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 스트레스의 첫 고비
아이의 변화 중에서도 많은 부모들이 고대하는 것은 아마도 '백일의 기적'이라고 하는 '통잠'(아기가 밤에 깨지 않고 푹 잠)이 아닐까? 그것은 새벽마다 최소 서너 번씩 깨서 젖을 물리는 일에서 해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젯밤 우리 둘째에게도 그 기적이 찾아왔다.
"연수가 5시간을 쭉 잤나 봐!"
"어? 정말? 깼는데 몰랐던 건 아냐?"
"우는 소리를 못 들은 것 같아."
"우아! 다 키웠네?"
어리둥절하면서도 기쁜 마음이 드는 사이 아내는 첫째의 경험을 빌려 예언을 했다. "대신 낮에 안 자겠지." 정말 그랬다. 저녁에 퇴근하여 집에 오니 아내의 얼굴이 살짝 어둡다. 낮 동안 아이의 '등 센서'가 작동해서 이만하면 잠들었겠지 싶어 내려놓으면, 이내 눈을 뜨고 칭얼거리기를 수차례 반복해서 옴짝달싹 못 했단다. 그래도 첫째 때만큼 힘들지 않다는 말에 그사이 내공이 많이 쌓였구나 싶었다.
인터넷 검색창에 '백일의 기적'이라고 넣어 보면, '기절'도 함께 나온다. 내가 나름대로 이해한 바는 기절할 만큼 힘들 때 기적이 일어나서 힘을 준다는 의미다. 그게 백일이든 그 이후든 간에 힘든 육아를 버틸 희망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참 고마운 발상이라 생각한다. 혹자는 집에서 아이만 돌보는데 뭐가 힘드냐는 댓글을 달았다. 그러나 출산 후 여성의 85%가 가벼운 우울증을, 그리고 10~20%는 우울증을 겪는다는 통계가 있다. 여러 이유로 몸과 마음이 힘드니 우울증이 찾아오는 건 당연하다. 아내도 첫째가 어느 정도 큰 후에 "가볍게 우울증이 왔던 것 같아"라고 얘길 했고, 주변의 육아 선배들 중에서도 밝은 모습만 보여 준 사람은 없었다. 육아 스트레스는 분명 관리가 필요하다. 다행히도 우리는 나름대로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방법을 조금씩 터득했다. 그것은 완벽하지 않았지만 그럭저럭 효과가 있었다.
'독박육아'를 즐기는 법을 찾아
큰아이가 생후 200일쯤 된 무렵 아내는 자신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마음 한편에선 '나도!'라는 소리 없는 외침이 있었던 것 같지만, 둘 다 고생할 바엔 한 사람이라도 쉬는 게 낫겠다 싶었다. 아내는 한 달에 두세 번의 주말에는 육아에서 손을 떼고 커피숍에서 한두 시간 보내거나 밀린 집안일을 하고 잠을 자 기도 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만족도는 기대 이상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주말 오전이면 아이를 데리고 집을 나서기 시작했다. 아기 띠를 매고 대형마트를 몇 바퀴씩 돌고 박물관과 미술관을 전전했다. 지루함을 달래려 팟캐스트를 참 많이도 들었다. 어느 날 우연히 마트에서 지인을 만났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잠깐의 수다가 어찌나 반가운지! 어떤 재미난 팟캐스트도 살아 있는 수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아예 계획을 세워서 그동안 못 본 지인들을 만나 봐도 좋겠단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육아 선배를 몇 명 만나고, 커피숍을 운영하는 후배와 집에서 쉬는 선배도 찾아가 만났다. 고등학교와 대학 졸업 이후 한 번도 안 나간 동창 모임에도 나갔다. 한동안은 주말마다 약속 잡고 만나며 나름대로 육아를 즐기기도 했다. 그런데 아이를 데리고 함께 만날 만한 사람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았다. 아이가 없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아이를 같이 돌보게 되는 결과로 이어져 서로 부담이었다. 또 아이가 있다 하더라도 아이의 나이와 부모의 성향, 집의 개방 여부와 거리, 아이를 돌보는 것이 엄마인가 아빠인가에 따라서 좁은 선택지가 점점 더 좁아졌다. 같이 놀이터와 박물관을 다니고 강변으로 가족 엠티도 갔지만, 만남은 지속되지 못했다. '아예 조건에 맞는 사람들과 동네에서 만나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으로 인터넷에 검색해 봤지만, 주말의 동네 아빠 모임은 찾지 못했다. 어쩌다 가는 키즈카페에 나 같은 아빠들이 서너 명 있었지만 내가 먼저 나서기엔 용기가 없었다.
그사이 주말 나들이는 점심 귀가에서 이른 오후 귀가로 연장되었다. 지인들과 어울려 점심을 먹다 보니, 자연스레 늘어난 것이다. 때론 아이와 둘이서 밥을 사 먹기도 하고 미리 도시락을 싸 가기도 했다. 돌아오는 길에 아이는 대개 잠이 들었다가 해가 질 때쯤 일어났다. 하루 육아의 3분의 2를 끝내고 아내도 만족하니 기분도 뿌듯했다. 아이가 조금 크자 장난감 가게와 도서관, 재래시장도 방문지에 추가되고 어느 정도 일정한 코스가 생겼다. 이제는 주말이면 아이가 먼저 오늘은 어디를 가야 하는지 이야기해 준다.
아이들끼리 놀 공간이 부족해
그러나 여전히 아쉬움이 크다. 무엇보다 동네에 아이가 놀 만한 공간이 부족하다. 우리 아이는 유모차를 타기보다 밀기 좋아하고 걷기보다 뛰기를 즐기지만, 수시로 차가 오가는 골목은 안전하지 않다. 아파트 놀이터는 안전하지만, 주민이 아니라 눈치가 보인다. 가끔 서너 명의 형과 누나가 있을 때도 있다. 그러면 놀이에 끼워 주지 않아도 아이는 그들의 뒤를 따라다니며 혼자만의 놀이로 신이 났다. 그러나 혼자 노는 것은 우리 아이만이 아니다. 한강 변 큰 놀이터에 가면 크고 작은 아이들이 많지만, 모두 각자 놀거나 함께 온 가족과 놀 뿐이다. 그래도 아이들은 신나게 논다.
그런데 나는 더 재밌게 노는 법을 알고 있다. 거기 있는 어른들 모두 하나쯤은 재미난 놀이를 알고 있을 것이다. 사람이 많을수록 재미난 놀이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도 아이들에게 다른 아이와 함께 이렇게 놀자고 하지 않는다. 어쩌면 보호자가 없다면 아이들끼리는 어울려 놀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동네 놀이터를 확대하고 조금 더 안심할 수 있는 장소로 바꾼다면 어떨까? 놀이 선생님도 한두 분 정도 있으면 좋겠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친구가 생기고 부모의 부담이 덜어지면 우울증을 조금은 덜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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