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을 바꿀 수 있는 길은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이같은 질문을 던진 박승옥 기적의협동조합 상임이사는 주권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생각을 바꾸는 것이 첫 걸음이라고 답한다. 무엇보다도 민주주의에 대한 세뇌와 여론 조작의 늪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 급선무라고 말한다. 촛불 혁명을 통해 주권자 연대와 연합의 힘을 자각한 국민이 직접 대한민국을 통치하는 민주주의야말로 내 삶과 세상을 바꾸는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청와대의 주인을 누구로 정할 것인지에 앞서서 민주주의에 대한 오해와 왜곡에서부터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만민공동회, 3.1운동, 4.19 혁명, 6.10항쟁 등에 이어 주권자가 국가 권력을 한 발 뒤로 물러나게 한 다섯 번째의 혁명을 맞이하고 있다. 정치의 근본을 고민하는 박승옥 상임이사의 글을 5회에 걸쳐 연재한다.
[내가 알아야 민주주의다] ① 청와대 주인 없는 정치, 이것이 민주주의다
[내가 알아야 민주주의다] ② 빼앗긴 사법주권의 탈환, 이것이 민주주의다
[내가 알아야 민주주의다] ③ 선거를 의심하라, 정당을 의심하라
[내가 알아야 민주주의다] ④ 마침내 결사의 시대가 왔다
민주주의를 향한 뜨거운 주권자 인민의 직접 행동이 끊이지 않고 터져 나왔음에도 대한민국은 왜 아직도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대의제 참주정, 기득권자들의 과두정 정치 체제가 지속되고 있을까? 그냥 미군정과 미국 탓만 하고 있으면 될까? 아니면 뛰어난 정치 지도자가 없어서일까?
미군정과 미국의 책임도 있고, 역대 정치 지도자들의 무능력도 책임이 있긴 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책임은 우리들 인민 스스로에게 있다. 주권자로서 민주정치를 책임지고 운영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과 실력이 모자랐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광장 정치를 부활시키는 데는 성공했으면서도 민주주의의 제도화를 제대로 실현시키지는 못했다. 광장을 열어 제끼고 민주주의의 백화제방을 이룩한 뒤엔 늘 똑같은 방식으로 다시 대통령이나 정당을 바꾸는 권력자 바꾸기의 대의제 극장정치 시즌 1, 2의 시리즈물이 반복되게끔 허용하고 말았다.
대의제를 민주주의로 잘못 인식하면 대의 권력의 노예 신세에서 벗어나는 것은 요원하다. 자신의 주권을 찬탈당한지도 모르는 무능은 인민을 엘리트 참주 정치가들의 선동에 농락당하는 시청자 대중으로 전락하게 만든다. 우리 스스로 뿌리깊은 나무 바람에 아니 흔들릴 정도로 대한민국을 민주주의 정치 체제로 굳건하게 만들지 못하면 광장정치의 부활 이후에 시리즈물 극장정치의 연속 상영 행태는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솔직히 이 점을 자각하고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국가 차원 이전에 일상생활에서조차 민주주의를 실천하지 못해 왔고, 지금도 못하고 있다. 냉정하게 말해서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심지어는 취미 동아리에서조차도 민주주의는 없거나 무기력하다. 자신의 의견을 뚜렷이 밝히는 자유인으로서의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제대로 행사하지 못해 왔다. 가정에서도 아버지 어머니는 절대 군주처럼 일상의 모든 문제를 결정하고 학교에서도 학생 자치는 구호일 뿐 힘 있는 교장 선생님이 거의 모든 문제를 결정한다. 군대와 직장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지역공동체의 일상 속에서도 온갖 비리와 부정의에 대한 자유인으로서의 당당한 비판과 주권 행사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저 나 하나 참고 지내면 속편하지 하는 외면과 무관심에 익숙해 있다. 스스로 자신의 처지와 신세를 자각하지 못하는 주권자는, 주권자도 자유인도 아니다. 아니 자격조차 없다.
