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집과 함께 타면서 하늘에 전해질 농부들의 소원은 별다른 거 없다. 가족의 건강과 풍작이 전부다. 한가위 추석에 둥그런 달을 보면서 드리는 기도가 풍작에 대한 감사라면, 정월 대보름날의 기도는 반대로 한 해 농사를 무사히 잘 지어 풍작이 되게 해 달라는 기원이다.
시절에 맞게 넉넉히 짓는 오곡밥
대보름을 상원(上元)이라고 하는데, 이는 '도교'에서 나온 말이란다. 이 상원에는 복을 내려 주는 천관(天官)이 땅으로 내려와 인간을 보살핀다고 전해진다. 천관은 인간에게 복을 주고 바람과 비를 다스리는 농사의 신이므로, 인간은 오곡밥을 차려 놓고 천관에게 복을 비는 것이다. <동국세시기>(1849)에서도 오곡밥을 제삿밥으로 생각하고 나누어 먹는다는 기록이 있으니, 오곡밥은 농사가 전부인 서민들에게 기원의 음식인 셈이다. <농가월령가> 속 약밥은 서민들의 오곡밥과는 달리 임금의 목숨을 구한 까마귀의 충절을 상징하는 음식으로 양반들이 주로 해 먹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대보름 전날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된다 하여 두 눈을 크게 뜨고 앉아 어떻게든 잠이 들지 않으려 애쓰던 모습이 떠오른다. 아무리 애를 써도 잠이 들어 버렸으므로 아침에 일어나면 눈썹이 하얘졌는지 확인하러 거울 앞으로 달려가고는 했다. 마을의 다른 집에서는 일찍 일어난 형과 누나가 늦잠 자는 어린 동생들 눈썹에 밀가루를 묻혀 두었고 그런 눈썹을 보며 우는 아이들도 있었다. 오래전에는 그렇게 '시절놀이'를 하고 '시절음식'을 먹으며 지냈다. 웃고 울며 맞는 대보름 풍경 속 아이들과 달리 어른들은 집 안의 모든 등을 환하게 켜 두고 밤을 지내셨다. 아마도 <동국세시기>에 등장하는 섣달 그믐날의 수세 풍속을 정월 대보름날에도 한 것으로 보인다. 정월 대보름날이 설날에 버금가는 명절이었음이 틀림없는 것 같다.
찹쌀, 멥쌀, 콩, 팥, 차조, 찰수수 등을 찾아 밥할 준비를 한다. 다른 곡식에 비해 단단한 팥은 미리 삶아 팥물을 버리지 않고 따로 두고 콩도 미리 불린다. 찹쌀이 주가 되는 밥이므로 밥물을 평소보다 줄이고 소금으로 밑간을 해서 밥을 짓는다. 오곡밥은 딱 한 번만 먹을 만큼 지어 먹고 나면 많이 아쉬우므로, 넉넉히 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이때를 대비해 봄부터 준비해 둔 묵나물들을 하나씩 꺼내 물에 불릴 건 불리고 데쳐서 손질할 건 손질해 나물 아홉 가지를 채운다. 밥을 하고 나물을 준비하고 복쌈을 위해 김을 구우면서도 나는 어린 시절 산골 마을에서 살 때 이 집 저 집을 돌며 복을 빌어 주고 덕담을 들으며 아홉 끼를 챙겨 먹던 그때가 그립다. 그래서 귀밝이술도 준비하고 부럼도 챙겨 본다.
● 오곡밥
재료
찹쌀 2컵, 멥쌀 1컵, 콩·팥·차조·수수 각 1/2컵, 물 4컵, 소금 1큰술
만드는 법
① 찹쌀, 멥쌀, 차조, 수수를 한데 섞어 깨끗이 씻은 뒤 30분간 물에 불려 둔다.
② 콩도 잘 씻어 미지근한 물에 30분간 불려 둔다.
③ 팥은 우르르 한 번 삶고, 이때 삶은 물은 버린다.
④ 한 번 삶은 팥을 팥알이 터지지 않게 다시 한 번 삶는다.
⑤ 압력솥에 준비해 둔 쌀과 잡곡을 모두 넣고 소금과 물을 부어 밥을 짓는다.(밥물은 팥 삶은 물과 콩 불린 물로 잡고 모자라는 분량은 맹물로 잡는다.)
※ 오곡밥은 떡을 하듯 김이 오른 찜통에 찌는 방법으로 해 먹어도 좋다. 이때는 중간에 약한 소금물을 두세 번에 나눠 넣어 가면서 쪄야 간이 살짝 있는 밥이 된다.
들깨나 소고기 넣어 볶은 고사리나물
지리산으로 오니 마을에 흔한 나물거리가 고사리다. 봄이면 생고사리를 물오른 봄 조기와 함께 찌개로 끓여 먹는다. 그러나 생고사리는 독성 운운하는 것을 떠나 아린 맛이 강해 그냥 먹기 힘들기에 데친 뒤 며칠씩 우려내고서 조리해야 한다. 생고사리가 마른 고사리보다 해 먹기 편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인 셈이다. 마른 고사리는 조리 전 복잡하고 귀찮은 밑 작업이 많다고 생각하는 것도 편견이다.
마른 고사리를 찬물에 담가 불에 올리고 우르르 한 번 끓으면 불을 끄고 식을 때까지 두면서 고사리의 상태를 살피면 된다. 좀 단단하다 싶으면 완전히 식을 때까지 그냥 두었다가 찬물에서 여러 번 헹구고, 부드럽게 불었으면 식지 않았어도 바로 찬물에 헹궈 담가 둔다. 그랬다가 나물로 볶으면 된다.
