어짠 대가로 마련한다. 그런데 대기업은 비정규직과 영세 협력업체에게 궂은 일을 떠넘기기 일쑤다. 결국 총수 호주머니 속 검은 돈이 늘어날수록, 먹이사슬 가장 아래 쪽에 있는 노동자들은 목숨이 위태로워진다. 노동자 목숨과 재벌 총수 구속을 연결 짓는 주장은 그래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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