요즘 유행하는 개개인의 내면의 힐링은 참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공동체와 사회, 국가 차원의 힐링과 성찰이 전제되지 않는 개인의 힐링은 불가능하다. 눈을 뜨면 도처에 불의와 불평등의 억압과 착취에 시달리고 있는 참혹한 이웃이 있는데, 눈을 감고 외면한 채 내면의 힐링과 평화를 추구한다는 것은 도피이자 기만의 평화이다. 내 가족, 내 이웃의 삶, 나아가 우리 사회 전체를 자유롭고 평등한 자유인들의 사회와 국가로 바꾸는 일은 그래서 그 어떤 종교혁명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다. 예수와 붇다 등 동서양의 그 어떤 종교 지도자들도 사회와 국가의 현실을 정면에서 응시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다만 예수와 붇다는 사회와 국가의 혁명만 가지고는 인간이 참된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없다는 자명한 진리를 설파했던 것이다.
주권자가 자유인으로서 인민의 정치혁명을 시작하는 일은 그러므로 거창한 이데올로기 혁명에 그치지 않는다. 주권자 혁명은 보통 사람들의 삶의 혁명이자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다. 그리고 종교의 영성을 동반한 혁명이기도 하다.
문제는 지역이다
문제는 지역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민주주의 광장 정치를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부터 상설의 민주주의 광장정치로 확산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우리는 더이상 연기 잘하는 정치 배우들이 등장해 쇼를 연출하는 극장 무대의 멍청한 관객이 아니다. 출구조사와 밤샘 개표 방송같은 투표권의 드라마 무대에 일희일비하는 고립된 모래알 주권자가 아니다.
매일매일 지역의 일상생활에서부터 수많은 지역 주민이 출연하는 상설의 야외 정치광장 무대를 설치하는 것은 이제 지역 주권자의 몫이다. 비상근 정치인으로서 매일매일 일상의 정치활동을 수행하는 일은 지역 주민의 과제이다. 지역의 주요 정책과 제도, 국가의 주요 정책과 제도를 인민이 직접 알고 심의하고 결정하는 상설의 정치 제도를 만들고 이를 실행하는 것은 이제 지역 촛불 연대와 연합이 해야 할 일이다. 지역 촛불의 연대와 연합이 광화문 촛불의 마르지 않는 수원지며, 이것이 민주주의를 지속가능하게 만든다.
100년이 넘는 한국 중앙정치의 기득권 지배 세력 구조는 지방에 똑같은 토호세력 지배 구조로 연결돼 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중앙 기득권 지배 세력들의 그 착취의 빨대는 곧바로 다름아닌 지역의 주권자 인민들에게 꽂혀 있다. 깨어 있는 지역 주권자들이 연대하고 연합하면 이런 빨대부터 잘라내는 것은 사실 일도 아니다. 지역 토호 세력들의 대의제 극장 정치 구조를 지역 인민들의 힘으로 민주주의 광장 정치 구조로 바꾸는 것도 그리 어려운 과제가 아니다. 독재 세력의 권력과 돈의 원천을 무너뜨리는 것은 의외로 간단하다.
재벌과 언론, 특권 관료 등 극우 기득권 매국노들의 주요한 경제 기반은 기업과 부동산이고, 금융과 국가 재정이다. 예컨대 전체 인민의 절반이 무주택자인 현실에서 서울의 지역인 강남을 비롯한 도시 곳곳의 건물과 주택, 전국에 걸친 지방의 토지는 이들의 마르지 않는 젓줄이다. 청문회 때마다 불거지는 장관과 국회의원 후보들의 불법 땅 투기는 하나의 삽화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런 불법과 탈법, 부패의 땅 투기부터 지역 주권자들의 단합된 힘으로 얼마든지 없애 버릴 수 있다. 지역의 민주주의 광장 정치 세력이, 지역 정치의 연대 연합이 전국 방방골골에서 지역 기득권 토호정치를 바꾸고, 동시에 그 힘으로 중앙의 극장정치 무대를 밑에서부터 허물수 있는 다양한 길은 이미 열려 있다.