고사리나물은 어설프게 볶으면 해산물이 아닌데도 비린내가 난다. 그러므로 맹물이든 맛국물이든 같이 넣고 뚜껑을 덮은 채로 푹 끓이듯이, 국물이 다 졸아 없어질 때까지 볶는다. 그래야 맛있다. 같이 일하는 진안 출신의 선생님 집이나 남쪽의 대부분 집안에선 들깨를 갈아서 넣고 나물을 볶는다. 이번엔 소의 홍두깨살을 고사리와 비슷하게 채를 썰어 넣고 함께 볶는다. 들깨를 넣고 볶은 고사리나물도 맛있지만 소고기를 넣고 볶으니 감칠맛이 한 단계 이상 올라간 느낌이 난다. 오곡밥 한 술을 김에 올리고 고사리나물로 간을 맞춰 싸 먹으면 좋겠다.
● 고사리나물
재료
손질한 고사리 300g, 간장 1큰술, 들기름 1큰술, 다진 파 1큰술, 다진 마늘 1작은술, 맛국물 1/2컵, 깨소금
소고기 양념: 소고기(홍두깨살 또는 우둔살) 100g, 간장 1작은술, 참기름 약간, 후추 약간
만드는 법
① 5~6cm로 자른 고사리에 간장과 들기름을 넣고 간이 고루 배게 무친다.
② 소고기는 채 썰어 간장, 참기름, 후추를 넣고 조물조물 무친다.
③ 달군 팬에 소고기를 넣고 센 불에서 볶아 그릇에 담아 둔다.
④ 소고기를 볶은 팬을 씻지 않고 미리 무쳐 둔 고사리를 넣고 준비해 둔 맛국물을 부은 뒤 뚜껑을 덮고 중약불로 뭉근히 끓여 익힌다.
⑤ 국물이 자작하면 뚜껑을 열고 볶은 소고기를 넣고 같이 볶는다.
⑥ 다진 파와 마늘을 넣고 국물이 완전히 마르도록 볶는다.
⑦ 참기름과 깨소금으로 마무리하여 그릇에 담아낸다.
※ 말린 고사리 손질하기
① 말린 고사리는 10배로 불어난다고 생각하고 따끈한 물에 넣고 불린다.
② 고사리가 어느 정도 불어나면 불에 올리고, 우르르 한 번 끓으면 불을 끄고 식을 때까지 2~3시간 그냥 둔다.
③ 붉게 우러난 물을 버리고 계속해서 따뜻한 물로 3~4번 갈아 준다.
④ 건조 상태에 따라 다르지만, 고사리 300g이 필요하면 마른 고사리 30~40g을 불려 쓰면 된다.
대보름 무렵에 최고로 달달한 시금치
시금치는 봄동처럼 딱 벌어진 채로 땅에 누운 것들을 칼로 도려내다가 나물로 해 먹어야 한다. 그런 시금치로 만든 나물을 한번 먹어 본 사람은 시금치나물을 함부로 먹기 힘들어진다. 그보다 더 맛있는 시금치나물이 없기 때문이다. 잎은 지나치게 파랗지 않고 약간 누런빛을 보여도 괜찮다. 다만 줄기와 뿌리가 만나는 부근이 붉을수록 그 맛이 달다. 그런 시금치를 만나면 갖은 양념이 필요 없다. 그저 간장만 하나 있어도 된다. 거기에 하나 더한다면 들기름 정도면 충분하다. 파나 마늘 같은 향신료의 향이 시금치의 달달함을 해치게 되므로 나물을 무치는 데에도 절제의 미학이 필요하다.
미식가들이 말하는, 식재료 본연의 맛이 살아 있는 음식이라는 것도 별거 아닌 것 같다. 늘 해 먹어 온 흔하디흔한 음식 중에 그런 음식이 있을 것이고, 아마도 그중의 최고는 월동한 시금치로 조리한 나물이란 생각에 토를 달 여지가 없다. 다만 한 가지, 간을 할 때는 다른 때와 달리 마음을 넉넉히 내어 약간 간간하다 느낄 정도로 간장을 넣는 것이 좋다. 나물을 무칠 때 간과하면 안 되는 비법이라면 비법에 해당하는 방법이다. 나물을 무쳐 놔두면, 나물들이 안으로 간기를 빨아들이면서 심심해지기 때문이다. 건강에 좋다고 간을 무시하고 음식을 해 먹는 사람들이 있지만 음식은 간이 잘 맞았을 때 최고의 맛을 낸다.
닭띠해가 시작되었고, 곧 정월 대보름이다. 그날은 부디 보름달이 둥실 크게 떠올라 세상 구석구석 후미진 어느 한 곳도 빠짐없이 밝게 비추면 좋겠다. 그 빛이 올 한 해 세상 사람 모두 웃으며 살게 하는 힘이 되기를 바란다.
● 시금치나물
재료
손질한 시금치 300g, 소금, 물
양념: 국간장 2큰술, 들기름 1큰술, 다진 파 1/2큰술, 다진 마늘 1/2작은술, 볶은 통깨 약간
만드는 법
① 시금치는 다듬어 씻은 뒤 끓는 물에 소금을 넣고 데친다. (오래 데치면 시금치가 무르므로 시금치 무게의 10배 물에서 10초간 데친다.)
② 데친 시금치를 찬물에 헹궈 꼭 짠다.
③ 시금치를 먹기 좋은 길이로 자른다.
④ 자른 시금치에 양념을 넣고 무친 뒤 통깨를 넣고 마무리해서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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