혁명은 멈춤이다, 공동의 집 건축이다
인민이 모두 권력과 재물의 태산과 바벨탑에 가는 것을 멈추고, 거기 가서 밭농사 논농사도 짓지 말고, 넘치고 넘치는 상품 만드는 일도 하지 말고, 거기 가서 시장도 보지 말고, 그러면 바벨탑의 콘베이어 벨트는 돌아가지 않고 멈춰 설 수밖에 없다. 그러면 체제는 저절로 멈추어 진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그저 즐겁게 이웃의 티끌과 바보들과 함께 스스로 집 밥 만들어 같이 나누어 먹고, 함께 일하고, 기쁘게 놀면 된다. 예수님의 오병이어 기적은 이런 멈춤의 지혜와 우리의 ‘공동의 집’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이다.
멈춤이야말로 수탈당하는 노동 노예들, 억압당하고 힘없는 바보들과 티끌들의 최상의 지혜이다. 무력으로 권력자와 재벌들과 군산복합체와 국제 금융마피아들을 이길 가능성은 이제는 전혀 없다. 무력과 착취와 억압을 이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은 또다른 무력이 아니라, 멈춤과 비폭력 평화다. 바보들이 착취당함과 억압당함을 멈추는 그 순간 돈과 권력은 힘없는 휴지 조각이 되고 만다. 티끌들이 자유인이 되고 바보가 되어 자유와 자비의 삶을 이웃과 함께 누리는 것, 그것이 저 권력과 부를 허무는 지름길이다. 신자유주의를 이기는 가장 슬기롭고 즐거운 비폭력 평화의 체제 바꾸기 비법이다.
무엇보다도 주권자인 인민이 지배자들이 던져 준 허상의 고정관념을 깨고 생각을 바꾸는 일이야말로 만고불변의 지름길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주위 사람들을 보수와 진보의 진영으로 나누어 편을 가르는 진영 논리와 진영의 삶에서 벗어나는 것이 출발이다. 보수-진보의 적대적 진영 수렁에서 빠져 나와야 새로운 신천지를 볼 수 있다. 적대와 배제, 살인과 전쟁의 논리를 버리고, 하루라도 빨리 자유로운 ‘살림’과 삶의 세상으로 건너오는 것이 자유인의 첫걸음이다. 죽임의 이분법 이데올로기를 극복하고 다채로운 자유인의 삶으로 가는 길로의 방향 전환이다. 허상의 살얼음에 불과한 구체제의 철벽을 과감하게 부수고 감옥에서 탈출하는 행동 선언의 제1조는 각자 도생에서 동반 공생으로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생각을 바꿔야 결사하고, 결사해야 생각이 바뀐다
우리는 결사의 때에 결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생각을 바꿔야 결사하고 결사해야 생각이 바뀐다. 이미 지역에서부터 결사의 씨앗들이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다. 이제 그 결사와 인민의 연대와 연합으로 지역과 중앙의 대의제 극장정치 무대가 완전히 허물어 지는 광경을 보게 될 것이다. 이미 우리는 광화문의 새로운 민주주의의 광장 정치 무대가 전국 각 지역의 민주주의 광장 정치 무대를 세우는 배움터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나날이 주권자 자유인으로 거듭나고 있는 한국의 인민들은 모든 구체제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있다. 서구화 산업화만을 맹목으로 추종하는 서구 중심 세계관도, 서구 학문에 그저 맹종하는 식민지 근성의 사슬도 과감하게 끊어버리고 과감하게 자유와 해방을 되찾고 있다. 스마트폰에 머리를 박고 우리의 생각을 외주로 주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벗어나, 스마트폰의 장점을 활용하면서도 사색하는 자유인으로 재생하고 있다. 혼밥과 혼술의 고립에서 벗어나 이웃과 친구와 대면하는 새로운 세상은 이미 우리 앞에 다가와 있다.
한국 민주주의 광장 정치의 뿌리는 지역이다. 뿌리가 마르면 나무 자체가 말라 죽는다. 지역공동체란 중앙 권력의 하위 권력으로 작동하는 지방과 달리 인민 스스로의 자치가 실현되는 인민의 생활 근거지다. 중앙정치, 서울정치의 무대인 광화문과 서울시청과 똑같이 중요한 민주주의 광장 정치의 무대는 지역공동체다. 지역에서부터 지역 주권자들이 스스로 나서서 인민 자치의 민주주의의 제도화를 추동하지 못하면 민주주의 광장정치는 백일몽으로 끝난다. 인민의 연대는 그저 막연한 개별 인민들의 뿌리없고 가벼운 연대가 아니라 자신이 생활하고 있는 지역의 이웃들과 연대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지역 광장 정치 연대가 대의제 극장정치를 무너뜨린다
대의제 극장정치 무대는 중앙이고 서울이다. 민주주의는 밑에서부터 이루어지는 하층 연대로서의 풀뿌리 인민 스스로의 자치와 통치다. 한국의 정치 현실에서 대의제 극장 정치를 포위해 밑에서부터 무대 자체를 허물 수 있는 힘은 수많은 지역의 상설 민주주의 광장 정치의 근거지 연대에서 비롯될 수밖에 없다. 지역이 연대 연합해야 중앙이 바뀐다.
지역 주민들 스스로 지역의 정치를 바꾸고 지역 정치결사체의 연대와 연합의 힘으로 국가 정치를 극장정치에서 광장 정치로 바꾸지 못하면 주권 탈환은 또다시 불가능해진다. 지긋지긋한 기득권 가짜 보수-진보의 적대적 공존 상태를 허물어뜨리지 못하면 장삼이사 인민의 인간다운 삶은 해결책이 없다. 숱한 지역 주민의 민주주의 광장 정치야말로 대한민국과 내 삶, 이웃의 삶을 바꾸는 튼튼한 근거지이다. 한국 민주주의의 운명은 이같은 수많은 지역 주민들의 일상의 광장 정치에 있다. 나아가 지역에서부터 인민 주권을 실현하는 주민발의, 주민투표, 주민소환, 주민감사의 일상에서의 제도화를 지역 주권자의 힘으로 실현해야 한다. 일정액 이상의 자치단체 사업은 반드시 주민투표를 거쳐야 하는 제도화를 실현해야 한다. 그래야 대의제 정경 유착의 자금줄이 끊어진다.
서울도 지역 가운데 하나이다. 서울광역시와 25개 자치구는 국가 권력이 작동하는 지방 행정기관이다. 그러나 마을공동체는 인민의 자치가 살아 숨쉬는 공간이다. 서울의 마을공동체 운동이 살아나 숨쉬는 공간이 바로 풀뿌리 지역이다.
서울의 전통 지역공동체가 산산히 해체된 폐허 위에서 우리는 지금 마을공동체의 부활을 목도하고 있는 중이다. 6.25 이전 170여만 명이던 서울시 인구는 지금은 1천만이 넘는 거대 도시로 변모했다. 산업화와 함께 불어닥친 이농민의 서울 집중이란 또한 도시빈민의 성장 과정이기도 했다. 이에 따라 1960년대 말부터 도시빈민 공동체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도시빈민 공동체 운동은 재개발의 광풍과 뉴타운 광풍 앞에서 주민들의 빈번한 이주로 인해 무력화 되고 말았다. 그런데 1980년대부터 공동육아 운동으로부터 시작된 마을공동체 운동은 이제 서울의 풀뿌리 지역 곳곳에서 새로운 지역자치의 공동체 운동으로 성장해 가고 있는 중이다. 이런 대도시의 지역 마을공동체 운동이야말로 협동조합 운동과 더불어 민주주의의 확실한 근거지가 아닐 수 없다.
서울의 밑바닥 마을공동체에서부터 365일 문이 열린 민주주의 상설 광장 정치가 지역 정치를 바꾼다. 지역 근거지 연대, 지역 상설 광장 정치 연대가 극장 정치를 몰아내고 한국 민주주의를 지속가능하게 만든다. 지역의 민주주의 정치가 중앙정치와 대의제 극장 정치를 해체하는 도미노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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